강한 달러의 기세에 유로/달러 환율의 패러티(1유로=1달러)가 깨질 수 있다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의 금리 인하 속도가 괴리될 참이고, 무엇보다 경제 펀더멘털의 격차가 단기간 내 좁혀질 것 같지 않아서다. 성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한 유럽 경제는 ‘유로/달러 환율이 앞으로도 계속 패러티(1.0선) 위에 머무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키운다.
뒤처진 유럽
5월 6일 기준 달러를 보유한 사람이 외환시장에서 1유로를 사려면 1.077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유로존 출범 이래 거의 대부분의 시간, 1유로를 매입하는 데 드는 비용은 1달러를 웃돌았다.
유로/달러 환율이 1.0의 패러티를 깨고 내려간 가장 최근 사례는 2022년 가을이다. 그해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속된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유럽 경제의 출혈이 심해졌던 시기다. 유로존 경제가 나빠지고 미국과 금리차가 벌어지면서 2022년 9월 유로/달러 환율은 0.953선까지 밀렸다(유로 약세). 이후 반등하며 2023년에는 1.10선 위에서 한 해를 마감했지만 올 들어 다시 2.5% 하락했다.
유로/달러 환율이 당분간 기존 관성대로 패러티 위에 머무른다 해도 유로의 장기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위 차트는 미국과 유로존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추이다. 2000년 이후 유로존 경제가 31.8% 커지는 동안 미국 경제는 덩치를 63.4% 키웠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의 GDP가 기존 추세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옆으로 눕는 동안 미국 경제는 한층 속도를 냈다.
이 차트를 보면 유럽은 성장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향후 20년 이 괴리는 좁혀질까, 아니면 계속 벌어질까. 장롱에 20년 동안 지폐를 쟁여놓아야 한다면 유로여야 할까, 달러여야 할까. 단순히 기축통화라서 유로보다 달러에 손이 가는 게 아니다. 기축통화국만도 못한 경제 활력을 보이기에 유로를 쟁여놓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는 ‘유로’만의 문제일까. 달러와 짝을 이룬 통화들의 환율은 단기적으로 그날그날의 시장 논리와 재료에 따라 아래 위 진폭을 그릴 테지만, 기축통화국인 미국보다 성장과 혁신에 뒤처지는 통화들은 장기적으로 달러보다 강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정책 다이버전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글로벌 통화정책은 긴축에서 완화 사이클로 넘어가고 있다.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하 속도차에 의해 통화들의 우열이 나뉘는 국면이다. 그 속도는 궁극적으로 경제 펀더멘털의 우열에 의해 나뉜다. 이는 올 들어 유로가 달러에 대해 약해진 논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하 예상 시점은 연초 대비 많이 미뤄졌다. 예상 인하폭도 현저히 축소됐다. 고금리에도 미국 경제가 나름 잘 버티고 인플레이션은 재가열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다.
반면 유로존의 인플레이션 둔화는 미국에 비해 한결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다. 물가 오름세를 지탱할 만큼 경제가 강하지 않아서다. 그래서 유럽중앙은행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4월 정책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6월에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좀 더 선명하게 발신했다.
유가 상승 역시 유로를 압박하는 재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경제는 에너지 가격 변동에 한층 취약한 구조로 바뀌었다. 더 이상 러시아산 에너지를 싸게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원유를 자급자족하는 미국 경제는 유로존보다 상황이 낫다. 그 결과 유가 상승에 대한 외환시장의 반응은 달러 강세, 유로 약세를 띠기 쉬워졌다.
무시 못할 위험
유로/달러 환율이 패러티(1.0)에 도달하려면 현 레벨에서 7% 더 하락해야 한다. 최근 블룸버그가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서베이에 따르면 유로/달러 환율이 패러티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한 이코노미스트들은 없었다. 다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다.
LBBW의 모리츠 크레이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ECB가 금리를 내리는 동안 연준이 계속 금리를 동결할 경우 달러는 버터를 자르는 뜨거운 칼처럼 패러티를 돌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전략팀도 이 시나리오를 무시하지 않는다. 연준의 연내 금리 인하가 불발되는 가운데 ECB가 3회 이상 금리를 내리면 유로/달러 환율이 1.0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럽 경제에 추가적인 에너지 쇼크가 더해지면 유로/달러는 패러티를 깨고 내릴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수석 외환전략가인 키트 주커스는 “지난 20년의 대부분 기간 유로/달러 환율은 패러티 위에 머물렀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패러티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기적으로는 “연준이 계속 금리를 못 내리는 상황에서 ECB가 6월에 이어 7월에도 금리를 내리면 유로의 하락 압력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오드리 차일드 프리먼 외환전략가는 “우리는 유로/달러가 연내 1.0으로 떨어질 것이라 전망하는 진영은 아니며 오히려 1.10~1.15로 반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면서도 “우리의 유로 강세 전망은 미국 지표의 약화와 둔화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그리고 유로존 경제의 턴어라운드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다만 올 들어 전개 양상은 프리먼의 전제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