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0월호
전통적 화폐는 영원할까...한국 화폐의 역사와 미래 가치는?
6.25 전쟁과 제1차 긴급통화조치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제2차 긴급통화조치
박정희 의장(대통령), 1962년 제3차 긴급통화조치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한국 영화에서는 가끔 개인 금고에 5만원권 화폐를 가득 넣어 보관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테크 측면에서 보면 이런 보관 방식은 당연히 최악이다. 합법화할 수 없는 검은 돈이나 탈세 목적이 아니라면 은행에 입금해 3%의 이자라도 받는 게 정상적인 화폐의 보관 방법이다.
그런데 화폐는 과연 영원한 걸까.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쓴다. 일본은 엔화, 유럽은 유로화, 중국은 위안화를 쓴다. 한국은 당연히 원화를 쓴다. 흥미로운 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영원한 화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한국 화폐의 붕괴 역사를 살펴보자.
제1차 긴급통화조치
한국은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 탓에 역사적으로 주변국가들의 침략을 받는 일이 흔했다. 너무 먼 과거로의 역사 여행은 자제하고 가까이에 있는 1900년도부터의 역사를 살펴보자. 1900년도 초반까지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화폐로 통용됐다.
그런데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조선왕조)이 망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될 때까지 35년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했다. 이 시기에는 일본제일은행이 발행한 ‘엔’과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 엔’이 화폐로 통용됐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됐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에 도쿄에서 황급히 돈을 엄청나게 찍어내 한국으로 공수해 온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발행된 화폐로 인해 한국의 총 화폐유통량은 1개월 만에 기존의 2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화폐의 유통량이 2배로 늘어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화폐 가치는 폭락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렇게 급조해 발행된 화폐들은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자금으로 활용됐다. 또 친일 반민족행위자들과 한국에 있던 일본인 단체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살포됐다.
그 결과 한국 내의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몇 달 사이에 생활물가는 10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 당시의 물가 폭등으로 인해 한국의 수많은 서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때 만약 화폐 대신 금을 가지고 있었다면 화폐 가치 하락의 상당 부분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광복 이후 한국 경제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는 조선은행권이 ‘원(圓)’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통용됐다. 이런 과도기적 상황에서 5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한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은 한국은행 본점을 점령한 뒤 지하금고에서 미발행 조선은행권 ‘원(圓)’을 대량으로 발견한다. 북한군은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이 화폐들을 불법으로 마구 발행해 버린다. 이로 인해 화폐 가치는 다시 한 번 급락했다.
그래서 이 당시 조선은행권을 가지고 있던 평범한 국민들은 본인들이 보유한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걸 다시 한 번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물론 전쟁 중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 상황에서 위조지폐까지 유통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적군인 북한군이 불법으로 발행한 화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조선은행권 교환 및 유통에 관한 건’을 공포했다. 이는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새로 발행한 ‘한국은행권’과 1대1로 교환하도록 하고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정지하는 ‘제1차 긴급통화조치’였다.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새로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려면 필수적으로 신분 확인이 필요하니 불법으로 조선은행권을 손에 넣은 북한군은 한국은행권으로의 교환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보통 화폐 개혁을 할 때는 디노미네이션(화폐 단위 절하)을 같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1차 화폐 개혁 때는 1대1의 비율로 단순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제2차 긴급통화조치
이후 3년간의 기나긴 전쟁으로 경제는 폐허가 됐다. 한국 정부는 막대한 군사비 조달과 파괴된 생산시설 복구비용으로 통화를 대량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화폐 가치는 폭락했고 심각한 물가 상승 압력에 시달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53년 2월 15일에 ‘제2차 긴급통화조치’를 발표하고 기존의 대한민국 화폐였던 ‘원(圓)’을 ‘환(圜)’으로 변경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앞의 ‘제1차 긴급통화조치’와 달랐던 부분은 교환비율이 1대1이 아니라 화폐 액면 단위를 100분의 1로 낮춘 ‘화폐 단위 절하(디노미네이션)’였다는 점이다. 쉽게 설명하면 화폐 단위를 ‘100원(圓)’에서 ‘1환(圜)’으로 변경해 화폐 명칭도 바뀌고 화폐 교환비율도 100대1이 됐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 국가의 화폐가 어려움에 처하면 예외없이 디노미네이션이 진행됐다. 6.25 전쟁 시절의 한국뿐 아니라 1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 최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까지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도대체 왜 디노미네이션을 하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일부 은행예금을 동결해 정부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한국 정부는 화폐 개혁과 동시에 은행 예금도 일정 금액을 강제로 동결시켰다. 기존 예금은 10만환(圜) 이상, 긴급통화조치로 예입된 구권 예금은 3만환(圜) 이상을 대상으로 20~100%의 체증률을 곱해 특별정기예금과 국채예금으로 전환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통화 증가 요인이었던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을 진행했다. 결국 통화량 급증을 억제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큰 폭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 표기의 숫자가 커짐에 따라 발생하는 경제적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화폐 단위를 절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하철요금이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000원에서 100만원으로 인상됐다고 가정해 보자. 옛날처럼 현금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면 100만원의 지하철요금을 현금으로 직접 지불하는 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산과 지불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고액권을 발행하거나 아예 화폐 단위 절하를 단행하는 경우도 많다.
제3차 긴급통화조치
우리가 만약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장롱을 뒤진 결과 한국 화폐 다발이 무더기로 나왔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그런데 그 화폐의 발행일이 만약 1960년이라면 지금 시대에도 사용할 수 있을까. 정답은 사용할 수 없다.
한국에서 지금 사용되고 있는 ‘원(WON)’ 화폐는 1962년 6월 10일 도입된 화폐다. 그래서 그 이전에 발행된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교환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런 화폐라면 화폐 수집상에게 팔아버리는 게 100배는 더 이득이니까 말이다.
한국 국민들이 정부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건 해방 상황도 아니고 전쟁 상황도 아니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정부의 긴급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평온했던 시기의 난데없는 화폐 개혁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은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의장(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부가 집권했다.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산, 투자, 소비 등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예금 이탈이 진행됐다. 그리고 1년 뒤인 1962년. 침체된 경제 활동 때문에 안정적인 정권 유지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재정 적자와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계속 심각해지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6월 9일 밤 10시에 ‘제3차 긴급통화조치’를 발표했다. 박 의장은 부정 축재와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의 투기화를 막고 악성 인플레를 방지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게 바로 1962년 6월 10일의 ‘제3차 긴급통화조치’다.
화폐 개혁의 핵심은 ‘환(圜)’에서 ‘원’으로 단위를 바꾸고, 10대1의 비율로 절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구당 교환할 수 있는 돈이 최대 5000환(圜)에 불과했다. 원화로는 500원이다. 그 이상의 돈은 은행에 의무적으로 저금한 뒤 6개월에서 1년 후에 찾을 수 있었다. 또는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연 15% 배당 보장)으로 바꿔야 했다.
그런데 구권을 신권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은 발표 이후 고작 7일에 불과했다. 전 국민이 7일 안에 이 모든 걸 처리하는 게 과연 가능하긴 한 걸까. 개인의 사유재산을 상당히 침해하는 억압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당시는 전쟁 상황이 아니라 평시 상황이었다.
이 발표로 경제 현장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바로 월요일 새벽부터 은행에는 화폐를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일선 상점에서는 ‘구 화폐’를 받지 않거나 물건 가격을 크게 올렸다. 아예 문을 닫은 상점도 많았다. 한국 경제는 더욱더 침체됐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왜 기습적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하는 무리수를 둔 걸까. 화폐 개혁을 하면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사람들과 중국 화교들이 엄청난 규모로 숨겨둔 돈을 ‘신 화폐’로 바꾸려 할 것이고 이때 강제로 예금으로 묶어서 재정 적자를 메우고 산업자금으로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1962년의 통화 개혁은 한국은행 총재 등 관계 당국자와의 사전 협의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신은행권은 정부가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 사에 비밀리에 발주해 제조했고, 6월 9일 중앙정보부와 군의 도움을 받아 한국은행 본·지점으로 현송(現送)됐다. 실무작업을 주도했던 공무원들은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게 진행된 통화 개혁의 기존 ‘환(圜)화’ 회수내역을 보면 100만환(신화 10만원) 이하의 소액이 90.5%를 차지했고 1억환(신화 1000만원)을 초과하는 예입은 총 7건으로 12억환에 불과해 당초 정부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의 현금 보관 규모는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부정 축재를 통해 숨겨진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던 셈이다.
또 중국 화교들의 경우 이미 중국 정부에 몇 번의 뒤통수를 맞은 경험들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금을 선호해 왔다. 이런 이유로 중국 화교들은 돈이 생길 때마다 화폐 대신 금으로 바꿔서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원대한 포부와 달리 화폐 개혁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화폐 개혁으로 인한 경제 현장의 극심한 대혼란과 미국의 우려까지 전달돼 군사정권의 예금봉쇄 정책은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1개월 뒤인 7월 13일에 봉쇄예금 동결을 해제했다. 이로써 기습적인 통화 개혁은 지하자금의 산업자금화, 인플레이션 방지 등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부작용만 남긴 채 초라하게 끝났다.
1962년의 화폐 개혁 이후에 한국 국민들은 현금자산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15% 이자율(현재 시점에선 고금리지만 당시는 물가상승률이 매우 높았다)의 은행 예금을 기피하고 토지와 주택 구입 등 실물자산 투자로 돌아섰다. 한국 국민들의 부동산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화폐는 안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국가의 필요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화폐 개혁이 일어날 수 있고 종잇장처럼 화폐가 사라질 수도 있다. 아무리 군사정권 시절이라지만 7일 안에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지 않으면 휴지가 돼버리는 정책은 공포스럽다.
물론 정부가 화폐를 강제로 빼앗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통 화폐 개혁을 할 때는 ‘구 화폐’를 ‘신 화폐’로만 바꿔주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다. 한 사람이 교환할 수 있는 돈에 상한선을 두고 그 이상의 돈은 은행에 강제적으로 예금시켜 버린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개인 재산권 행사에 굉장한 침해를 받게 된다.
1962년의 화폐 개혁으로 변경된 화폐 ‘원’이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는 ‘원화’다. 화폐 개혁 이전인 예전의 원(圓)과 구별하기 위해 지금의 원은 한글로만 표기하고 영문 표기는 ‘WON’이다. 한국 화폐 원(WON)의 역사는 고작 60년에 불과하다.
한반도가 평화통일 될 경우 한국 화폐 ‘원’의 가치는?
이제 오래전 우리의 소원대로 한반도가 평화통일 되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가까운 미래에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확률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글로벌 시장에서 유명한 투자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짐 로저스는 2013년에 국제시장에서 북한 화폐를 대거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짐 로저스는 왜 북한 화폐에 투자했을까. 만약 남북이 통일될 경우 한국이 충분히 보상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짐 로저스의 투자를 이해하려면 동독과 서독의 통일 사례를 살펴보면 된다. 1990년 독일의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은 각자가 발행한 마르크(mark) 화폐를 썼지만 교환비율은 달랐다. 국가 재정이 취약했던 동독의 화폐는 암시장에서 서독 화폐의 4분의 1에 교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서독 사람들이 희생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통일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동독과 서독 마르크의 교환비율을 1대1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동독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봤다. 추가로 발 빠르게 암시장에서 동독 화폐를 대거 매입했던 서독 투자자들도 4배의 이익을 얻게 됐다. 짐 로저스가 노리는 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 화폐의 상황은 어떨까. 북한은 2009년에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전격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화폐 개혁 이후인 2023년 현재 기준으로 ‘북한 원’의 환율은 1달러당 8000원 내외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원·달러 환율 1300원과 비교하면 화폐 가치가 6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짐 로저스는 혹시 평화통일이 되면 한국이 독일처럼 화폐 교환비율을 1대1이나 1대2로 너그럽게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굳이 가능성을 따져보면 한반도의 평화통일보다 북한이 또 한 번 화폐 개혁을 단행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 여전히 심각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 다시 한 번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 구권을 가지고 있는 짐 로저스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짐 로저스의 명성은 세계적이지만 그가 과연 북한 화폐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확률은 희박하지만 먼 미래에 남북이 통일됐을 때 한국 정부가 과거 독일처럼 북한과의 화폐 교환비율을 너그럽게 가져가는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원화를 보유한 한국 국민들은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부 자산은 원화보다 달러로 보유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미래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과거 6.25 전쟁을 겪었던 한국뿐 아니라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했던 독일, 최근의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까지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화폐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달러는 기축통화이긴 하지만 그 역시 신용화폐이자 종이화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화폐 붕괴의 보험 성격인 ‘금’이나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기도 하다.

2023년 10월호
영욕의 독일 화폐 ‘마르크’...나락으로 떨어진 베네수엘라 화폐
독일, 막대한 전쟁배상금·화폐 남발
초인플레이션과 외환시장 붕괴 초래
베네수엘라, 무리한 복지정책으로 재정 망가져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요즘 전 세계는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고 있다. 한국의 빵집이나 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하다 껑충 뛴 물건 가격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식당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미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은 기준금리를 무려 5.5%까지 끌어올렸다. 불과 1년 6개월 만에 금리를 5% 이상 인상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흔하지 않다. 저금리 때 변동금리로 대출받은 채무자들은 요즘 죽을 맛이다.
인플레이션을 다르게 표현하면 화폐 가치 하락이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가 뭘까. 적기 대응에 실패하면 최악의 경우 화폐 개혁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를 꼽을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이제부터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사례를 살펴보자.
막대한 전쟁배상금 조달 위해 마르크화 남발
제1차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약 4년 동안 진행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패배했고, 이 전쟁으로 전 세계 900만명 이상의 군인들이 사망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승전국들은 패전국인 독일(바이마르공화국)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인 2250억마르크를 요구했다. 특히 프랑스가 강경했다.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2년간의 재협상 끝에 1921년 5월 최종적으로 1320억마르크로 결정됐다. 그런데 배상금은 마르크화가 아니라 금이나 외국환으로 갚아야 했다. 따라서 독일의 환율 약세로 마르크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배상금의 명목 규모도 증가할 수밖에 없다.
과연 독일은 이 전쟁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없다. 독일은 이미 제1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채권’을 신나게 발행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배상금을 받아서 빚을 싹 다 갚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거꾸로 패배했으니 빚을 상환할 다른 방법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영국 협상단 대표였던 천재 경제학자 케인즈는 배상금 협상 당시부터 이 막대한 배상금 요구는 독일 경제의 생산능력으로 갚기에는 불가능해 결국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드디어 1921년 여름, 독일은 정상적인 재정 정책으로는 절대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마르크’ 화폐를 말 그대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찍어낸 마르크화를 외국 화폐로 교환해 전쟁배상금을 분할로 갚아 나갔다. 당연히 독일 마르크 환율은 대폭락했다. 독일 정부가 돈을 찍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한 후 중앙은행(독일제국은행)이 직접 인수하는 방식이다.
중앙은행은 채권을 매입하기 위해 화폐(마르크)를 찍어냈다. 이런 방식으로 재정적자를 조달했는데 이를 ‘부채의 화폐화’라고 부른다. 이 당시의 독일과 달리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정부 채권을 중앙은행이 직접 인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금기시하고 있다.
초인플레 광풍으로 외환시장 완전 붕괴
이때부터 시작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기록은 전 세계 모든 경제학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일단 독일의 마르크화는 외환시장에서 완전히 붕괴됐다. 1921년 상반기까지는 1달러당 90마르크였지만 11월에는 330마르크, 2년 뒤인 1923년 12월에는 모든 게 완전히 붕괴돼 1달러당 4조2000억마르크가 됐다. 마르크화가 종이보다 저렴해진 것이다.
외환시장이 붕괴된 원인은 독일 내부에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초인플레이션이란 물가가 극단적인 속도로 상승하는 현상인데 1개월에 50% 이상 상승했을 때 초인플레이션으로 분류한다. 독일의 인플레이션율은 자료마다 약간 상이하다. 2년간 무려 10억배가 상승했다는 주장도 있고, 300억배라고 주장하는 자료도 있다. 어쨌든 초인플레이션이 절정이던 1923년에 독일의 월 인플레이션은 약 3만%에 달했다.
이런 무지막지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경제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돈의 가치가 워낙 떨어져서 빵 한 조각 사러 손수레 가득 화폐를 가지고 상점에 갔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또 물건을 사는 동안 빈 수레를 훔쳐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화폐를 받지 않고 물물거래를 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실물자산 없이 현금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의 재산이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부동산이나 주식 없이 현금과 채권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재산은 모두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반대로 집, 토지, 공장 등의 부동산 실물자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큰 이득을 봤다. 주식 또한 큰 폭의 변동성은 있었지만 휴지가 된 현금이나 채권보다 훨씬 훌륭한 방어자산의 역할을 했다.
이 광란의 초인플레이션은 독일이 화폐 개혁을 통해 기존의 ‘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 교체하면서 진정됐다. 그 이후에도 독일은 동독과 서독이 분리되면서 ‘동독마르크’와 서독의 ‘도이치마르크’ 등 다양한 화폐로 계속 변경돼 왔다. 마지막으로 쓰고 있는 화폐가 지금의 ‘유로’다.
독일 화폐의 흑역사나 한국 화폐의 흑역사를 살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 원리는 같다. 화폐는 전쟁이나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해 언제든 휴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산가치 보호를 위해 실물자산인 부동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부동산에 거품이 넘쳐나도 경제위기 상황이 오면 최소한 화폐보다는 좋은 자산이 된다. 물론 유동성까지 고려한다면 ‘금’이나 ‘비트코인’도 일부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는 전략이 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역사적 교훈은 뭘까. 전쟁은 안 하는 게 최고지만 만약 불가피하게 전쟁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승전국은 패전국에 가혹할 정도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내라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무리한 복지정책으로 망가진 자원부국
독일의 사례는 1920년대에 발생했던 오래전 옛날 얘기다.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 사례를 살펴보자. 2017년부터 시작된 베네수엘라 화폐의 흑역사는 독일과 비교해 봐도 만만치 않다.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베네수엘라의 인구는 3000만명이며 석유매장량은 세계 1위로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많다. 이렇게 자원이 많은 나라들은 역설적으로 ‘자원의 저주’에 걸릴 확률이 높다.
자원의 저주란 자원이 풍부한 국가일수록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국민 삶의 질이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그 이유는 석유 채굴에만 집중해 제조업의 발전이 느리기 때문이다. 석유 판매로 세금을 편안하게 걷는 정부 역시 다른 산업 육성에 관심이 없고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다. 이렇게 자원의 저주에 걸린 나라들이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많은 편이다.
석유는 가격 변동성이 큰 원자재다. 석유가격 상승기에는 정부가 재정을 마구 풀어 국민들에게 통 크게 복지 정책을 써도 상관없다. 하지만 석유가격 폭락기에도 그런 복지 정책이 계속 유지된다면 구조적으로 엄청난 재정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1999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우고 차베스는 통 큰 복지 정책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대표적인 복지 정책으로는 무상주택, 무상교육, 무상의료 시리즈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국제유가는 큰 폭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서 이런 복지 정책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 밖에도 민간기업 1200개를 국유화하는 등 사유재산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책들을 많이 집행해 왔다.
차베스는 4번이나 연임하며 거의 독재자처럼 국가를 통치했는데 2013년에 갑자기 암으로 사망했다. 후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베네수엘라의 붕괴가 시작됐다. 이때쯤 미국이 셰일가스 개발에 성공해 석유가격의 하락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베네수엘라가 복지 정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두로 대통령은 여전히 복지 정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결국 재정적자가 심각해지자 1920년대의 독일처럼 돈을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화폐 남발의 결과는 참혹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2023년 4월 발표한 ‘세계경제 전망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경제성장률은 2018년 -19.7%, 2019년 -27.7%, 2020년 -30%로 계속 뒷걸음질쳤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소폭의 플러스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하다.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도 2020년에는 무려 328%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돈을 도대체 누가 다 빌려줬는지 궁금할 정도다. 다행히 2022년에는 부채비율이 158%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한국의 3배 수준이다. 실업률은 2018년에 36%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에는 실업률 데이터 자체가 없다.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까. IMF의 자료에 따르면 2018년의 인플레이션율은 6만5374%다. 다음해인 2019년에는 1만9906%로 조금 개선됐고, 2020년에는 2355%로 확 낮아졌다. 그리고 2022년에는 드디어 안정(?)을 찾아 201%에 그쳤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수치를 보다 보니 계산이 잘 안 된다. 쉽게 정리하면 2018년 한 해 동안에만 물가가 653배 상승했다는 뜻이다. 1년 전에 1만원 하던 햄버거 가격이 1년 뒤에는 653만원이 됐다는 의미다. 2019년에도 다시 199배가 올랐으니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 IMF 데이터가 정말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냥 화폐가 붕괴됐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한국에서도 지난 2020년 말 한 판에 5000원이던 계란 가격이 2개월 만인 2021년 2월에 7000원 이상으로 폭등한 적이 있었다. 이 정도의 겸손한 물가 상승에도 주부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생활물가와 밀접한 계란 가격 폭등에 당황한 한국 정부는 미국산 계란까지 긴급 수입하며 물가 안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래 봐야 한국의 계란 가격은 고작 40% 올랐을 뿐이다. 이 계란 가격을 베네수엘라의 2018년도 물가상승률로 대입해 보면 5000원짜리 계란 한 판이 326만원으로 폭등한 셈이다. 과연 국민들은 납득이 되겠는가. 이런 비현실적인 수치가 나오는 게 바로 초인플레이션이다.
베네수엘라의 충격적인 두 차례 화폐 개혁
베네수엘라의 화폐는 ‘볼리바르 푸에르테’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플레이션이면 화폐 개혁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해 2018년 8월에 ‘볼리바르 소베라노’라는 신 화폐가 발행됐다. 구 화폐와의 교환비율은 무려 100,000 대 1이었다. 무시무시한 교환비율이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화폐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초인플레이션은 계속됐다.
IMF가 발표한 2019년의 베네수엘라 인플레이션은 무려 199배다. 2018년 8월의 화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결국 2021년 10월에 다시 한 번 화폐 개혁을 단행해 ‘볼리바르 디히탈’이라는 신 화폐가 발행됐다. 전자화폐 기능까지 부여된 화폐다. 이번에는 구 화폐와의 교환비율이 무려 1,000,000 대 1 이었다.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 없이 그냥 화폐만 들고 있던 국민들은 쫄딱 망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국가 위기 상황이 되면 자주 쓰이는 또 다른 수단이 바로 은행 예금 동결이다. 베네수엘라는 국민들 개개인의 은행 예금을 동결하고 하루의 현금 인출금액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정책을 썼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6.25 전쟁과 박정희(당시 최고회의 의장) 군사정권 시절의 화폐 개혁 때도 사용됐던 흔한 정책이다. 국가가 어려워지면 국민들의 현금재산은 아주 쉽게 사용을 제한받을 수 있다.
사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경우 예금이 동결되든 말든 별 상관도 없다. 이미 자국 화폐는 거의 휴지가 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했던 암호화폐 ‘페트로’도 실패했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2019년에는 화폐거래 대신 물물교환이 대세였다. 이런 상황이니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일자리도 없고 필수품도 구하기 어렵고 식량도 부족하고 치안도 엉망이다.
그래서 전 국민들의 베네수엘라 탈출이 이어졌다. 경제 위기가 시작된 2015년에 3062만명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인구 중 최소 500만명 이상이 최근 7년간 베네수엘라를 탈출해 인근 국가들로 흩어졌다. 먹고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이에 2022년에는 베네수엘라 인구가 2691만명까지 줄어들었다. 실제로는 공식 감소 인구 수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인근 국가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한 베네수엘라의 부동산 가격은 어떻게 됐을까. 인플레이션 초기와 중기까지는 부동산 가격이 대폭등했다. 하지만 부동산의 수요층인 국민들이 나라를 떠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경우엔 과거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과는 달리 실물자산인 부동산을 들고 있어도 반드시 안전한 건 아니다.
베네수엘라를 떠난 약 500만명 중 일부는 탈출 자금으로 집과 가게를 처분해 일시적으로 부동산 공급이 증가하고 수요는 줄어들었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잠깐 하락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회복 중이다. 국민들이 모두 베네수엘라를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국 화폐는 아예 휴지가 됐으니 실물자산인 부동산과 비할 바가 아니다.
유일한 희망은 원유 수출 재개
주 베네수엘라 대사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서는 현재 상품 구매 시 자국 화폐 대신 미국 달러화를 사용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기업들 중 65%가 종업원들에게 급여를 달러로 지급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자국 화폐 붕괴로 인해 신용카드 사용은 급감하고 기축통화인 달러 사용이 일반화된 셈이다.
베네수엘라 서민들의 실제 생활은 심각하다. 유엔세계식량계획(WEP)이 2020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국민 3명 중 1명이 식량 불안 상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동 빈곤 또한 심각하다. 부모들은 돈벌이를 위해 해외로 나갔거나 아예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밥을 굶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베네수엘라 아동이 1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비공식 통계도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치 구조는 복잡하다. 2018년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재선 결과에 대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됐다. 대선 결과에 불복한 야권 지도자 후안 과이도는 임시 대통령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60여 개국도 후안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결국 베네수엘라는 ‘한 지붕 두 대통령’ 체제가 4년간 이어지다가 2022년 말에 과이도 임시 대통령이 퇴진하면서 상황이 정리됐다.
대선 다음해인 2019년 당시 베네수엘라와 단교한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추가로 미국 정유사 철수 등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경제 제재 종류가 무려 900개가 넘는 실정이다. 마두로 정권의 퇴진을 압박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2022년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유가가 폭등하면서 분위기가 살짝 바뀌고 있다.
세계 1위 원유매장량을 가진 베네수엘라의 물량으로 유가를 안정시키려는 극약처방마저 필요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원유는 중질유라 정제 비용이 높아 경질유보다 인기가 낮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베네수엘라는 자체적인 원유정제 기술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유의 대량 공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구조다.
하지만 심각했던 미국 내 유가 폭등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강경했던 미국의 입장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어쩔 수 없이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11월에 베네수엘라에 남아 있던 미국 셰브런 사의 원유 생산 재개를 6개월간 일시적으로 허용했다. 셰브런 사는 당연히 정제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주 베네수엘라 대사관에 따르면 2023년 5월 기준으로 베네수엘라는 셰브론 사의 원유 개발을 통해 미국에 18.5만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대미 원유 수출국가 중 6위다. 또 미국은 계속해서 추가적인 제재 완화와 관련된 고위급 회담을 진행 중이다.
미국 입장에서 가장 큰 고민은 2024년의 대선에서도 마두로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은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 한다. 반면 마두로 대통령은 역내 우호 국가들인 러시아·중국과의 외교 확대를 통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결론적으로 마두로 대통령이 재집권할 경우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어려워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가 해소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베네수엘라 경제전문기관들은 2023년의 인플레이션율을 300~400%까지 예상하며 여전히 베네수엘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끝나지 않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유일한 희망은 국가 경쟁력의 거의 전부인 원유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일시적으로 완화해 준 덕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스스로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은 뭘까. 곧 휴지가 될 게 뻔한 지국 화폐 대신 ‘달러’를 보유하는 게 최선이다. 실물자산인 부동산도 화폐 가치 하락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물론 달러 기준으로 따져보면 베네수엘라의 부동산 또한 최악이다. 하지만 자국 화폐 기준으로는 그나마 선방하고 있다.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자산의 일부는 금이나 비트코인으로 보유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부동산은 자국 화폐 가치 폭락을 방어할 수는 있지만 유동성이 낮다는 것이 단점이다. 반면 금이나 비트코인은 유동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경제 위기 시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든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서민들이 대응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산 보전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원한다.

2023년 10월호
[화폐 vs 비트코인] 달러가 세계 최강? 화폐 가치는 추락 왜?
美 닉슨 대통령의 배신과 금본위제의 붕괴
맥도널드 빅맥 햄버거 가격 50년간 8배 폭등
인플레이션은 늘 화폐적 현상...대안은 비트코인?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미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유리한 점이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걸 꼽으라면 모국어가 영어라는 점이다. 영어를 쓰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공평한 게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미국 사람들의 화폐가 달러라는 사실이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화폐로 사용하니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정부의 외환보유고 고갈로 인한 외환시장 붕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국 화폐가 심각하게 붕괴된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필사적으로 달러를 모으고 있다. 한국은 국가 경제가 튼튼한 편이지만 만일을 대비해 많은 국민들이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는 달러예금이 유행이었다. 지금은 미국 주식 투자를 통해 달러 확보와 주식투자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미국 국민들은 어떨까. 만약 달러가 미래에도 영원히 기축통화 역할을 한다면 미국 국민들은 별도의 비상용 통화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달러를 계속 사용하면 된다. 달러의 위력은 강력하다. 그런데 과연 달러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제왕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브레튼우즈 체제란?
금은 인류가 수천 년간 사용해온 화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종이화폐가 금의 지위를 대신했다. 종이화폐가 신뢰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뭘까.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신뢰받는 금이 뒷받침해 주는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화폐가 유통됐기 때문이다.
금본위제란 정부가 금을 대량 보유하고 있으면서 보유한 금의 가치만큼만 종이화폐를 발행하고 언제든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금으로 바꿔주는 방식이다. 이 제도가 사람들에게 아무 신용이 없던 종이화폐를 신뢰하게 만든 결정적인 장치였다.
미국의 화폐인 달러 역시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시작됐다. 우리는 모두 달러를 신뢰한다. 달러는 전 세계의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달러 위주의 체제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장장 6년간 진행된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1월에 열린 브레튼우즈 회의가 기축통화 달러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니 고작 8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기축통화 달러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44년 당시 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미국은 전쟁 이후를 걱정했다. 그래서 세계의 금융 질서를 새로 만들기 위해 44개국 약 700여 명의 대표들과 미국 브레튼우즈에 모여 전쟁 이후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 석상에서 새로운 통화제도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영국의 천재 경제학자 케인즈는 국제통화인 ‘방코르(Bancor)’ 도입을 주장했으나 패권국이 된 미국 대표 화이트의 입김이 훨씬 셌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하기로 결정됐다. 이것이 바로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BWS)다.
이전에도 영국 등 일부 나라에서는 각자 금본위제를 시행해 왔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지면서 금 보유량은 야금야금 줄어들게 된다. 이후 2차세계대전까지 진행되면서 유럽 각국은 미국의 물자 대금을 금으로 지불했고, 패전국들도 전쟁배상금을 금으로 납부했다.
그러니 대부분 나라의 창고에서는 금이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종전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0%를 보유하고 있는 금 부자가 돼 있었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실질적으로 금본위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었다.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핵심은 종이화폐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은 미국에만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브레튼우즈 체제의 금본위제는 미국이 중심이 됐다. 나머지 국가들은 전쟁으로 망가진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폐를 찍어내야 했는데 정작 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통화들을 모두 미국달러와 고정해 간접적으로 금과 연결시켰다. 통화 환율을 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가 시행된 것이다. 대신 달러는 35달러당 1온스의 금으로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용이 부족했던 각 나라의 종이화폐를 전 세계 70%의 금을 가진 미국이 간접적으로 보증하는 효과를 누리게 됐다.
브레튼우즈 회의는 이 밖에도 세계은행(The World Bank)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설립도 결정했다. 이 기구들로 인해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이 활성화되는 새로운 세계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금본위제 붕괴로 종언 고한 고정환율제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가 돼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약 30년간 금본위제하에서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의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일까. 이 약점을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트리핀이 설명해 일명 ‘트리핀의 딜레마’라 부른다. 요약하면 기축통화인 달러를 너무 적게 발행해도 문제이고 너무 많이 발행해도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고정환율제도는 무너질 거라는 예측이었다.
2023년의 현실세계에서 한국의 홍길동이 1만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침체된 미국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달러를 풀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달러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는 반대로 말하면 큰 폭의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달러의 가치가 아무리 떨어져도 상관없이 미국 정부가 금본위제도를 계속 유지해 35달러당 1온스의 금으로 바꿔 주는 정책을 지속한다면 홍길동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가장 유리할까. 당연히 1만달러를 미국 정부에 넘겨주고 [1만달러/35달러=286온스]의 금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비싼 가격에 종로 금은방에 팔아버릴 것이다.
과거에 금은 금본위제로 인해 이론적으로는 달러와 강력하게 묶여 있었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는 마구 발행해 넘쳐나는 달러보다 채굴이 제한적인 금의 공급량이 훨씬 적었다. 당연히 1온스당 금 가격은 미국 정부의 고정가격인 35달러보다 더 높은 가격에 시장에서 거래돼야 정상이다. 그래서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금으로 바꾸는 게 훨씬 더 이득이다.
이 당시에 민간은 금 태환 요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국가 간에는 가능했다. 만약 한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이 미국에 달러를 넘겨주고 금을 받아 다시 시장가격에 팔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금은 순식간에 고갈될 것이다.
1971년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계속되는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천문학적인 재정을 전쟁 비용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모든 전쟁은 예외없이 그 나라의 재정을 붕괴시킨다. 미국은 결국 보유하고 있는 금 수량보다 더 많은 달러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 되자 유럽 주요 국가들의 달러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했다.
마침내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이 미국에 달러를 주고 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명 금 태환 요구다. 하지만 미국의 금은 고갈돼 가고 있었다. 만약 유럽 국가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면 미국은 보유하고 있는 금의 대부분을 다른 나라에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TV에 나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중단하라고 재무장관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달러가 금과 다를 바 없다고 믿고 있었던 전 세계 국가들을 경악하게 한 이 사건을 우리는 ‘닉슨 쇼크’라고 부른다.
금 태환 거부는 사실상 미국의 배신이자 닉슨의 배신이었다. 이로써 30년간 유지되던 브레튼우즈 체제와 고정환율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달러는 약세로 돌아섰고, 달러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유럽 주요 국가들과 일본은 달러 가치 하락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금의 제약에서 벗어난 달러...건전 화폐 될 수 없어
하지만 비로소 미국은 금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껏 달러를 찍어낼 수 있게 된다. 드디어 순수하게 국가의 신용만으로 화폐가 유통되는 신용화폐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과연 미국 정부는 금보다 믿을 만한가. 과연 미국 정부의 신용만으로 유지되는 달러는 믿을 만한 화폐인가.
미국이 1년에 얼마나 많은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지를 수치로 확인한다면 그 믿음은 안개처럼 사라질 수 있다. 사실 미국 정부뿐만이 아니다. 한국, 일본, 중국, 유럽, 러시아 등 각국 정부들의 신용만으로 자체 발행한 법정화폐들은 과연 믿을 만한 걸까.
금본위제가 폐지된 1971년부터로 계산하면 현대적 개념의 미국 ‘달러’는 불과 50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다. 미국의 이 신용화폐는 과연 영원불멸할 것인가. 만약 달러가 영원불멸하지 않다면 그 이후에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달러는 ‘명목화폐’일 뿐이다. 인쇄소에서 마구 찍어내는 달러는 절대 ‘건전화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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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가 세계 최강? 그런데 화폐 가치는 왜 이 모양?
최근 3년간의 달러 강세 현상은 엄청나다. 지금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3년 전인 2020년 말 기준 원·달러 환율은 1085원으로 원화 초강세였다. 지금의 1335원과 비교해 보면 3년간 원화가 무려 -23% 약해진 셈이다. 일본은 더 심하다. 103엔이었던 엔화가 147엔으로 달러 대비 무려 -43% 폭락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절하폭은 -12%로 역시 마이너스지만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어쨌든 현재는 미국 달러화의 초강세로 인해 미국 외 다른 나라 환율이 다 심각한 약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의 화폐 가치가 떨어졌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지금 미국 달러가 초강세인 건 맞다. 하지만 그건 단지 국가 간의 환율 거래일 뿐이다. 실질화폐의 가치는 오늘도 어김없이 하락하고 있다. 다만 미국 달러의 가치 하락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좀 덜할 뿐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살펴보자. 1970년에 미국 맥도날드에서 판매하는 빅맥 햄버거 가격은 얼마였을까. 약 65센트(845원)였다. 당시 감자튀김은 25센트(325원), 코카콜라는 15센트(195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3년 기준 미국의 맥도널드 빅맥 가격은 평균 5.5달러(7150원)로 폭등했다. 50년간 대략 8배 이상 오른 셈이다.
빅맥 햄버거 가격으로만 계산해 보면 미국 달러의 구매력 가치는 지난 50년간 약 90% 폭락했다. 물론 미국 달러의 구매력 가치는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하다. 하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달러마저도 심각한 화폐 가치 하락 현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짜장면 가격은 어땠을까. ‘한국물가정보’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의 짜장면 가격은 100원이었다. 지금은 한 그릇에 7000원 가까이 한다. 무려 70배 폭등한 셈이다. 짜장면 가격으로만 계산해 보면 한국 원화의 구매력 가치는 지난 50년간 98% 이상 폭락했다. 실질화폐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인플레는 화폐적 현상”...대안은 비트코인?
인류 문명의 3대 발명품은 불, 바퀴, 언어(문자)라고 한다. 그런데 언어 대신 화폐를 꼽는 경우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아이폰을 꼽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화폐는 그만큼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화폐의 3대 기능은 교환기능, 가치척도 기능, 가치저장 기능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은 매우 취약하다. 지난 50년간 자산을 화폐로만 보유했다고 가정할 경우 최소 90% 이상의 구매력 가치가 하락했다. 은행 예금에 넣었을 경우 이자가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방어에는 역부족이다. 또 세금까지 고려하면 은행 예금은 그다지 현명한 투자 전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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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든 화폐적 현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특히 현대의 인플레이션은 화폐 남발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또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화폐량이 생산량보다 빠르게 증가할 때 발생하는 화폐적 현상”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의 주장처럼 2008년도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화폐 남발은 계속됐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들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2020년의 코로나19 기간에도 화폐 남발은 반복됐다. 금본위제가 없어진 지금 더 이상 금의 제약을 받지 않는 미국 정부의 화폐 발행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다.
이런 미국의 화폐 남발을 불만스럽게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비트코인을 최초로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사토시 나카모토다. 그는 논문을 통해 “중앙은행은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폐 통화의 역사는 그 신뢰의 위반으로 가득하다”며 맹비난을 쏟아냈다.
그가 기존 화폐의 대안으로 설계한 비트코인만의 차별화된 장점은 뭘까. 정부가 원하면 언제든 찍어낼 수 있는 기존 화폐와 달리 비트코인은 최대 발행량이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최초 발행 이후 130년간 정확히 2100만개만 발행 가능한 한정판 화폐다. 물론 비트코인이 아직 화폐의 지위를 확보한 건 아니다.
비트코인이 기존 화폐와 차별화된 또 하나의 강점은 뭘까. 중앙집중적인 통제 없이 분권화된 최초의 화폐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화폐 시스템은 정부나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는다. 어찌 보면 상식적으로 당연하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너뜨린 게 바로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중앙집중적인 정부나 은행 개입 없이 개인들끼리 수평적으로 서로 연결돼 빠르고 안전한 거래가 가능하다.
미국을 제외한 한국, 일본, 중국,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국민들까지 모두 자국 통화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비한 비상통화로 달러를 선호한다. 그렇다면 기축통화인 달러를 자국 화폐로 사용하고 있는 미국인 입장에서 현명한 포트폴리오는 뭘까.
가치저장 기능이 약한 달러(화폐) 대신 실물자산인 핵심 도심지의 ‘부동산’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할 필요가 있다. 높은 세계시장 점유율로 탄탄한 이익 구조를 갖춘 ‘미국 플랫폼기업 주식’들도 포트폴리오 구성에 꼭 필요하다. 추가로 비트코인이라는 엄청난 발명품이 나타났으니 비트코인도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달리 이제 일상적인 화폐 가치 하락으로 고통받던 전 세계인들에게 화폐 가치를 방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혁신적인 수단이 생긴 셈이다. 물론 이 포트폴리오 전략은 비트코인을 믿는 사람들만 사용 가능하다. 비트코인이 과연 금을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치열한 논쟁 중이다.

2023년 09월호
주식 투자자의 흔한 고민…삼성전자 살까? 애플 살까?
미국 1등 애플과 한국 1등 삼성전자...실적은?
갤럭시 텃밭 한국서도 20대는 65%가 아이폰
스마트폰 판매량 1등은 삼성, 마진율 1등은 애플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한국은 왜 미국과 달리 애플의 아이폰 사용자 수가 적을까. 한국인들은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의 갤럭시 폰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스탯카운터(Statcounter)가 분석한 2022년 말 기준 한국의 ‘스마트폰 점유율’은 삼성이 62.8%, 애플이 31.0%다. 반면 미국은 애플이 55.9%, 삼성이 29.8%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애플, 한국은 삼성의 스마트폰 선호도가 더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젊은 층 중심으로는 아이폰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갤럽의 ‘2023 스마트폰 사용률&브랜드’ 조사에 따르면 국내 18~29세의 애플 아이폰 사용률은 전년도의 52%에서 13%포인트 증가한 65%에 달했다. 반면 삼성 갤럭시 사용률은 전년도의 44%에서 12%포인트 감소한 32%에 그쳤다. 인구구조상 18~29세의 비중이 높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 애플의 점유율은 한국에서 좀 더 늘어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시가총액으로 따져보면 어떨까. 2023년 7월 말 기준 애플 주식의 시가총액은 약 3700조원(3조890억달러)으로 미국 1위이자 세계 1위다. 반면 한국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464조원(보통주+우선주 합산)에 불과하다. 격차가 무려 8배에 달한다. 그렇다면 애플과 삼성전자 중 한국에서 인기 있는 주식은 뭘까.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인들의 주식 선호성향 역시 스마트폰 선호성향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애플 주식보다 삼성전자 주식을 월등히 더 선호한다. 이유가 뭘까. 익숙함이다. 심리적 접근성 측면에서 애플보다 삼성전자가 훨씬 더 가깝다. 미국 주식에 대한 접근성 또한 과거보다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주식과의 접근성에는 비교할 수 없다.
개인투자자들은 지난 2년 7개월간 섬성전자 주식과 애플 주식을 얼마나 사들였을까. 한국 개인투자자들은 2021년도에 삼성전자 주식을 무려 31조원 넘게 순매수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애플 주식 순매수 금액은 9240억원에 그쳤다. 격차가 무려 30배가 넘는다. 2022년도에도 삼성전자 주식은 16조원 넘게 순매수했지만 애플 주식 순매수 금액은 5940억원에 불과했다. 여전히 30배 가까운 격차를 유지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은 삼성전자와 애플 주식 중 뭘 살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삼성전자를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한국 투자자들은 매도할 때도 화끈한 모습을 보여준다. 삼성전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정이 식은 건 2023년 들어서면서부터다.
오랜 기간 눌려 있던 삼성전자 주가가 간신히 7만원을 회복하면서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매도 러시가 이어졌다. 연초 이후 7개월간 무려 10조5818억원을 폭풍 매도하며 변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기간 애플 주식도 7556억원가량 매도했지만 규모 자체는 삼성전자가 압도적으로 크다.
정리해 보면 지난 2년 7개월간 한국 개인투자자들은 삼성전자를 36조6113억원 순매수했다. 반면 애플 주식의 순매수금액은 1조원에도 못 미치는 7624억원에 불과했다. 누적 순매수금액 격차가 무려 47배다. 한국 투자자들은 정말로 삼성전자 주식의 미래를 애플 주식보다 더 밝게 보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실제 투자수익률은 어땠을까. 삼성전자 주식 매수세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2020년 말에 삼성전자 주가는 8만1000원이었다. 그로부터 2년 7개월이 지난 2023년 7월 말 삼성전자의 주가는 6만9800원에 불과하다. -14%라는 부진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애플 주식은 131달러에서 196달러까지 치솟아 50%의 양호한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한국인의 삼성전자와 애플 주식 총 보유금액은?
한국 개인투자자의 삼성전자 총 보유금액도 확인할 수 있을까. 2022년 말 기준 삼성전자의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약 21%다. 그 외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공단(7.5%)과 블랙록 펀드(5%)가 있다. 나머지 지분율 1%에 미달하는 소액주주들이 보유한 주식 수가 약 40억주에 달한다.
소액주주 비중은 66.9%다. 이 수치를 2023년 7월 말 시가총액 464조원에 대입해 보면 소액주주들의 보유금액은 약 320조원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분율이 1% 미만이라고 해서 사회통념상의 소액주주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지분율 1%면 무려 4조원이다. 웬만한 기관투자자들도 1%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기 어려운 구조다.
따라서 실제 개인투자자들이 삼성전자 주식보유액을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액주주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이 발표한 ‘2022년 12월 결산 상장법인 주식 소유자 현황’에 따르면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 수는 무려 638만명에 달한다. 국민주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회사가 바로 삼성전자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삼성전자 사랑은 좀 유별나 보인다. 4년 전인 2019년 말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의 주주 수는 고작 57만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4년 만에 무려 581만명이 증가한 638만명이 됐다. 주주 수가 11배 넘게 급증한 셈이다. 주주 수가 급격히 늘어난 가장 큰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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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실시한 삼성전자의 50 대 1 액면분할 덕분이다. 액면가 5000원의 주식이 100원으로 뚝 떨어지면서 250만원이던 주가가 5만원까지 낮아졌다. 개인투자자들이 투자하기에 부담 없는 가격대가 된 셈이다. 액면분할은 한국 개인투자자 총 1424만명 중 45%인 638만명이 삼성전자 주식에 투자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쏠림이 너무 심하다. 주식 보유자 수 2위를 기록한 카카오와 비교해 봐도 무려 3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혹시 한국인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이렇게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지난 16년간 꾸준히 배신당해 온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한국 증시는 지난 16년간 변동성은 높지만 먹을 건 별로 없는 시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2007년도의 코스피 최고점은 2080포인트다. 하지만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23년 7월 말 기준 코스피 지수는 여전히 2600포인트에 불과하다. 16년간 누적상승률이 고작 25%에 불과하다. 연평균 1.6%의 초라한 상승률이다. 은행 예금금리보다도 못하다. 이런 횡보장세가 지속되면서 학습효과를 얻은 한국인들의 국내 주식 투자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됐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장기투자 방식을 버리고 한국증시의 변동성에 맞춰 트레이딩을 지속해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잘 맞히면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지만 잘못 맞힐 경우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일례로 코스닥 시장에서 개인투자자 매수순위 3위에 랭크된 ‘에코프로비엠’의 올해 수익률은 한때 5배가 훌쩍 넘었다. 반면 1위에 랭크된 ‘카카오게임즈’의 최고점 대비 하락률은 -70%가 넘는다. 천당과 지옥의 대표적 사례다. 어쨌든 맞히면 대박이고 틀리면 지옥이다.
두 번째는 애매한 대형 우량주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삼성전자 같은 초우량 1등 주식에만 장기 투자하는 방식이다. 아예 자식 명의로 주식을 사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10년 이상 장기 투자할 종목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정말 몇 개 안 된다. 한국 투자자들이 장기 투자할 종목으로 점찍었다가 결국 배신당한 종목이 한두 개가 아니다. 결국 가장 믿을 만한 주식이 삼성전자이다 보니 이렇게 삼성전자 쏠림 현상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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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국 1위이자 세계 1위 애플 주식을 한국인들은 모두 얼마나 보유하고 있을까. 6조6000억원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보유금액은 지분율 1% 미만의 소액투자자 보유 기준으로는 약 320조원, 개인투자자의 경우 보수적으로 절반만 추정해도 160조원은 넘을 것으로 보여 격차가 무려 25배 차이 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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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최근 들어 현금흐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높은 배당수익률을 따져 보는 투자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1등 기업인 삼성전자의 연간 배당수익률은 2%로 상당히 양호하다. 저금리 시절의 은행 금리보다 높은 수준이다. 반면 미국 애플의 경우 연간 배당률이 0.48%에 불과하다. 삼성전자가 현금흐름 측면에서 월등히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
여기서 중요한 건 삼성전자를 매수하는 투자자 대부분은 공격적 성향이라기보다 안정적 성향이라는 사실이다. 공격적 성향의 투자자들은 느리고 지루한 삼성전자 주식보다는 2차전지 관련 주식같이 변동성 높고 고수익이 기대되는 테마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주식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다. 따라서 투자수익률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한국인들은 애플과 삼성전자 중 지금처럼 삼성전자 주식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게 더 맞는 방향인 걸까. 냉정히 판단했을 때 두 주식 중 어떤 주식에 투자하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유리할까.
12년 전...‘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은 끝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11년 10월 5일, IT산업의 혁명인 ‘아이폰’을 만들어 냈던 불세출의 천재 스티브 잡스의 타계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병명은 췌장암. 불과 56세의 젊은 나이라 더욱 안타까움이 컸다. 스마트폰을 통해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혁신의 아이콘’ 잡스의 죽음에 전 세계인이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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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장의 관심은 IT계의 전설이 된 스티브 잡스가 사망 50일 전에 새로 임명한 애플의 수장 팀 쿡에게 쏠렸다. 스티브 잡스는 왜 ‘따분한 살림꾼’으로 평가받던 팀 쿡을 차기 CEO로 임명한 걸까. 이번에도 과연 스티브 잡스가 옳은 걸까.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일반 대중의 평가는 단호했다. “스티브 잡스가 없는 애플은 이제 끝이다!”
하지만 대중의 전망은 완벽하게 틀렸다. 지나고 보니 역시 스티브 잡스가 옳았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23년 현재 애플 시가총액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지난 12년간 도대체 애플과 팀 쿡은 무슨 일을 한 걸까. 먼저 지난 12년간 애플의 경이적인 실적 변화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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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사망할 당시인 2011년의 경이적인 애플 실적이 계속 유지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영업이익 41조원(338억달러)은 이미 어떤 회사도 넘볼 수 없는 이익 규모였다. 하지만 새로운 CEO 팀 쿡이 애플을 맡은 뒤 11년이 지난 2022 회계연도의 영업이익은 143조원(1194억달러)으로 3.5배 급증했다.
단 한 개 기업이 143조원이라는 경이적인 영업이익을 낼 수도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애플에 전 세계 투자자들은 경악했다. 매년 엄청난 현금이 고스란히 애플 내에 쌓여 가고 있다. 시장참여자들은 이 놀라운 실적 증가를 마침내 현실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1년 동안 애플 주가는 무려 15.8배 폭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팀 쿡의 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스티브 잡스는 마치 ‘죽은 제걀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물리친 것’처럼 그 당시 애플을 빠른 속도로 추격하던 유일한 맞수 삼성전자를 물리칠 ‘비장의 카드’ 3개를 숨겨놓았다.
첫째는 ‘명품 이미지’, 둘째는 ‘iOS 운영체제’를 통한 서비스 분야 확대, 셋째는 ‘웨어러블 기기’의 장기 성장계획이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기 전에 만들어놓은 ‘비장의 카드’ 3가지를 차근차근 실현하며 전진해 왔다. 그래서 ‘명품 이미지’와 ‘iOS 운영체제’, ‘웨어러블 장기 계획’이 없는 3무 상태에서 빠른 속도만으로 추격전을 벌인 삼성전자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단순히 스마트폰 판매량 순위로 보면 삼성전자가 글로벌 1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익 점유율 기준으로 따져보면 애플과 삼성전자 간의 격차는 상당히 크다. 물론 삼성전자는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다. 애플의 주력인 스마트폰 분야만으로 삼성을 단순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애플 역시 급할 때마다 삼성의 디스플레이에 손을 내민다. 게다가 삼성은 애플이 스마트폰으로 돌풍을 일으키던 시기에도 유일하게 애플과 대등하게 맞서는 슈퍼파워를 보여준 회사다. 그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휴대폰 제조사인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에릭슨, LG는 모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삼성은 스티브 잡스가 없던 2012년에는 스마트폰 점유율 30%를 달성하며 점유율 20%에 불과했던 애플을 역전한 한국 최고의 기업이다. 하지만 현재 스마트폰 분야에서만큼은 삼성이 애플을 뛰어넘었다고 인정하는 전문가는 없다. 이는 여러 가지 수치로 명확하게 확인된다. ‘죽은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는 삼성을 이겼다’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이 모든 공이 스티브 잡스의 것만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 사후에 애플을 이끌어 온 팀 쿡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렇다면 잡스 이후 팀 쿡은 지난 12년간 어떻게 거대기업 애플을 바꾸어놓았을까. 팀 쿡의 필살기는 뭘까. 바로 창의적인 웨어러블(IT 기기를 사용자 손목 등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기로 만드는 기술) 시리즈다.
스티브 잡스의 최초 구상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웨어러블 시리즈는 애플의 아이폰과 유기적으로 연동되며 애플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애플의 대표적인 웨어러블 기기로는 ‘애플 워치’와 ‘무선 에어팟’을 들 수 있다. 그리고 2024년 출시를 예고한 MR 헤드셋 ‘비전 프로’도 장기적으로는 기대되는 웨어러블 기기다.
삼성전자 매출액이 애플보다 높았다고?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11년 전에는 애플보다 삼성전자의 매출액이 더 높았다. 잡스 타계 시점인 2011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애플의 2011년 회계연도 매출액은 130조원,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165조원이다. 오히려 매출액은 삼성전자가 애플을 압도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영업이익은 애플이 41조원, 삼성전자가 16조원으로 애플이 2.5배 많았다. 어쨌든 영업이익은 애플이 우위였지만 지금처럼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잡스가 타계하고 팀 쿡이 CEO를 맡은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 후 애플의 실적은 어떻게 변했을까.
투자자들의 우려와 달리 오히려 애플은 더 성장했다. 무려 3660조원(3조500억달러)의 압도적인 시가총액(2023년 6월 말 기준)을 기록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전 세계 증시 역사상 처음으로 3조달러의 벽도 넘어섰다. 반면 한국 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은 2453조원(코스피 2035조원+코스닥 418조원)으로 애플 1개 종목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국 1위인 삼성전자는 얼마나 좋아졌을까? 삼성전자의 2023년 실적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특히 2023년은 이례적으로 부진한 해였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데이터가 왜곡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실적 확정치가 공개된 2022년의 실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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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연간 매출액은 2011년의 165조원에서 11년 뒤인 2022년에는 302조원으로 1.8배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16조2000억원에서 43조4000억원으로 2.7배 급증했다. 주가 또한 2만1160원에서 6만9800원으로 3.3배 상승했다. 폭발적인 성장은 아니지만 한국 1등 주식답게 꾸준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미국 1등 주식인 애플과의 영업이익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주요 사업별 실적 체크
삼성전자의 사업보고서를 일반인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온다. 그래서 기본지식이 없는 투자자들은 사업보고서를 읽고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삼성전자의 사업보고서를 간단히 요약 정리하면 주력 분야는 크게 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가전, 자동차 전자장비 등 5개 부문이 중심축이다.
사업보고서상에는 훨씬 난해하게 DS, MX/네트워크, SDC, VD/가전, 하만(Harman) 등으로 표기돼 있다. 실제 영위하는 복잡한 사업부문의 이름을 정확히 표기했기 때문이다. 또 특이한 점은 삼성전자가 명백한 수출기업이라는 사실이다. 국내사업 매출은 16%에 불과한 데 비해 해외사업 매출 비중이 무려 84%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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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총 매출액은 2020년에 236조원, 2021년에 279조원, 2022년에는 302조원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 중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분야는 스마트폰 사업이 주력인 ‘MX/네트워크 분야’로 전체 매출 중 40%를 차지한다. 두 번째로 매출 비중이 큰 분야는 반도체 사업이 주력인 ‘DS 분야’로 33%의 비중이다. 이 두 개가 삼성전자의 원투 펀치다.
그 외에도 디스플레이 사업이 주력인 ‘SDC 분야’의 매출 비중은 11%, 가전 사업이 주력인 ‘VD/가전 분야’는 20%를 차지하고 있다. 2016년에 삼성 M&A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인 9조6000억원(80억달러)에 인수한 자동차 전자장비 업체 ‘하만’의 매출 비중은 아직 4%에 불과하다. 하지만 꾸준히 매출이 늘어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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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총 영업이익은 2020년의 36조원에서 2021년에는 51조원으로 전년 대비 42% 급증한 사상 최대 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격히 조정을 받으면서 2022년에는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16% 감소한 43조원을 기록했다.
전체 영업이익 중 가장 높은 55%의 비중을 기록한 분야는 반도체 사업이 주력인 ‘DS 분야’다.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분야는 스마트폰 사업이 주력인 ‘MX/네트워크 분야’로 전체 영업이익 중 26%의 비중을 차지했다. 디스플레이 사업이 주력인 ‘SDC 분야’의 영업이익 비중은 14%에 달했다. 반면 ‘VD/가전 분야’의 비중은 3%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의 영업마진은 제조업치고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2021년에 전사 영업마진이 무려 18.5%를 기록했다. 하지만 2022년에는 14.4%로 뚝 떨어졌다. 주요 사업별 마진율을 살펴보면 역시 반도체가 주축인 ‘DS 부문’이 24.2%로 가장 높은 마진율을 보였다. 애플의 아이폰과 경쟁하는 스마트폰 사업이 주력인 ‘MX/네트워크 부문’의 마진율은 9.4%로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삼성전자가 늘 애플보다 많은 스마트폰을 판매함에도 불구하고 마진율에서는 큰 폭의 격차를 보이고 있는 점은 분명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행히도 디스플레이 사업이 주력인 ‘SDC 부문’의 마진율은 2022년도에 더 높아져 17.3%를 기록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TV·에어컨 등의 가전 분야가 주축인 ‘VD/가전 부문’의 터무니없이 낮은 마진율이다. 부피가 큰 TV,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보기만 해도 높은 마진을 누릴 것 같다. 하지만 2022년 기준 2.2%라는 최악의 마진율을 기록했다.
‘VD/가전 부문’의 매출액이 60조원을 넘는 것에 비하면 1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가전 경쟁회사인 LG전자의 전체 영업이익률도 4.3%에 불과하지만 삼성전자보다는 2배 높다. 앞으로도 가전 분야는 격화되는 경쟁으로 인해 영업이익에 크게 기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애플의 마진율은 어떨까. 애플의 2022년 전사 마진율은 무려 43.3%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전사 마진율 14.4%와 비교하면 무려 3배에 달한다. 애플의 서비스 마진율이 71.7%라는 경이적인 수준이기에 가능한 수치다. 서비스에는 원가가 거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서비스 마진율을 제외하고 애플의 제품 마진율만 따로 떼놓고 보면 어떨까. 제품 마진율도 36.3%에 달한다. 삼성전자 전사 마진율 24.2%보다 12%포인트 높은 수치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분야인 ‘MX/네트워크 부문’ 마진율 9.4%와 비교해 보면 격차가 거의 4배 수준이다. 이게 바로 애플의 힘이다. 애플이 스마트폰 전체 판매량에서 삼성에 밀려도 압도적으로 높은 이익을 달성하는 비밀이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애플보다 부족한 딱 한 가지는?
삼성전자와 애플을 단순 비교했을 때 삼성전자가 애플보다 부족한 부분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앞에서 지적했던 낮은 마진율과 하드웨어 대비 취약한 소프트웨어 분야다. 애플은 iOS라는 강력한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갖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의 타이젠은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 진입에 실패했다. 결국 타이젠은 안드로이드와 iOS의 양강 구도를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식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너무나도 높은 삼성전자의 이익변동성이다. 지난 12년간 애플의 영업이익은 꾸준히 성장해 왔다. 반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들쭉날쭉하다.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인 반도체 부문은 시황산업이다. 이는 반도체 업황이 안 좋을 경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등 주식은 최고의 수익률을 주지는 않지만 작은 변동성이 장점이다. 그런데 이익이 널뛰면?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사업구조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의 높은 가격변동성으로 인해 영업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큰 게 삼성전자의 최대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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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변동성이 너무나도 심각하다. 반도체가 주력인 ‘DS 부문’의 2022년 2분기 영업이익은 무려 10조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4분기에는 3000억원으로 급감했다. 충격적인 건 2023년 1분기에 -4조6000억원의 적자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2분기에도 -4조4000억원의 적자가 지속됐다.
극악의 변동성이다. 반도체 부문의 급격한 실적 하락으로 2023년 1분기와 2분기의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도 간신히 적자를 면한 6000억원과 7000억원을 달성하는 데 그쳤다. 2022년 2분기의 14조1000억원과 비교하면 무려 -13조5000억원의 이익이 감소한 충격적인 실적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미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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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주가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지난 2년 7개월(2021년 1월~2022년 7월)간 삼성전자 주식의 누적수익률은 -14%로 부진하다. 반면 같은 기간 애플 주식의 누적 수익률은 +50%로 양호한 편이다. 과거의 데이터는 삼성전자가 확실히 부진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미래의 주가는 어떻게 움직일까.
삼성전자 vs 애플, 지금은 어떤 종목이 유리?
삼성전자 주가는 반도체 시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 이는 투자자 관점에서 볼 때는 그만큼 트레이딩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시점에서 세계 1등 기업인 애플과 한국 1등 기업인 삼성전자 주식을 비교해 보면 삼성전자 주식에 투자하기 좋은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투자 포인트는 반도체 업황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과거 주가 반등 사례를 살펴보면 업황이 바닥인 상태에서 주가 반등이 먼저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낙폭이 과대한 삼성전자의 주가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좋아질 여력이 많다.
두 번째 투자 포인트는 바로 세금이다. 애플은 해외주식이라서 한국인이 투자 시 양도차익이 250만원을 넘어가는 금액만큼은 22%의 세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국내주식의 경우 2024년 말까지는 세금이 0원이다. 이후에는 금융투자소득세가 도입돼 5000만원이 넘는 주식 양도차익에 대해서는 22%의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다.
따라서 삼성전자 주주 638만명 대부분은 2024년 말까지 비과세 혜택을 누릴 것으로 보인다. 양도차익에 대한 22% 과세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세후 수익률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하다. 삼성전자와 애플에 동일하게 1억원을 투자해 100%의 수익이 발생했다고 가정했을 때 삼성전자의 최종 수익금은 1억원이지만 애플의 수익금은 7800만원으로 뚝 떨어지게 된다.
금융투자소득세가 2025년부터 실제로 시행될지도 지켜봐야 한다. 국내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세금 부과는 반대 의견도 많아 2025년에도 다시 한 번 시행이 유예될 가능성도 있다. 또 실제 시행되더라도 연간 5000만원까지는 비과세이므로 웬만한 개인투자자들에게는 영향이 적다.
하지만 단기투자가 아니라 장기투자 관점에서 본다면 삼성전자와 애플 중 어디가 더 유리할까. 삼성전자보다 이익변동성이 훨씬 작으면서 꾸준하게 이익이 성장해 가는 애플의 치명적인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애플은 정체된 스마트폰 시장의 부진을 돌파하기 위해 MR 헤드셋인 비전프로나 막대한 시장 규모를 가진 전기차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 게다가 삼성전자에는 없는 앱스토어 등의 서비스 분야 매출이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잡스 타계 이후 지난 11년간 애플의 영업이익은 3.5배 증가했다. 하지만 주가는 그보다 훨씬 많은 15.8배나 상승했다. 반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2.7배 증가했고, 주가는 3.3배 상승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너무 많이 올라 고평가된 애플 대신 오히려 하락해 저평가된 삼성전자에 투자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증시의 역사는 이런 단순한 전략이 반드시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오랜 기간 증명해 왔다. 애플이 글로벌 1등 회사라는 지위를 차지한 데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따라서 글로벌 1등 주식에 투자하고 장기간 보유하면 웬만한 시장 지수는 쉽게 이길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삼성전자 주식,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애플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가지는 게 현명한 투자자의 자세일 수 있다.

2023년 09월호
[애플의 힘] 삼성 폴더블폰은 명품? 그런데 왜 비싼 아이폰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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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고객 충성도는 안드로이드와 안드로메다 차이
애플과 삼성의 프리미엄 폰 대결 결과는 ‘충격적’
애플은 ‘폴더블 폰’ 안 만드나 못 만드나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애플 기기는 비싸다. 그래서 일반 소비자들의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에게는 오히려 비싸서 더 잘 팔린다. 애플은 명품의 성공 법칙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스타벅스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가 펼쳐놓은 애플 맥북 뒷면의 반짝이는 사과 모양 로고는 선망의 대상이다.
애플의 IT 명품 이미지는 확실히 성공했다. 물론 노트북의 기술력만 따져보면 삼성이나 LG 노트북도 훌륭하다. 하지만 맥북만큼의 명품 이미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스마트폰, 에어팟, 애플워치 모두 마찬가지다. 유독 애플에서만 볼 수 있는 이 명품 아우라의 비밀은 뭘까.
애플 고객 충성도? 안드로이드와 안드로메다 차이
애플의 운영체제인 iOS는 애플이 아닌 다른 기기들과는 연동되지 않는다. 특히 안드로이드와는 절대 호환되지 않는다. 이런 배타성 때문에 애플 제품 간에는 강력한 애플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그래서 아이폰을 구매하고 나면 핵심 운영체제인 iOS를 중심으로 아이패드, 맥북, 애플워치, 에어팟을 모두 구매하고 싶어진다. 이 기기들을 서로 연결해서 스스로 애플 생태계와 애플 서비스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전 세계에 넘쳐난다.
완벽한 그들만의 세계다. 이렇게 소프트웨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면 웬만한 회사는 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애플은 다르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애플 기기가 무려 20억대에 달하기 때문에 애플만의 독자적인 생태계 구축이 가능하다. 애플은 다른 회사와의 협업 없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는 충분한 사용자 수를 확보했다. 실제 평범한 회사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비현실적인 생태계다. 그 밑바탕에는 애플 마니아 층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
애플 마니아들의 충성도는 엄청나다. 이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에어팟이 콩나물 디자인으로 조롱을 받아도, 아이폰의 후면 카메라 디자인이 인덕션이라는 놀림을 받아도 일관되게 애플을 믿는다. 그래서 혹평받던 신제품이라도 막상 출시되면 애플스토어 앞에는 길고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스티브 잡스는 1998년에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 결국 애플의 신제품을 보고 나서도 일정 시간이 지나서야 소비자들은 스펀지처럼 애플의 스타일을 적극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애플 디자인이 유행을 선도한다. 처음에 받았던 혹평은 단지 새로운 디자인에 낯선 소비자들의 초기 저항일 뿐이다. 이런 강력한 소비자 충성도 때문에 구글 ‘안드로이드’ 사용자와 애플 ‘iOS’ 사용자의 충성도 차이가 ‘안드로메다’만큼이라는 말도 나온다. 애플 소비자들은 자신이 IT 명품을 쓰고 있다는 자부심을 한가득 가지고 있다.
애플과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폰 대결 결과는?
삼성전자 입장에서 보면 애플의 독주를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성전자의 주력은 반도체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웨어러블 부문은 삼성전자 전체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시장이다. 절대 놓칠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 자체 개발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구글의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와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강점인 하드웨어 분야만큼은 삼성의 자존심 그 자체다.
이런 삼성전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고의 역작이 바로 ‘폴더블폰’이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리즈 중 최고급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2019년에 폴더블폰을 처음 출시한 뒤 올해는 5번째 모델인 갤럭시 ‘Z폴드5’와 ’플립5’를 선보였다. 이 고가의 명품 기기들을 보면 삼성전자의 엄청난 기술력을 느낄 수 있다.
당연히 삼성전자도 애플처럼 강력한 명품 이미지를 가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갤럭시 ‘Z폴드5’의 가격은 무시무시하다. 전작보다 10만원 인상된 210만원(256GB)과 222만원(512GB)의 가격이 책정됐다. 또 삼성전자의 프리미엄 폰인 갤럭시 시리즈도 ‘갤럭시 S23’은 116만원(256GB), ‘갤럭시 S23플러스’는 135만원, ‘갤럭시 S23울트라’는 160만원이다.
반면 애플의 스마트폰 라인업 중 고가 제품인 ‘아이폰14 프로’는 한국에서 150만원(256GB)과 180만원(512GB)에 가격이 책정돼 있다. ‘아이폰14 프로’의 글로벌 최저가격은 999달러, ‘아이폰14 프로맥스’의 글로벌 최저 가격은 1099달러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도매가로 72만원(600달러)만 넘어도 프리미엄 스마트폰으로 분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의 ‘Z폴드5’는 그야말로 슈퍼 프리미엄급 제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압도적으로 높을까. 안타깝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장조사업체인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의 자료에 따르면 프리미엄 스마트폰(600달러 이상) 시장은 2022년에 애플이 무려 75%라는 경이적인 점유율을 기록하며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년 대비 4%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반면 삼성전자는 갤럭시 Z폴드와 플립을 연이어 출시하며 선전했지만 시장점유율은 17%에 그쳤다. 전년 대비 오히려 -1%포인트 감소한 수치다.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최고급 스마트폰인 갤럭시 Z폴드와 플립보다 압도적으로 잘 팔리는 라인업이 있다. 바로 저가의 ‘갤럭시 A 시리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출하량의 약 70%를 책임지고 있다. 올 상반기에 출시된 ‘갤럭시 A24’의 출고가는 약 40만원에 불과하다. 중저가 스마트폰이지만 개선된 카메라 기능과 고화질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인도와 같이 인구 수는 많지만 구매력이 낮은 시장에서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중저가 스마트폰의 치명적인 단점은 마진율이 낮다는 점이다. 명품 이미지 구축을 원하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계륵 같은 존재다. 중저가 시장을 포기하면 점유율이 훅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중저가 스마트폰 판매량이 증가하면 명품 이미지가 약해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삼성전자는 최고급 품질을 갖춘 폴더블폰을 앞세워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을 적극 공략 중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애플에 밀리고 있다는 게 객관적인 현실이다.
애플 폴더블폰, 안 만드나 못 만드나?
그런데 수많은 투자자들이 궁금해하는 사실이 있다. 도대체 애플은 폴더블폰을 못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안 만드는 것일까. 2023년에도 애플의 플더블폰 출시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하는 기준은 타 회사를 능가하는 높은 기술력이다. 또 신제품의 시장성에 대한 확신이다. 그런 측면에서 애플은 아직 폴더블폰 시장에 대해 확신이 없는 걸까.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는 2022년 전 세계 폴더블폰 출하량을 1420만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의 출하대수는 1100만대로 무려 77%를 차지하고 있다. 2023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업체들의 거센 추격으로 인해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1등을 유지하고 있다.
2022년에 전 세계에서 판매된 스마트폰은 약 12억3000만대로 추정된다. 따라서 폴더블폰의 점유율은 고작 1.2%에 불과하다. 하지만 향후 플더블폰 시장은 급속도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정도로 시장이 열리고 있다면 애플도 폴더블폰 전쟁에 참여할 때가 된 게 아닐까. 특히 애플이 명품 이미지 구축에 진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까지도 고급 스마트폰의 대명사인 폴더블폰 시장에 진입하지 않고 있는 건 의아하다.
애플은 폴더블폰을 만들어낼 기술력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애플도 폴더블폰 관련 특허를 이미 다수 출원한 상태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기술력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또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과 높은 완성도를 중요시하는 애플 입장에서 폴더블폰의 약한 내구성은 고민이다. 애플의 철학과는 안 맞을 수 있다.
이미 삼성전자에 기선을 빼앗긴 상태에서 뒤늦게 애플이 폴더블폰을 출시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래서 기기를 접었다 폈다 하는 ‘폴더블폰’ 대신 돌돌 마는 형태의 ‘롤러블폰’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애플 전문 매체인 애플인사이더 등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롤러블 디스플레이가 있는 전자 장치’라는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애플은 ‘롤러블 디스플레이’를 2017년부터 계속 연구해온 상태다.
롤러블폰은 폴더블폰처럼 ‘큰 화면’과 ‘휴대성’이라는 두 개의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화면을 자주 접었다 폈다 하는 폴더블폰과 달리 롤러블폰은 화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적어 내구성이 더 우수하다. 따라서 폴더블폰보다 롤러블폰이 더 진화한 기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롤러블폰도 아직은 먼 훗날의 얘기로 보인다. 당분간 폴더블폰 시장은 최초로 기기를 발명해 낸 삼성전자의 독주가 예상된다. 애플이 결국 폴더블폰 시장에 뛰어들지, 아니면 바로 롤러블폰으로 직행할지는 여전히 시장의 뜨거운 관심사다. 더 중요한 건 도대체 그 시기가 언제일지다. 물론 정답은 애플만 알고 있다.
애플 생태계의 원천은 아이폰
애플이 힘을 가지는 원천은 아이폰이다. 애플 생태계는 아이폰에서 시작됐다. 아이폰 시리즈는 ‘아이폰1’부터 시작해 현재는 ‘아이폰14’까지 출시된 상태다. 기본 모델인 ‘아이폰14’ 외에도 ‘아이폰14프로’, ‘아이폰14프로맥스’, ‘아이폰14플러스’ 등 4종류로 구성돼 있다. 1년에 한 번씩 신제품을 발매하는 관례상 2023년 가을에는 ‘아이폰15’가 공개될 예정이다.
애플의 저가 모델인 아이폰 ‘SE 시리즈’는 출시 간격이 2년이다. SE 2세대는 2020년, SE 3세대는 2022년에 출시됐다. 하지만 애플은 삼성과 달리 저가 모델에 대한 관심도가 낮다. 저가 모델은 인구 수는 많고 구매력은 낮은 신흥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따라서 SE 시리즈의 매출액 비중은 낮은 편이다. 애플은 소중한 명품 이미지가 훼손되는 걸 원치 않는다.
애플의 2022년 전체 매출액은 총 473조원(3943억달러)이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아이폰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2022년 아이폰 매출액은 247조원(2055억달러)이다. 애플 전체 매출액의 52%를 아이폰이 차지하고 있다. 아이폰 비중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제품을 출시해 매출을 분산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이폰은 전체 매출액의 절반이 넘는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순위는 1위 삼성전자 21%, 2위 애플 18%, 3위 샤오미 12%, 4위 오포 10%, 5위 비보 8% 순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에 2억6000만대의 스마트폰을 출하하며 1위 자리를 지켰다. 2위인 애플도 2억2500만대라는 만만치 않은 물량을 쏟아내며 확고부동하게 2위 자리를 지켰다.
문제는 해가 가면 갈수록 전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5년 전인 2018년만 해도 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은 15억100만대였다. 하지만 2022년에는 12억2700만대로 뚝 떨어졌다. 감소율이 무려 -22%로 가파르다.
과거 한때 중국 화웨이의 스마트폰이 전 세계를 휩쓸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 유출과 보안 침해 행위로 미국이 화웨이를 콕 집어 제재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퇴출됐다. 이후 중국 기업은 샤오미, 오포, 비보의 3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화웨이가 퇴출됐지만 삼성전자와 애플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은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스마트폰을 2년마다 교체하려는 수요는 많지 않다. 내구성이 좋아지면서 교체주기가 3~5년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단순히 많은 물량을 판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 대를 팔더라도 비싸게 팔아 높은 마진을 남기는 게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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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2022년 아이폰 매출액 및 평균판매가는 모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이폰 판매대수 추정치는 2021년 2억3800만대에서 2022년에는 2억2500만대로 1300만대 감소했음에도 매출액은 230조원(1920억달러)에서 247조원(2055억달러)으로 오히려 17조원 증가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2022년의 아이폰 평균 판매가(추정치)다. 사상 처음으로 100만원을 돌파해 110만원(913달러)을 기록했다. 애플은 개별 제품별 마진율은 공개하지 않고 제품 전체 마진율만 공개한다. 어쨌든 아이폰 평균판매가의 증가 추이로 볼 때 애플 제품의 마진율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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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제품 마진율은 2020년 31.5%, 2021년 35.3%, 2022년 36.3%로 지속 상승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제품 마진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 원가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서비스 마진율도 2020년 66.0%, 2021년 69.7%, 2022년 71.7%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애플이 얼마나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 이 지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애플은 2022년에 43.3%라는 사상 최대의 총 마진율로 높은 수익성을 입증하고 있다.
애플에는 아이폰만 있는 게 아니다?
애플은 아이폰 집중도를 피하기 위해 과거 스티브 잡스 시절부터 스마트폰 외에 다양한 제품을 준비해 왔다. 그 덕에 기존 제품인 맥 외에 아이패드, 에어팟, 애플워치가 새롭게 등장하며 제품 구색이 좀 더 다양해졌다. 제품별로 보면 아이폰이 52%, 맥 10%, 아이패드 7%, 웨어러블 액세서리 11%의 비중을 보이고 있다.
애플의 또 다른 강점은 세계 1위라는 압도적인 몸집을 가졌음에도 계속 성장해 나간다는 점이다. 2020년에 329조원(2745억달러)이었던 전체 매출액은 2021년 439조원(3658억달러)으로 무려 33% 급증했다. 2022년에는 473조원(3943억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하며 8%의 성장률로 주춤했지만 여전히 성장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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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전체 매출액에서 1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맥(MAC)의 경우 2018년 4분기 이후 판매대수 발표를 중단했다. 관련 업계의 추정치를 살펴보면 2018년부터 꾸준히 판매대수가 증가해 2022년에는 2610만대가 판매된 것으로 보인다. 최고가 제품인 맥의 꾸준한 판매량 증가는 애플의 매출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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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아이폰 이후 가장 먼저 선보인 신제품 아이패드는 불세출의 천재 스티브 잡스의 심플한 디자인 철학이 반영됐다. 디자인의 대혁명이다. 2010년에 출시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고 2013년에는 무려 9700만대가 팔렸다. 하지만 2022년에는 판매량(추정치)이 6180만대로 -36% 감소했다. 이미 오래전에 피크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역대 최고 판매대수를 기록했던 2013년의 매출액 38조원(319억달러)과 2022년 매출액 35조원(292억달러)의 차이는 크지 않다. 부진한 판매대수를 높은 가격으로 커버했다는 뜻이다. ‘아이패드 프로’ 출시를 통한 고급화 전략이 먹혀 들어간 결과다.
웨어러블 시리즈로 애플 도약시킨 팀 쿡
‘애플워치’는 잡스의 뒤를 이어 CEO를 맡은 팀 쿡의 첫 번째 작품이자 애플의 첫 번째 웨어러블 기기다. 아이패드가 이미 오래전에 정점을 찍었다면 애플워치의 판매량은 2018년 2250만대, 2019년 3070만대, 2020년 4310만대, 2021년 4610만대, 2022년 5290만대로 매년 계속해서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애플워치에 대한 소비자들의 뜨거운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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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시장 규모가 막대한 헬스케어(건강관리 서비스) 분야를 차세대 핵심사업으로 정했다. 그래서 애플워치의 여러 기능 중 특히 의료 빅데이터 수집은 중요하다. 이는 애플이 헬스케어 인공지능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애플워치는 이미 수면 중 무호흡, 맥박산소, 호흡수, 혈압, 혈당, 심박세동, 심전도 측정기능 등에 대한 특허를 대량 보유하고 있다.
애플은 애플워치 외에도 아이폰의 ‘애플 헬스 앱’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자들의 운동정보와 건강정보를 수집해 왔다. 개인의 의료기록은 민감한 정보다. 그래서 사용자들은 개인정보 보호에 관심이 높다. 애플은 자신들의 ‘개인정보 보호’ 정책이 강력하다는 걸 어필하며 소비자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장기적으로 ‘의료정보시장’을 선점하려는 전략이다.
또 명품 이미지 구축을 위해 아예 명품 회사인 에르마스와 협업해 고가의 한정판 애플워치 제품을 선보여 왔다. 2019년부터는 스위스 ‘명품 시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애플워치의 2019년 판매량은 3070만대 수준인 데 비해 스위스 명품 시계의 전체 판매량은 2110만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22년에는 격차가 2배 이상으로 더 벌어졌다.
고령화가 본격화하면서 건강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헬스케어 기능에 특화된 스마트워치 시장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애플의 2022년도 스마트워치 시장점유율은 30%로 압도적이다. 하지만 2위인 삼성전자가 빠른 추격자 전략을 펼쳐 시장점유율을 10.1%까지 끌어올리며 선전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삼성전자가 애플을 많이 따라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플워치의 명품 이미지까지 뛰어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스마트워치 시장의 정점은 아직 오지 않았다. 향후에도 상당 기간 성장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헬스케어에 특화된 애플워치의 미래는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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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팟’은 애플 웨어러블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애플은 여전히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안다. 과거에 스티브 잡스는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에어팟이 처음 나왔을 때는 사람들에게 ‘콩나물 줄기’ 같다며 조롱받았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본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선이 없는 무선 이어폰을 원해 왔는지를.
1만~3만원 가격대인 유선 이어폰과 비교해 보면 에어팟의 가격은 터무니없다. 무려 30만원대다. 그런데도 에어팟은 2020년에만 1억1400만대가 팔렸다. 에어팟에 주변 소음 차단 기술인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추가되면서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다. 2022년에는 판매대수가 8200만대로 다소 줄어들었다. 늘 그래왔듯이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하면 경쟁사들의 유사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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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굳건하다. 2022년 4분기 기준 35.8%의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2위인 삼성전자의 7.5%나 3위인 샤오미의 4.4% 점유율과 비교해 보면 격차가 상당히 크다. 가격보다 중요한 명품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애플의 맥, 아이패드, 애플워치 중 연간 1억대가 넘게 판매된 기기는 에어팟밖에 없다. 에어팟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아웃소싱 통한 비용절감? 중국 벗어나 인도로 확대
제조회사의 마진율은 서비스 부문과 달리 낮은 게 정상이다. 일반적인 제조회사의 평균 마진율은 5% 내외다. 하지만 애플은 2022년에 무려 36.3%라는 무지막지한 제품 마진율을 기록했다. 사상 최고치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도 14.4%라는 높은 마진율을 기록했지만 애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플의 마진율이 유독 높은 이유는 뭘까.
아웃소싱 덕분이다. 애플은 자신들의 주력 제품들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설계와 디자인은 애플이 하지만 실제 제품은 대부분 위탁 생산한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제조회사인 애플이지만 자신들의 제조공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애플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최고의 회사들에 아이폰의 부품 생산을 위탁하고 있다.
초기에 애플은 아이폰 조립의 대부분을 ‘폭스콘’에 위탁해 왔다. 폭스콘은 대만 회사지만 제조공장은 중국에 있다. 팀 쿡은 CEO로 임명되기 훨씬 전인 2000년대 후반부터 “아웃소싱으로 효율성을 높이라”는 스티브 잡스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폭스콘을 적극 활용했다. 애플이 자체 공장을 보유하는 건 고정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체 공장 보유를 최소화했다.
그런데 2020년에 ‘코로나19’로 인해 폭스콘의 중국 정저우 공장 노동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공장 가동률이 50% 미만으로 급락했다. 이에 따라 2020년에는 애플 기기의 생산량도 급감해 애플의 매출 감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애플은 공급망 다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은 폭스콘 외에도 페가트론, 위스트론, 럭스셰어 등으로 분산해 제품을 위탁 제조하고 있다. 이 회사들은 제조공장을 중국 이외에 인도 쪽에 대거 건설하고 있다. 폭스콘 역시 탈중국을 위해 인도 남부에 두 곳의 공장 설립을 진행 중이다. 따라서 향후에는 인도의 애플 제품 조립비중이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아웃소싱에도 명품 이미지 굳건
애플은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 에어팟의 최종 조립을 중국이나 인도에서 진행하면서도 명품 이미지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애플의 경이적인 능력이다. 스티브 잡스 때부터 이어져 온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애플의 명품 이미지 덕분이다.
애플의 마진율이 높은 또 다른 이유는 최고가 정책을 쓰기 때문이다. 사실 스마트폰의 총 판매량은 오래전에 삼성전자에 추월당했다. 하지만 애플은 개의치 않는다. 대신 프리미엄급 제품들의 높은 가격을 유지해 애플 제품 가격을 상향 평준화하는 전략으로 마진율을 높이고 있다. 경쟁사보다 판매량이 작아도 매출액이나 영업이익률은 높은 애플만의 강력한 경쟁력이다.
물론 애플도 중저가폰이 있다. 2016년에 창립 40주년을 맞아 발매된 ‘아이폰 SE 모델’이다. 40만원 내외의 가격이다. 그동안 애플의 고가 정책으로 인해 애플 생태계에 진입하지 못한 신흥국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출시됐다. 가성비가 높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2022년에는 SE 3세대까지 출시됐다.
‘아이폰 SE 모델’은 신흥국에서 아이폰을 원하는 사용자들 중심으로 꾸준히 팔려서 애플 생태계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애플은 이렇게 고가와 중저가의 투 트랙 전략으로 애플 생태계를 넓혀 가고 있다. 하지만 애플은 중저가 폰을 남발해 명품 브랜드 이미지를 훼손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애플이 현재 가장 공들이고 있는 국가는 올해를 기점으로 중국보다 인구 수가 많아진 인도다. 인도는 이미 글로벌 스마트폰 전쟁의 격전지가 됐다. 애플은 중저가 모델인 ‘SE 시리즈’를 인도에 집중 투입해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과거 2%에 불과했던 아이폰 인도 점유율은 SE 모델 덕분에 지금은 5%까지 상승했다. 애플의 투 트랙 전략은 성공적이다.
세계 1등 하드웨어 기업 애플의 고민은?
애플은 전 세계에서 하드웨어가 가장 강한 회사다. 게다가 이제는 반도체까지 손을 뻗어 IT업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애플은 2020년에 그동안 쓰던 인텔 칩셋 대신 자체 개발한 독자 칩셋인 M1 반도체를 발표했다. 인텔과 애플의 결별은 IT업계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
경쟁사들은 애플이 독자 개발한 반도체의 성능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으나 애플 제품에 탑재된 반도체들의 뛰어난 성능을 확인한 후 경악했다. 지금은 M2를 넘어 M3 반도체가 출격 대기 중이다. 애플이 반도체 생산을 위탁한 대만의 TSMC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애플과 잘 협업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애플은 대표 제품인 아이폰, 맥(MAC), 아이패드, 애플워치, 에어팟 외에도 반도체 부품 시장으로 범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목표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다. 그렇다면 하드웨어 최강자인 애플의 약점은 뭘까. 애플의 대표 제품들 중 상당수가 판매량 감소 문제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애플의 성장 둔화를 걱정하는 투자자들이 많다.
하지만 애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양손잡이 기업이다. 소프트웨어의 핵심인 iOS 운영체제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 분야 성장 또한 눈부시다. 하드웨어 분야 성장이 느려지면 강력한 소프트웨어 분야를 성장시켜 이익을 계속 늘려 나갈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미래에 애플 하드웨어의 핵심이 될 ‘애플카’와 MR 헤드셋 기기인 ‘비전프로’의 가능성까지 살펴본다면 애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한번 애플 생태계에 빠져든 사람이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애플이 계속해서 세계 1등 기업을 지켜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09월호
‘앱 스토어’ 등 서비스 급성장…양손잡이 애플의 미래는 애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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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생태계 폭풍성장...막을 기업이 없다?
앱, 애플페이, 애플뮤직이 이끄는 서비스 급성장
자동차 운영체제 시장서 구글과 전쟁, 결국 애플카?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애플은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애플워치, 에어팟 등의 하드웨어 제품을 제조하는 세계 최강의 회사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애플의 대표적인 하드웨어 기기인 아이폰의 판매량이 줄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애플의 성장세가 꺾이는 게 아닌지 우려한다.
실제로 2023년에 들어서면서 애플의 제품 관련 매출은 3분기 연속으로 소폭 감소 중이다. 게다가 애플은 에어팟 이후 지난 7년간 새로운 유형의 신제품을 내놓지 않았다. 어찌 보면 하드웨어 부문의 성장 둔화는 당연해 보인다. 애플은 이 어려움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은 관행적으로 내놓는 아이폰 시리즈 외에 새로운 제품의 출시다. 후보군으로는 MR 헤드셋인 ‘비전프로’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제품인 자동차 분야에 진출해 ‘애플카’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 부문을 더 많이 성장시키는 전략이다.
애플은 세계 유일의 양손잡이 회사
애플의 맞수인 삼성전자 또한 세계 최강의 하드웨어 제조회사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판매량 세계 1위를 자랑한다. 하지만 애플과 삼성전자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소프트웨어’ 분야다. 하드웨어(hardware)는 철, 장비, 강한 쇠 등을 의미한다. 컴퓨터 용어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장비들을 의미한다.
반대로 소프트웨어(software)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운영체제나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애플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세계 최강자다. 하드웨어 분야가 워낙 강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 소프트웨어가 강한 대표적인 회사는 세계에서 약 15억명이 사용한다는 ‘윈도우’ 운영체제를 만든 마이크로소프트다.
플랫폼(platform)이란 이용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웹사이트 등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인다. 구글의 유튜브(20억명), 메타의 페이스북(30억명), 텐센트의 위챗(12억명) 등 이용자 수가 10억명 이상인 서비스를 운용하고 있는 글로벌 회사들을 다 플랫폼 기업이라고 표현한다.
애플은 하드웨어 제조회사인가, 아니면 소프트웨어·플랫폼 회사인가. 애플은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최강의 하드웨어 제조회사지만 iOS 운영체제로 대표되는 최강의 소프트웨어 회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15억명의 활성사용자수를 보유한 플랫폼 회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 갖춘 ‘멀티 플랫폼’ 회사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주식시장에서는 하드웨어 회사들보다 소프트웨어 회사나 플랫폼 회사들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확장성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지금의 인터넷 세상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는 단시간에 전 세계인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확장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애플이 하드웨어 회사인지, 소프트웨어 회사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결론은 애플은 세계 유일의 양손잡이 회사다.
개방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다 망한다...iOS만 빼고!
스탯카운터(Statcounter)의 ‘전 세계 모바일 운영체제 점유율’ 자료에 따르면 구글 ‘안드로이드’의 점유율은 2022년 말 기준 72.4%이고, 애플 ‘iOS’의 점유율은 27.0%다. 언뜻 보면 구글의 압승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애플의 iOS는 오직 애플에서만 사용하고, 구글의 안드로이드는 삼성전자를 선두로 한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의 연합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따져보면 애플의 iOS는 상당히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독점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개방하지도 않는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는 결국 망한다’는 교훈이 있다. 애플의 iOS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처럼 90% 이상 독점한 상태도 아니고, 구글의 안드로이드처럼 모든 스마트폰에 개방된 것도 아니다. iOS는 애플 제품 안에서만 작동하는 폐쇄적인 운영체제다.
이는 오래전 소니가 경쟁 제품이 있음에도 ‘베타’라는 고유의 비디오테이프를 폐쇄적으로 운용하다가 대실패한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니는 실패했고, 애플은 성공했다.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애플은 폐쇄적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최고의 제품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폰뿐 아니라 아이패드, 맥북, 애플워치, 에어팟 등 여러 종류의 제품이 모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들이 서로 강력히 연동되며 애플 생태계가 더 견고하고 촘촘해졌다. 그 결과 지금은 애플의 폐쇄성이 오히려 애플의 장점으로 승화되고 있다. 물론 애플은 앞으로도 최고의 제품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이미 애플 생태계가 견고하기 때문에 그 부담감은 훨씬 가벼워졌다.
애플 아이폰의 재구매율은 약 90% 수준이다. 한번 애플 생태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 반면 안드로이드 계열의 스마트폰 재구매율은 70% 수준이다. 사용자들의 충성도 격차가 크다. ‘안드로이드는 크게 불편하지 않아서 계속 쓰지만 iOS는 너무 만족해서 계속 쓴다’라고 표현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애플의 서비스 분야 비중은 얼마나 될까
애플은 iOS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15억명을 대상으로 서비스 부문의 매출을 확대하려 한다. 애플의 iOS 운영체제에는 ‘앱스토어’가 있고,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는 ‘구글플레이’가 있다. 앱스토어나 구글플레이는 다양한 앱(게임, 음악, 동영상 등의 콘텐츠 응용 프로그램)을 사고파는 온라인 상점이다.
가장 인기 있는 앱은 역시 게임이다. 게임 매출 비중이 60%를 훌쩍 넘는다. 대신 애플이나 구글은 앱 개발자들에게 판매금액의 30%를 수수료로 받는다. 엄청난 수수료율이다. 그래서 애플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서비스 수익모델이다. 애플의 지상과제는 전체 매출에서 서비스 부문의 비중을 높이는 일이다.
애플의 대표적인 서비스 분야는 앱스토어 외에 또 어떤 게 있을까.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애플뮤직’, 비접촉 모바일 결제 서비스인 ‘애플페이’,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 애플기기 보증보험 서비스에 가까운 ‘애플케어’ 등이 있다.
그렇다면 애플의 전체 매출에서 서비스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일까. 약 20%로 전체의 5분의 1이다. 매출로만 따져보면 그리 높은 비중은 아니다. 하지만 매출총이익 비중으로 다시 살펴보면 상당히 높은 수익기여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기준 제품 매출총이익 비중은 67.2%(138조원), 서비스 매출총이익 비중은 32.8%(67조원)다. 서비스 비중 기여도가 무려 3분의 1이다. 매출액 기준보다 매출총이익 기준으로 볼 때 서비스 부문의 비중이 더 높아진 이유는 현격한 마진율 격차 때문이다.
2022년 기준 애플의 제품 마진율은 36.3%다. 일반적인 제조업 마진율이 5% 내외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애플의 서비스 마진율은 무려 71.7%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 마진 차이로 인해 수익기여도 측면에서 보면 애플의 서비스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애플은 명실상부한 양손잡이 기업이다.
애플 서비스 부문의 강점은?
소비자는 한번 애플 제품을 구입하고 나면 쉽게 애플의 생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 에어팟, 애플워치 등의 애플 기기 간 연동과 특유의 폐쇄성을 강화하는 전략 때문이다. 애플에서 다시 삼성으로 넘어가고 싶어도 이미 애플 서비스에 들어간 매몰비용이 커서 쉽게 이동하기가 어렵다. 강력한 록인 효과다. 아이폰 재구매율이 90%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애플의 서비스 분야에는 앱스토어, 애플페이, 애플뮤직, 아이클라우드, 애플케어 등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 분야는 ‘앱스토어’다. 애플은 앱에서 발생한 매출액 중 30%를 챙기기 때문에 앱스토어는 애플의 서비스 분야 중 매출 및 수익 기여도가 가장 높다. 특히 게임 앱 매출이 높은 편이다. 앱 개발자만 수천명이 넘는다. 애플의 효자사업이라 할 수 있다.
애플의 서비스 분야 중 대표 격인 ‘애플페이’는 성장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도 삼성페이가 활성화돼 있어 애플페이의 구조에는 모두 익숙하다. 미국에서 애플페이의 사용자 수는 얼마나 될까. 미국 인구의 20%인 약 5500만명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용자 수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략 5억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타티스타에 따르면 애플페이의 연간 결제액은 약 7200조원(6조달러)으로 비자카드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 중이다. 애플페이는 일반적으로 카드사에 결제금액의 0.15%를 수수료로 부과해 마진율이 매우 높은 구조다. 수수료를 내야 하는 카드사는 부담이지만 애플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서비스 사업이다. 단순 계산해 보면 연간 추정 수수료가 10조원에 가깝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 진출할 때는 ‘알리페이’, ‘위챗페이’와의 경쟁을 의식해 수수료율을 0.03%로 파격 인하했다. 따라서 모든 나라에서 다 수수료가 0.15%로 책정된 건 아니다. 최근 한국에도 애플페이가 상륙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삼성페이는 애플페이와 달리 당분간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지만 삼성 입장에서도 애플페이의 한국 진입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애플의 또 다른 주력 서비스 부문인 ‘애플뮤직’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시장 점유율은 2위다. 1위인 스포티파이를 추격 중이다. 애플뮤직의 전체 유료구독자 수는 2022년 기준 약 880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국 기준 월 구독료는 1만2000원(9.99달러)이다.
애플뮤직의 매출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략 [유료구독자 수 8800만명 × 월 구독료 1만2000원(9.9달러) × 12개월 = 연간 12조7000억원(87억달러)] 수준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할인 등을 감안하면 이보다는 적을 것이다. 어쨌든 애플 입장에서는 소비자들에게 월 구독료를 따박따박 받아낼 수 있는 애플뮤직은 안정적이고 소중한 수익 기반이다.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는 스마트폰과 연동시키면 내 자료들이 자동으로 아이클라우드의 서버에 저장되는 서비스가 제공된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분실하더라도 가입자들의 소중한 사진이나 자료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서비스다. 적은 무료용량 제공을 통해 일단 무료사용자 수를 확보한 후 용량 추가 시 요금을 부과해 매출을 발생시키는 전략을 쓴다.
‘애플케어’는 애플 기기들의 보증 기간을 유료로 연장해 주는 서비스다. 아이폰, 맥, 아이패드, 애플워치 등에 적용된다. 사실상 파손보험에 가깝지만 보험 대신 ‘케어’라는 표현을 쓴다. 기기가 고장 났을 때 애플케어에 가입해 있다면 몇만원 수준의 자기부담금만으로 수리할 수 있다. 물론 애플케어에 가입한 소비자들의 기기가 모두 고장 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중하게 고장 확률을 잘 계산해낸 애플에겐 남는 장사다.
또 애플의 아이폰과 디바이스에서 구글의 검색엔진이 우선 선택되도록 하는 대가로 애플은 구글에게서 연간 수조원(수십억 달러)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 또한 애플 서비스의 소중한 수익원이다. 애플이 골드만 삭스와 손잡고 내놓은 ‘애플저축’ 또한 4개월 만에 저축액이 12조원(100억달러)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애플은 이렇게 다양한 서비스 사업을 통해 수익을 다각화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부진한 애플TV와 홈팟...그리고 AI
애플이라고 모든 걸 다 잘하는 건 아니다. ‘온라인 유료 동영상 서비스’ 시장은 그야말로 대격전지다. 이 시장 선두업체인 넷플릭스의 공식적인 전 세계 유료구독자 수는 2023년 6월 말 기준 2억3839만명이다. 언뜻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아이디 공유 금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용자들이 아이디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넷플릭스의 실제 구독자 수는 최소 4억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런 강력한 넷플릭스에 2019년 디즈니와 애플이 각각 도전장을 냈다. 현재 넷플릭스의 프리미엄 요금제(4인 시청 기준)는 월 2만4000원(19.99달러)이다. 디즈니플러스는 그 절반 가격인 월 1만3000원(10.99달러)의 구독료를 미끼로 현재 1억5780만명의 구독자 수를 확보한 상태다. 콘텐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애플TV플러스는 월 8400원(6.99달러)이라는 파격적인 구독료를 책정했다.
문제는 사용자 수다. 공식 발표는 없지만 애플TV플러스의 사용자 수는 5000만명 미만으로 추정된다. 넷플릭스는 온라인 유료 동영상 서비스의 원조다. 디즈니는 세계 영화시장 점유율이 30%가 넘는 콘텐츠 왕국이다. 반면 애플은 콘텐츠와 원래 거리가 멀었던 회사다.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애플의 음성인식 인공지능비서인 ‘시리’와 인공지능 스피커인 ‘홈팟’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은 아마존의 ‘에코’와 구글의 ‘구글홈’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애플의 ‘홈팟’은 뒤처져 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아마존, 구글, 애플 모두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을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할지 아직 방향을 못 잡고 있다는 점이다.
애플의 또 다른 약점은 인공지능 분야다. 오픈AI의 챗GPT 개발로 가속화된 생성형 인공지능 전쟁에 MS, 구글은 물론 메타까지 뛰어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애플은 조용하다. 이번 2023년 8월의 실적 발표 때도 애플 CEO인 팀 쿡은 모두발언에서 특별히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플이 인공지능 분야에서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애플의 거의 모든 제품에는 인공지능 기술이 반영돼 있다. 또 인공지능 비서인 ‘시리’ 역시 애플의 꾸준한 인공지능 기술 개발의 결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도 애플 내부적으로는 ‘에이작스(AJax)’, 통칭 ‘애플GPT’라는 이름으로 테스트 중이다. 다만 이 분야만큼은 경쟁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결론적으로 애플이라고 모든 걸 다 잘하는 건 아니다. 애플은 인공지능 기술 향상을 위해 조용히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인공지능 시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차세대 핵심 사업이다. 이 분야가 IT기업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
8년 만의 신제품 ‘비전프로’, 잘 팔릴까?
애플은 흥행할 자신이 없다면 절대 신제품을 내놓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6월에 오랜만에 애플 CEO 팀 쿡이 “원 모어 씽(One more Thing, 하나 더!)”을 외친 건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무려 8년간이나 준비해 왔다. 애플의 신제품은 바로 혼합현실(MR) 헤드셋인 ‘비전프로’다.
애플은 비전프로를 애써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는 낯선 단어로 표현했다. 애플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용 컴퓨팅(맥) - 모바일 컴퓨팅(아이폰) - 공간 컴퓨팅(비전프로)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맥’은 컴퓨터를 개인화했고, ‘아이폰’은 컴퓨터를 모바일화했다. ‘비전프로’는 ‘공간’ 개념을 활용해 컴퓨터를 3차원으로 확장했다. 하지만 이건 먼 미래의 구상일 뿐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AR(증강현실) 기기에 더 가깝다.
따라서 비전프로의 관전 포인트는 AR 기능이 얼마나 잘 구현되는지다. 컨트롤러 없이 눈, 손, 음성 3가지만을 활용해 기기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일단 비전프로에는 최고 사양의 부품이 탑재될 예정이라 성능은 현존하는 제품 중 으뜸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애플의 신제품 발표 후 성능보다 더 화제가 된 건 비전프로의 엄청난 판매가격이었다. 무려 420만원(3499달러)이다. 애플의 비전프로에 대응해 메타가 준비하고 있는 신제품인 ‘메타 퀘스트 3’의 가격은 7분의 1인 60만원(499달러)에 불과하다. 최고급 사양인 점을 감안해도 비전프로는 지나치게 비싸다는 평가가 많다.
애플의 비전프로 판매목표는 거만한 판매가격과는 달리 매우 겸손하다. 약 30만대 수준이다. 1년에 판매되는 아이폰이 2억대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거의 테스트 제품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애플 스스로도 많이 팔릴 거라는 기대는 접는 모양새다. 따라서 비전프로가 당분간 애플 매출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카, 정말 나오긴 하는 걸까?
애플이 공식적으로 애플카 출시 계획을 발표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소비자와 투자자 모두 애플카를 애타게 기다린다. 소비자들이 애플카에 기대하는 건 뭘까. 애플만의 감성을 가진 독창적인 디자인이다. 소비자들에게 애플 제품을 왜 쓰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도 디자인이다. 애플이 만든 자동차는 근사할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다. 애플카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뜨거운 기대감과 달리 여전히 애플카는 베일에 싸여 있다. 개발팀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팀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전기차로 나올지, 자율주행차 기능까지 포함될지도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실제로 애플카가 나올지조차 불분명하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그리고 그 소문은 대체로 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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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자동차 보유대수는 몇 대나 될까. 2020년 기준 15억3500만대다. 거대한 시장이다. 또 자동차는 스마트폰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가품이다. 현존하는 모든 가전제품과 소비재 중 가장 비싼 가격을 자랑한다. 그런데 전기차 시장은 이미 테슬라가 싹쓸이하는 중이다. 이런 시장을 애플이 구경만 하는 것은 엄청난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하지만 섣부르게 전기차나 자율주행차에 바로 뛰어들기엔 리스크가 크다.
테슬라는 FSD(풀 셀프 드라이빙)라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이미 유료로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프트웨어가 완벽한 건 아니다. 또 자율주행은 법적·윤리적 문제로 인해 규제기관의 최종 승인을 받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자동차 운영체제 분야로 한정한다면 꼭 테슬라가 유리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 테슬라의 전기차 누적 판매량은 아직 400만대에 불과하다. 15억3500만대의 전 세계 자동차 보유대수 중 고작 0.3%에도 못 미친다.
만약 자율주행 자동차가 단기간에 보급되기 어렵다면 애플은 자동차 시장에서 어떤 부분을 노려야 할까. 당연히 자동차 운영체제 시장이다. 그래서 애플은 지금 애플카보다 자동차 운영체제에 공을 들이고 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로 이미 재미를 본 애플은 운영체제의 중요성을 어느 회사보다 잘 알고 있다.
애플 ‘카 플레이’라는 이름의 자동차 운영체제는 이미 소비자들에게 인기다. 카 플레이의 기능은 뭘까. 한마디로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연결해 주는 앱이다. 모든 자동차 내부에는 소프트웨어 성능이 낮은 내비게이션, 오디오 화면, 계기판 등이 장착돼 있다. 이 답답한 소프트웨어의 사용자 경험은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소비자가 자신의 자동차와 카 플레이를 연결하면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기존 디스플레이 화면에 내비게이션, 지도, 통화, SMS, 음악과 같은 최신 기능을 출력해 제어할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애플과 구글은 자동차 운영체제 부문에서 전쟁 중이다. 애플의 ‘카 플레이’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오토’를 통해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에서의 전쟁이 자동차 운영체제 시장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애플의 카 플레이는 아직 모든 자동차에 지원되는 건 아니다. 카 플레이와 협업하는 자동차 제조사만 호환이 가능하다. 물론 아우디, 벤츠, 포르쉐 등 주요 자동차 제조사는 대부분 지원이 가능하다. 자동차 제조사 입장에서는 애플과의 협력 없이 자체 운영체제를 만들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쉬웠다면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가 10년 이상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종속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운영체제를 만들어내는 건 현실세계에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애플 카 플레이의 전 세계 사용자 수는 얼마나 될까. 약 50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경쟁 서비스인 구글의 안드로이드 오토도 1억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 운영체제 부문만 떼놓고 평가한다면 테슬라보다는 이미 모바일 생태계를 장악하고 있는 애플과 구글이 더 유리해 보인다.
애플 카 플레이의 기술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다. 지금은 단지 가벼운 기술력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차량 하드웨어와 완전 통합돼 자동차 시장도 애플의 운영체제로 완전히 장악하는 게 목표다. 애플은 기존의 모바일 생태계와 앱 마켓을 연동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더 먼 미래에는 완벽한 자율주행 기술도 가능해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애플에 종속되는 걸 두려워하는 자동차 제조회사들도 자체 운영체제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 애플이 먼 미래에 계획대로 스마트폰 운영체제처럼 자동차 운영체제 시장도 장악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애플카도 언젠가 애플이 높은 기술력을 갖추는 시점에 팀 쿡의 “One more Thing!” 외침과 함께 갑자기 출시될 수 있다. 만약 그날이 실제로 온다면 애플의 매출액은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자동차는 모든 가전제품과 소비재 중 가장 비싸다. 특히 명품을 추구하는 애플카의 가격은 스마트폰 가격의 50배 이상일 거라는 게 대체적인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하지만 애플카가 출시되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플 실적, 2023년부터 정체 중
애플의 매출액은 지난 3년간 꾸준히 증가해 왔다. 특히 2021년에는 기대기업에 어울리지 않게 총 매출액이 무려 33% 급증한 439조원(3658억달러)을 기록했다. 2022년에는 8% 성장하며 474조원(3943억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성장률이지만 전년도의 눈부신 성장률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운 결과다. 2022년에도 서비스 부문은 두 자릿수인 14%의 성장률을 보이며 양호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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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영업이익 성장 또한 눈부시다. 사상 처음으로 영업이익이 100조원을 훌쩍 넘어 전년 대비 64% 폭증한 131조원(1089억달러)을 기록했다. 2022년에도 10% 성장하며 143조원(1194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전년도의 눈부신 실적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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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23년에 들어서면서 애플의 향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은 살짝 꺾이기 시작했다. 애플의 분기 실적은 계절적 요인이 뚜렷하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아이폰 신제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9월 결산법인인 애플 회계기준으로는 1분기(10~12월) 실적이 가장 좋다.
따라서 애플 회계상 2023년 2분기(1~3월) 매출액은 직전 분기 대비 -19% 감소한 114조원(948억달러)에 그쳤고, 3분기(4~6월) 매출액은 직전 분기 대비 -14% 감소한 98조원(818억달러)으로 저조했다. 시장은 크게 실망했고 실적 발표 후 애플 주가는 조정받았다. 그나마 서비스 부문이 2023년 1분기, 2분기, 3분기 연속 25조원(212억달러)의 매출액을 달성하며 선방했다.
영업이익 역시 마찬가지다. 애플 회계상 2023년 2분기(1~3월) 영업이익은 34조원(283억달러)으로 직전 분기 대비 -21%가 감소했고, 3분기(4~6월) 영업이익은 직전 분기 대비 -19% 감소한 28조원(230억달러)으로 부진했다. 물론 계절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계절적 효과가 사라지는 전년 동분기와 비교하면 매출액과 영업이익 모두 감소보다는 정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드디어 세계 1위 기업 애플에게도 정체기가 도래한 걸까. 애플은 이제 성장동력을 잃은 걸까. 끊임없이 성장을 원하는 투자자들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올 9월에 선보일 ‘아이폰15’가 얼마나 인기 있을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또 아이폰15의 가격 인상 여부도 주요 관심사다. 주가는 미래의 실적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애플 주식에 올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1등 주식에 투자하는 이유는 최고의 수익률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마음 편안하게 지수 상승률 이상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목표수익률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에게는 애플 주식이 딱 맞을 수 있다. 애플은 과거 주가 조정 시 다른 주식들보다 하락폭이 낮았다. 반대로 장기 투자자에게는 큰 폭의 수익을 안겨주며 기대에 부응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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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성장이 느려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15억명의 사용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애플의 생태계는 여전히 견고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플 생태계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아이폰, 아이패드, 맥(MAC), 에어팟, 애플워치로 이어지는 애플 기기 간 강력한 상호연결성은 애플만의 힘이다.
애플이 준비하고 있는 비장의 신제품인 ‘비전프로’와 언젠가 출시만 된다면 게임체인저 역할을 할 ‘애플카’까지 애플의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앱스토어, 애플페이, 애플뮤직, 아이클라우드, 애플TV는 애플을 단순한 하드웨어 제조회사가 아니라 서비스 분야에서도 막강한 수익을 창출하는 양손잡이 멀티 플랫폼 기업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투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투자 고수를 따라 해 보자. 미국의 투자 귀재인 워런 버핏은 기술주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2016년부터 그의 투자창구인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 애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버핏은 애플을 IT 기업이 아니라 필수소비재 기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23년 기준 버크셔 해서웨이의 애플 보유지분은 총 5.8%다. 3700조원(3조890억달러)인 애플의 시가총액을 감안하면 무시무시한 지분율이다. 애플 단 한 종목이 버크셔 해서웨이 전체 포트폴리오의 46%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버크셔가 두 번째로 많이 가지고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비중은 고작 9%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거의 몰빵 투자 수준이다.
워런 버핏이 애플 주식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투자를 잘 모르겠다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보자. 애플이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애플은 소비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계속해서 제공하며 성장해 나갈 것이다. 심리적으로 편안한 투자를 원한다면 글로벌 1등 주식 애플에 관심을 가져보자.

2023년 09월호
AI가 바꾸는 세상...'HBM'으로 반도체 불황 넘는다
AI 시장 덕에 급성장...반도체 매출 회복 기대
삼성·SK, HBM 생산 라인 증설
시장 경쟁 격화...‘기술 개발·수율 확보’ 관건
| 이지용 기자 leeiy5222@newspim.com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놓고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과 챗GPT 등 관련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AI 서버 등에 탑재할 HBM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HBM 시장은 “주도권을 뺏기면 미래 먹거리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도체의 핵심 분야가 됐다. HBM을 중심으로 국내 기업들의 반도체 불황 탈출 여부와 시장 판도 변화, 주도권 확보 전략을 살펴본다.
최근 AI 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의 오픈AI가 챗GPT를 내놓으면서 글로벌 산업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기업들은 앞다퉈 실무에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생성형 AI용 서버 시장이 급성장하자 AI 서버에 탑재되는 HBM 수요도 함께 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올 들어 적자 폭이 커지고 있는 반도체 위기를 HBM을 통해 돌파해 나갈 전략이다.
앞으로 생성형 AI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군에서 AI가 활용될 전망인 가운데 글로벌 HBM 시장에서의 주도권 확보 여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산업 성패를 좌우할 것이란 전망이다.
HBM, 출하량 급증...반도체 매출 성장 역할
현재 HBM이 전체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10% 미만이다. HBM이 새로 성장하고 있는 분야인 만큼 절대적인 매출은 아직 크지 않다. 그러나 AI 산업의 성장으로 HBM은 매출 비중을 급격히 높여갈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에만 반도체 분야에서 수조원의 적자를 냈지만, HBM으로 올해 하반기를 포함해 향후 전체 반도체 매출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구글과 아마존 등 클라우드 서버 기업은 HBM3보다 낮은 단계인 HBM2E를 사용하고 있지만, 앞으로 증가할 AI 서비스 요구에 맞춰 용량이 크고 처리속도가 빠른 차세대 HBM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HBM의 수요·출하량 등이 높아질수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등 반도체 전체 매출까지 높일 수 있는 셈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최근 2분기 연속, SK하이닉스는 3분기 연속 반도체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HBM을 통한 매출 회복이 시급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그래픽처리장치(GPU) 및 로봇에 탑재되는 프로그래머블 반도체(FPGA), 클라우드 서버 등에 쓰이는 ASIC 등을 탑재한 AI 서버 출하량은 올해 38% 가까이 늘어 120만대에 육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렌드포스는 또 클라우드 서비스뿐만 아니라 AI향 칩의 수요가 늘어 내년엔 차세대 HBM 제품인 HBM3와 HBM3E가 시장에서 주류로 자리 잡을 것으로 평가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오는 2024년 삼성전자의 HBM 매출 비중은 올해 대비 3배 이상 커져 20%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피터 리 씨티글로벌마켓증권 반도체본부장은 “올해 HBM이 전체 D램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2025년에 HBM이 전체 D램 매출의 27%, 2027년에는 3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함께 AI 반도체 시장 규모 또한 올해 70조원에서 내년 110조원으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HBM에 대한 수요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글로벌 경제 상황에 큰 영향을 받는 스마트폰 및 PC, 가전 등에 쓰이는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의 매출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GPU 등 특수 목적용 반도체의 매출 비중을 높일 경우 글로벌 경제에 따른 변동폭을 줄여 안정적인 반도체 시장 형성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HBM은 프리미엄 제품인 데다 AI 시장이 커가고 있어 글로벌 시장 변화에 둔감해 안정적인 수익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삼성과 SK하이닉스는 HBM을 통해 앞으로 반도체 매출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K, HBM 집중 투자...생산 비중 확대 나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을 통한 반전을 꾀하기 위해 HBM 생산 및 판매 비중 확대로 반도체 포트폴리오를 개편하고 있다.
우선 삼성전자는 올해 전년 대비 2배 수준인 10억Gb 중반을 넘는 고객 수요를 확보했다. 또 하반기 추가 수주에 대비해 생산성 확대를 위한 공급 역량을 키우고 있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제품인 HBM3 16GB와 12단 24GB 제품의 양산 준비를 끝냈다. HBM3 16GB는 업계 최고 6.4bps 성능 및 초저전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AI 서버의 대규모 데이터 처리를 필요로 하는 고객사들을 끌어모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 HBM 생산능력은 증설 투자를 통해 2배 이상 키울 예정이다.
SK하이닉스 또한 차세대 HBM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상반기 5세대 제품인 HBM3E 양산에 돌입한다. 또 2026년 6세대 제품인 HBM4를 양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투자 우선순위에 HBM을 두고 있으며 물량을 2배 이상 확대할 예정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대형 고객사인 엔비디아에 챗GPT GPU용 HBM을 공급하고 있는데, 최근 엔비디아로부터 HBM3E 제품 샘플을 요구받았다. 벌써 차세대 HBM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은 최근 열린 2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 “HBM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2026년부터 차세대 제품인 HBM4로 넘어갈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에 맞춰 차근히 양산을 준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날 열린 삼성전자 컨퍼런스 콜에서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도 “HBM 등의 수요 증가로 상반기 대비 하반기 메모리 실적은 점차 회복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시황에 연계해 반도체 포트폴리오를 HBM 등 고부가가치, 고용량 제품 중심으로 재편·최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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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또한 이들 기업이 HBM을 통해 반도체 불황을 일부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경쟁사인 미국 마이크론과의 격차를 벌리기 위한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 하락이 이어지는 가운데 HBM으로 매출 상승 등 분위기 반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며 “AI향 반도체 분야에서 HBM뿐만 아니라 다른 차세대 반도체도 함께 성장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마이크론 등 경쟁사들의 HBM 추격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상황이라 기술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더 많은 고객사를 확보해야 한다”며 “자칫 방심하는 순간 마이크론에 금방 따라잡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환 교수는 “HBM이 초기 단계인 만큼 어느 기업도 투자를 늦추게 되면 경쟁에서 지게 될 것”이라며 “반도체는 초기 투자가 중요해 삼성과 SK는 지금 기술 개발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HBM의 수율을 높이면서 관련 신기술의 안정화를 이뤄내야 원가 경쟁력이 생겨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23년 09월호
SK하이닉스, HBM 공격적 투자..."D램 시장 지각변동 이끌 것"
SK하이닉스, HBM 매출 확대로 D램 시장 점유율 높이나
삼성도 HBM 캐파 2배 이상↑...시장 판도 예단 어려워
“SK 우위 유지? 점유율 차 완화?” 다양한 해석 이어져
| 이지용 기자 leeiy5222@newspim.com
SK하이닉스는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에서 점유율 50%를 확보하며 1위 자리를 공고히 했지만 HBM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컨퍼런스 콜에서 올해 시설투자액(CAPEX)을 전년(10조원대 후반) 대비 50% 이상 줄이기로 했지만 HBM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AI 시장 확대로 앞으로 전체 D램 중 HBM의 매출 비중이 높아질 전망인 가운데 글로벌 D램 시장에서 만년 2위인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의 선점 효과를 토대로 삼성을 뛰어넘는 등 시장 판도에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
하이닉스, HBM 격차 벌려...D램 시장 지각변동 겪나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 24GB 12단 HBM3를 개발하는 등 앞선 기술 개발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진행된 주요 기관투자자 및 증권사 애널리스트 대상 비공개 기업설명회(IR)에서 내년 HBM 물량을 올해보다 2배 이상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를 위해 ‘HBM 역량 강화 TF’를 운영하면서 제품 양산과 투자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이에 업계에서는 올해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경쟁사인 삼성전자 및 마이크론과의 점유율 격차를 더 벌릴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으면서, 전체 D램 시장의 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점유율 53%를 확보하면서 삼성전자(38%), 마이크론(9%) 등과의 격차를 벌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0%, 삼성전자 40%, 마이크론 10% 등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챗GPT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드는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또 내년 상반기 5세대 제품 HBM3E 양산, 2026년 6세대 HBM4 양산 계획 등을 통해 기술 속도 경쟁에서 계속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D램 시장에서 HBM이 차지하고 있는 매출 비중은 10% 미만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AI 반도체 시장 성장으로 HBM의 매출 비중 또한 크게 커질 예정이다. 만약 SK하이닉스가 HBM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점한다면 전체 D램 매출 규모까지 급격하게 키울 수 있는 것이다.
트렌드포스는 전 세계 HBM 수요는 2억9000만GB로 지난해보다 60% 성장하고 내년에도 30% 이상 더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도 올해 70조원 규모인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이 오는 2026년에는 약 110조원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HBM의 매출 비중이 아직 크지는 않아서 당장 큰 시장 판도 변화가 있지는 않겠지만, HBM 규모가 훨씬 커질 것인 만큼 앞으로 HBM으로 전체 D램 분야까지 리드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도 HBM 투자 확대...예측할 수 없는 시장 판도
SK하이닉스의 HBM 투자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AI와 챗GPT 등 차세대 산업의 성장 속도가 워낙 빠른 데다 경쟁사인 삼성전자 또한 최근 HBM에 대한 투자 확대 의지를 밝히면서 HBM 시장 및 전체 D램 시장이 어떻게 재편될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HBM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자설계자동화(EDA), 설계자산(IP), 기판 테스트 분야의 에코시스템 파트너 등과 함께 ‘MDI 얼라이언스’를 지난 7월 출범시켰다. 고객이 원하는 원스톱 올인원 서비스를 적시에 제공하면서 HBM 대형 고객사를 끌어모으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마찬가지로 이번 2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 내년 HBM 캐파(생산능력)를 올해보다 최소 2배 이상 늘릴 계획임을 밝혔다. 이와 함께 지난해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한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공정을 통해 오는 2025년까지 2나노 GAA를 양산하는 등 자체 신기술을 앞세운 HBM 선점 전략을 펼치고 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HBM에 대한) 증설 투자를 통해 내년 생산능력을 올해보다 2배 이상 높일 것”이라며 “HBM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유지하고 적기에 고객사들에 공급하겠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도 HBM을 중심으로 한 향후 시장 판도 변화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HMB3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올해 말까지 우위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내년 상반기 경쟁사들이 차세대 제품 시장에 진입함에 따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대종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HBM3의 개발 속도가 경쟁사 대비 빠르지만 삼성전자는 올해 4분기, 마이크론은 내년 1분기부터 양산할 예정이므로 2024년에는 점유율 차이가 완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SK하이닉스가 삼성보다 항상 D램 분야에서 뒤처졌는데 HBM을 통해 일부 추격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삼성전자가 HBM에서도 워낙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어 유의미하게 볼 수 있는 시장 판도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3년 09월호
"차세대 먹거리 양보는 없다" 삼성-SK ' AI 기술 신경전' 가열
양사, ‘1위 주장’ 공방 이어가
반도체 1위 독식 구조·고객사 신뢰도 감안한 듯
“앞으로 HBM 신경전 더 격화될 것”
| 이지용 기자 leeiy5222@newspim.com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금 ‘HBM 1위’ 마케팅에 치열하게 나서고 있습니다. 시장 1위를 주장하는 것은 늘 있어 왔던 마케팅이지만, HBM은 시장 판도를 가를 미래 먹거리이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두 기업이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것입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로 ‘HBM 1위 기업’이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한 반도체 전문가는 이같이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열린 2분기 컨퍼런스 콜을 비롯한 각종 공식 석상에서 “HBM 시장 1위 기업이다”, “HBM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가 HBM에 대한 자신감을 표하면 이를 의식한 듯 SK하이닉스가 곧바로 자사의 HBM이 가장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다고 반박하는 등 양 기업 간 공방이 격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26일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HBM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술 개발을 토대로 1위 자리를 공고히 할 것임을 밝혔다.
박명수 SK하이닉스 D램 부사장은 HBM 관련 자료를 근거로 들며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초기부터 오랜 기간 경험과 기술력 등을 축적했다”며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사장은 그러면서 “고객사들의 피드백에서 제품 완성도와 양산 품질, 필드 품질 등을 종합하면 SK하이닉스가 가장 앞서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컨퍼런스 콜에서 투자자 및 애널리스트들의 HBM 기술 경쟁력에 대한 질문에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이틀 뒤 열린 2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 이 같은 SK하이닉스의 주장을 곧바로 맞받아쳤다. 삼성전자는 ‘선두업체, 업계 최고’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쓰면서 업계 1위임을 강조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삼성전자가 ‘HBM 선두업체’로 HBM2를 주요 고객사에 독점 공급했고, 후속으로 HBM2E 제품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김 부사장은 또 “삼성전자는 메이저 공급 업체로서 HBM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업계 최고 수준의 HBM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4세대인 HBM3에서도 업계 최고 수준의 성능과 용량으로 고객과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경계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 사장도 이 같은 HBM 신경전에 가세했다. 경 사장은 지난 7월 임직원과 진행한 ‘위톡’에서 “삼성 HBM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여전히 50% 이상”이라며 “최근 HBM3 제품이 고객사로부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업계의 HBM 경쟁력 우려를 일축했다.
SK하이닉스는 경 사장의 이 같은 발언을 반박하는 듯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테크 세미나’를 열고 경쟁사들과의 HBM 기술 경쟁력 격차를 비교·설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양사의 ‘HBM 1위’ 신경전을 두고 업계에서는 고객사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일종의 마케팅으로 판단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특성상 1위 기업이 독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탓에 초기 단계인 HBM 시장에서 고객사들에 1위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풀이다. 반도체 공정은 신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1위가 아니면 고객사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어 1위와 2위의 격차가 급격하기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양사의 HBM 기술력에 큰 차이가 없는데도 신경전에 적극 나서는 것은 일종의 상대 기선제압이면서도 강한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고객사 및 시장에 보여주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HBM도 범용 D램 시장과 마찬가지로 1위 기업이 전체 시장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양사가 1위를 계속 강조하는 것 같다”며 “고객사들도 기술력 자체보다는 시장 1위라는 신뢰도에 따라 수요 움직임이 더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도 “지금 HBM을 제대로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이 삼성과 SK 두 곳뿐인 만큼 시장 1위 주장이 더 격화된 것 같다”며 “HBM3 등 앞으로 차세대 제품까지 시장에서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투자자와 애널리스트 등의 HBM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2위를 인정하는 순간 업계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 같다”며 “앞으로 관련 기술 개발이 진척될 때마다 양사는 적극적으로 이를 홍보하려고 하는 등 앞으로 HBM 신경전은 더 격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3년 08월호
페이스북은 아재들의 놀이터? 올 주가 급등 이유는
관심 못 받던 메타 주가 질주...테슬라 상승률 넘어
시가총액 10위 밖 밀린 메타 간신히 기사회생
페이스북 사용자 수 20억명에서 정체...정점 지났나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한국인들에게 ‘메타(페이스북)’라는 미국 회사는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는 이미 한물간 ‘페이스북’ SNS 서비스에 대한 관심은 뚝 떨어진 상태다. 하지만 또 다른 SNS 서비스인 ‘인스타그램’은 한국인에게 필수품이 됐다. 그런데 이렇게 인기 있는 인스타그램 SNS를 서비스하는 메타(페이스북) 주식에 대한 관심도는 높지 않다.
관심 못 받던 메타, 부진 떨치고 139% 수익률
한국에서 메타는 비인기 종목이다. 한국 투자자들에게 최고의 인기 종목은 단연 테슬라다. 한국인 보유금액이 17조5000억원으로 압도적이다. 2위인 애플은 6조5000억원이다. 세계 1위 애플의 시가총액은 테슬라의 3배가 넘지만 한국인들의 주식 보유금액은 거꾸로 테슬라가 애플보다 3배 더 많다. 그렇다면 메타는? 한참 낮은 7000억원을 기록 중이다.
한국인의 해외주식 보유 순위에서 메타는 8위에 그쳤다. ETF를 포함한 전체 보유 순위는 10위권 훨씬 밖인 14위까지 밀려났다. 심지어 시가총액이 33조원에 불과한 양자컴퓨터 기업 ‘아이온큐’에게도 밀렸으니 충격적이다. 그만큼 한국 투자자들은 메타에 대한 관심도가 낮다. 그런데 테슬라, 엔비디아, 아이온큐에 집중 투자하는 전략은 어리석은 것일까.
의외로 한국 투자자들의 주식투자 실력은 뛰어나다. 한국인들이 집중 투자한 아이온큐 주식은 2023년 상반기에만 292%가 치솟아 수익률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엔비디아는 190%, 4위인 테슬라는 113%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메타의 수익률이다. 그동안의 부진을 떨쳐내고 139%의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며 수익률 순위 3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메타 영업익 올 1분기부터 회복...시총 7위 턱걸이
미국 IT 업종의 시가총액을 2023년 6월 말 기준으로 살펴보면 흥미로운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은 무려 3660조원(3조500억달러)를 기록했다. 전 세계 증시 역사상 처음으로 3조달러의 벽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 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은 2453조원(코스피 2035조원+코스닥 418조원)으로 애플 1개 종목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애플뿐 아니라 시가총액 2위를 기록한 마이크로소프트보다도 훨씬 작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시가총액은 3038조원(2조5320억달러)으로 한국 전체 시가총액보다 500조원 이상 높다. 애플의 2022년 영업이익은 무려 143조원이다. 세계 1등 기업답게 독보적인 영업이익을 보여주고 있다. 주가수익비율(PER)도 26 수준으로 안정적인 모습이다.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100조원의 탄탄한 영업이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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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구글)은 1836조원(1조5300억달러)으로 시가총액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아마존과 엔비디아, 테슬라의 PER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4위인 아마존의 시가총액은 1604조원으로 107, 5위인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1253조원으로 179, 6위인 테슬라의 시가총액은 996조원으로 62다.
PER 수치는 맹신하면 안 된다. 과거의 영업이익이 낮아 PER 수치가 높더라도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미래에 막대한 영업이익을 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면 주가에는 이미 선반영돼 PER 수치가 높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테슬라는 2021년에 PER이 200 수준이었으나 2022년에 영업이익이 급증하면서 62로 내려왔다.
최근 챗GPT를 선두로 한 생성형 인공지능(AI) 경쟁으로 GPU 수요가 급증한 엔비디아도 마찬가지다. 올해 PER은 179로 높은 편이다. 게다가 엔비디아의 영업이익은 2021년 12조원에서 2022년에는 7조원으로 오히려 큰 폭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올해 주가가 폭등한 이유는 GPU 수요 폭발로 2023년에는 영업이익이 개선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물론 단기간에 주가가 너무 급등해 하반기에는 쉬어 갈 가능성도 있다.
메타의 경우는 어떨까. 메타는 2021년 영업이익 56조원(468억달러)에서 2022년에는 35조원(289억달러)으로 -38% 급감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한때 시가총액 순위가 10위권 밖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다행히 2023년 1분기부터 영업이익이 다소 회복되면서 주가도 급반등해 시가총액 7위를 턱걸이해 지켜내고 있다. 그런데 메타는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페이스북은 아재들의 놀이터...정점 지났나
미국인들의 일상에 IT 서비스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2018년에 개봉한 영화 ‘서치’와 2023년에 개봉한 ‘서치2’다. 이 영화들을 보면 미국인들이 실생활에서 아이폰,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을 얼마나 많이 이용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서비스들은 이제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전 지역에서 필수적으로 쓰인다.
전 세계 SNS 중 사용자 수 1위는 단연 페이스북이다. 무려 20억명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페이스북 SNS를 쓴다고 하면 단숨에 아재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페이스북 SNS는 한국에서 2010년대 중후반까지 전성기를 보였으나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20년부터 사용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젊은 층은 대부분 인스타그램으로 이탈했다.
최근 들어 페이스북의 사용자 수는 더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다. 2023년 5월에 플랫폼정보 제공업체인 와이즈앱·리테일·굿즈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페이스북의 2022년 4월 사용자 수는 1094만명이었다. 하지만 1년 뒤인 2023년 4월의 사용자 수는 979만명으로 무려 115만명이 감소했다. 더 우려되는 건 40대 중반~50대의 중장년층이나 노년층 사용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페이스북의 정점은 지났다는 평가가 많다. 역시 사용자의 노령화가 가장 큰 문제다. 미국 청소년들의 페이스북 사용률도 매년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층이 이탈하면 광고주들 사이에서도 매력을 잃게 된다. 페이스북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풋풋하던 시절 만들었던 초기의 ‘젊은’ 이미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페이스북의 성장은 완전히 끝난 걸까.
페이스북 이탈 도화선 된 개인정보 유출사건
페이스북의 인기가 하락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건 2018년에 이슈가 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다. 20억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용자 수를 보유한 글로벌 최대 SNS답지 않게 의외로 보안 관리가 허술했다.
첫 번째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발생한 건 2016년이다. 당시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영국 데이터 분석업체인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페이스북 사용자 8700만명의 데이터를 유출해 트럼프 선거운동에 활용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은 2018년 3월에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메타(페이스북) 주가는 폭락했다.
CEO인 저커버그는 1개월 뒤에 미국 상원 청문회에 강제 소환됐다. 그는 의회 청문회 발언을 통해 유출된 데이터가 가짜 뉴스에 이용되고 외부 세력이 선거 개입에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눈길을 끌었던 건 평소 회색 티셔츠에 후드티,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던 저커버그가 정장까지 빼입고 몸을 낮춘 채 청문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저커버그의 단정한 모습이 TV 화면에 나오면서 화제가 돼 사용자들의 분노는 다소 가라앉았다. 이후 페이스북은 미국 주요 신문 전면광고를 통해 “우리는 이용자의 정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 “만일 보호하지 못한다면 정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사과 광고를 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더 치명적인 두 번째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졌다. 이 비싼 사과 광고가 무색하게도 2018년 9월에 페이스북은 해커의 공격으로 해킹 당해 최대 5000만명의 사용자 정보가 추가로 유출됐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유출된 사용자 정보는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이었다. 심한 경우 최근 로그인 정보와 검색 기록까지 포함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사용자들은 더욱 분노했다.
전 세계 최대 사용자 수를 보유한 SNS가 이렇게 쉽게 해킹 당하면서 페이스북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이스북의 전산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됐다. 메타(페이스북)는 이 사건 발표 후 2018년 말까지 고점 대비 주가가 무려 40% 폭락했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영국정보위원회, 유럽연합(EU)에서는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을 문제 삼아 연달아 수십억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포브스’가 발표한 윤리적 기업 순위에서도 2018년에 35위였던 페이스북은 2019년에 147위로 곤두박칠치기도 했다. 메타(페이스북) 주식 투자자들에게 2018년은 악몽 같은 한 해였다.
또 2021년에는 페이스북의 내부고발자인 ‘프란시스 하우겐’이 미국 상원청문회에 출석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이 청소년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증언했다. 또 페이스북 경영진은 이를 은폐해 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런 크고 작은 사건 사고로 인해 페이스북 SNS 사용자 수는 정체 상태다.
그래도 건재한 페이스북, 사용자 수 20억명은 기회
플랫폼 기업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용자 수다. 페이스북 SNS의 사용자 수가 정체돼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페이스북 SNS 사용자 수가 여전히 20억명이 넘는다는 점이다. 2022년 말 기준 페이스북 SNS의 일간 활성사용자 수(DAU)는 20억3700만명이다. 월간 활성사용자 수(MAU)로 계산해 보면 30억명에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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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지역별 일간 활성사용자 수(DAU)를 살펴보면 미국·캐나다 2억명, 유럽 3억700만명, 아시아 8억7300만명, 기타 6억5700만명으로 전 세계에 고르게 분포돼 있는 점도 강점이다. 페이스북의 연간 유저당 평균매출액(ARPU)은 약 3만8000원(31.79달러)이다.
안타까운 건 최근 들어 ARPU가 높은 미국보다 단가가 크게 낮은 인도 중심의 아시아 지역 사용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일간 활성사용자 수가 20억명을 넘어가면 수익화할 수 있는 사업이 많다. 한국의 대표적인 SNS인 카카오스토리의 사용자 수는 고작 800만명에 불과하다. 페이스북의 사용자 수가 얼마나 많은 건지 체감할 수 있다.
애플 ‘앱추적 투명성’ 정책 이후 15조 광고수익 증발
그런데 사용자 수가 많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엄청난 사용자 수로 인해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은 듯했던 메타는 애플의 한 방에 무너졌다. 애플은 2021년 4월에 업데이트된 iOS14.5 버전부터 ‘앱 추적 투명성’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특정 앱이 사용자의 활동을 추적해 광고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실제 사용자가 ‘허용’이나 ‘거부’를 직접 결정하게 바뀐 셈이다. 하지만 메시지로 “이 앱의 사용자 활동 추적을 허용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흔쾌하게 허용하겠다고 동의할 사용자가 얼마나 될까. 애플이 이 정책을 도입한 초기에 글로벌 사용자의 앱 추적 동의율은 고작 10%에 불과했다.
이 정책으로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은 회사는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의 핵심 수익모델은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기반으로 ‘개인별 맞춤형 광고’를 진행해 떼돈을 버는 구조였다. 페이스북에 쌓인 방대한 사용자들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맞춤형 광고는 아주 효율이 좋았다. 사용자들의 ‘광고 클릭률’이나 ‘구매 전환율’이 일반적인 광고에 비해 훨씬 높았다.
정책 시행 전 애플은 페이스북에 앱 광고매출의 30%를 수수료로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페이스북이 이를 거절하자 ‘개인정보 보호’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페이스북에 타격을 준 거라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페이스북은 2021년 내내 ‘앱 추적 투명성’ 정책으로 곤욕을 치렀다.
메타가 2021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한 2022년 2월 3일 단 하루 만에 주가가 26% 폭락했다. 이날 증발한 시가총액은 약 284조원(2370억달러)이었다. 메타가 이 당시 실적 발표 때 “앱 추적 투명성 제도로 연간 12조원(100억달러)의 매출 차질이 우려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확인해 보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 큰 연간 15조원의 광고수익이 사라졌다.
또 애플에 이어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점유율이 더 높은 구글마저도 2022년 2월부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앱 추적 투명성’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년에 걸쳐 점전적으로 진행하며 광고주들을 보호할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한 것은 애플과의 차이점이었다.
메타 주가 급반등 이유는 분기실적 개선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정책 이후 메타의 수익은 급감했고 주가는 심각하게 폭락했다. 그럼에도 올해 들어 메타 주가가 급반등한 것은 최악의 구간을 지났다는 투자자들의 판단 때문이다. 애플의 개인정보 보호 정책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전인 2021년 4분기만 해도 메타의 분기 영업이익은 무려 15조원(126억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2022년부터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정책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메타의 영업이익은 뚝 떨어졌다. 2021년 4분기 대비 2022년 1분기와 2분기의 영업이익은 각각 5조원씩 쪼그라든 10조원(85억달러)에 불과했다. 이것도 그나마 양호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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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분기의 7조원(57억달러) 영업이익 발표 후 투자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2021년 4분기 대비 무려 8조원의 영업이익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감소율이 -55%에 달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과거보다 영업이익이 절반 이상씩 사라진다면 메타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들에게는 재앙 같은 일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메타의 경영진이 내놓은 해법은 인공지능이었다. 애플 때문에 사용자 데이터 확보가 까다로워지자 인공지능 기술력 활용을 극대화해 이를 보완했다. 또 시간이 경과할수록 메타의 앱 추적을 허용하는 소비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돈 먹는 하마였던 메타버스 관련 비용 절감을 위해 대규모 해고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메타의 영업이익은 2022년 4분기에 8조원(64억달러), 2023년 1분기에 9조원(72억달러)으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2022년 한 해에 사라진 영업이익은 무려 15조원에 육박했다. 다행히 2023년부터 회복세를 보여 메타의 수익성 우려가 줄어들면서 올해 내내 안도 랠리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메타의 주가는 2021년 초에 269달러로 시작했지만 향후 실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2021년 8월에는 384달러까지 급등했다. 하지만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제도 도입 등 다양한 악재로 2022년 10월에는 88달러까지 폭락하면서 고점 대비 하락률이 무려 -77%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실적이 조금씩 회복되며 2023년 6월 말에는 287달러까지 주가가 회복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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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페이스북) 주식에 장기 투자한 주주들은 거의 롤러코스터 같은 변동성을 겪어야 했다.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한 주주들이 편안하게 투자하고 있는 것과는 체감상 차이가 크다. 이렇게 높은 변동성을 감내하면서까지 굳이 메타 주식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메타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용자 수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메타는 2개의 SNS(페이스북, 인스타그램)와 2개의 메신저 앱(왓츠앱, 페이스북 메신저), 1개의 숏폼 동영상(릴스)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또 ‘메타 퀘스트’ VR 헤드셋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메타버스 세상에서 연결되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게 바로 메타의 거대한 잠재력이다.

2023년 08월호
인스타그램이 '대세'…카카오스토리를 왜 써?
카카오스토리, 1년 만에 120만명 떠나...체감은 더 나빠
한국 인스타그램 사용자 수 2000만명 돌파...대세 SNS
세계적인 축구선수 호날두 팔로워 수는 6억명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한국 SNS의 원조는 ‘싸이월드’다. 한때 전 국민이 사용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사용자 수가 급감해 지금은 조용히 잊혀졌다. 싸이월드의 뒤를 이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던 SNS 서비스는 카카오스토리다. 역시 곧 시들해졌다. 지금은 카카오스토리의 뒤를 이었던 페이스북마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도 페이스북보다 먼저 서비스됐던 ‘마이스페이스’ 또한 싸이월드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며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SNS는 유행에 민감하다. 아무리 잘나가던 SNS라도 주기적으로 유행이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페이스북 SNS를 운영하고 있는 메타(페이스북)는 이제 위기인 걸까.
‘인스타그램’ 인수한 저커버그는 천재? 운?
구글이 유튜브 인수를 결정한 2006년 당시 구글에게 유튜브는 강력한 위협 요인은 아니었다. 그 당시는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 유튜브가 빠르게 확산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구글은 2006년에 유튜브를 과감하게 약 1조9000억원(16억5000만달러)에 인수했다. 무려 7000억원의 프리미엄을 더 주고 매수한 셈이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라. 유튜브가 없는 구글은 상상할 수 없다. 구글의 인수합병(M&A)은 대성공이었다.
그렇다면 페이스북(메타)의 인스타그램 인수는 어떨까. 마크 저커버그 역시 치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에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구글의 유튜브 인수 때와 다른 점은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의 실질적인 경쟁자이자 추격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커버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수금액을 제안했다. 그 당시 페이스북에게 쫓기고 있던 트위터 등 인스타그램을 노리는 회사들은 많았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1조2000억원(10억달러)이라는 과감한 베팅으로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12년에 인스타그램 인수에 성공했다. 개발된 지 고작 2년도 안 된 직원 13명, 사용자 수 3000만명에 불과한 작은 기업이었다. 저커버그의 확신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인수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의 찬란한 미래 가능성을 정확히 예견하고 인수를 결정한 저커버그의 통찰력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모든 정보를 분석해 과감한 베팅으로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저커버그는 단지 운이 좋은 게 아니었다. 본인이 천재인 걸 입증한 셈이다. 물론 이때와 달리 최근에는 저커버그의 판단력이 의심되는 사례도 많다.
저커버그가 인스타그램 인수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파격적인 인수가격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저커버그는 인스타그램 창업자인 스탠퍼드대학 출신의 케빈 시스트롬과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며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인수 후에도 인스타그램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점이다. 이 부분에서 매도자에게 호감을 사 결국 알짜 회사를 손에 넣게 됐다.
페이스북에 인수된 이후에도 케빈 시스트롬은 무려 6년간 인스타그램을 독립적으로 운영해 왔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사용자 수가 10억명을 돌파한 2018년 10월에 회사를 떠났다. 모회사인 메타(페이스북)의 경영 간섭이 심해지면서 갈등을 빚었다. 다행히 그 후에도 인스타그램은 전 세계에서 승승장구 중이다.
카카오스토리 SNS, 1년 만에 120만명 이탈...왜?
한국에서 카카오그룹의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인은 없다. ‘카카오톡’은 5200만명의 한국인 대부분이 사용하는 국내 1위의 독점 메신저 앱이다. 한국인들은 모두 카카오톡으로 소통한다. 또 카카오그룹의 막강한 계열사인 ‘카카오뱅크’는 설립 5년 만에 2000만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또 다른 계열사인 ‘카카오페이’의 기세 또한 엄청나다.
이렇게 막강한 카카오그룹의 핵심 서비스 중 하나가 ‘카카오스토리’ SNS다. 전 국민이 쓰는 카카오톡에서 이름만 클릭하면 바로 카카오스토리와도 연결된다. 잘되는 게 당연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싸이월드의 뒤를 이어 한국 1위 SNS로 이름을 날렸던 카카오스토리의 활성사용자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페이스북마저도 한국에서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플랫폼정보 제공업체인 와이즈앱·리테일·굿즈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카카오스토리의 2022년 4월 사용자 수는 937만명이었다. 하지만 1년 뒤인 2023년 4월엔 817만명으로 무려 120만명이 감소했다. -13%의 감소율이다. 같은 기간 페이스북도 1094만명에서 115만명이 감소한 979만명을 기록했다. 이런 감소 추이는 최근 1년간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계속돼 왔다. 이제 한국인들은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 별 관심이 없다.
한국인 42%가 인스타그램 사용
그렇다면 한국에서 SNS의 유행은 끝난 걸까. 그렇지 않다. 지금 대세 SNS로 떠오른 건 인스타그램이다. 2022년에 사용자 수가 1906만명에 달했다. 1년 뒤인 2023년 4월에는 2167만명으로 261만명이 증가했다. 증가율이 무려 14%다. 전 국민의 42%가 인스타그램을 사용한다. 카카오스토리의 2배가 넘는다. 이 변화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건 뭘까.
SNS 서비스는 소비자들의 변덕과 유행으로 언제든 1등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투자자들은 이런 SNS의 특성 때문에 글로벌 SNS의 대표 격인 메타 주식에 투자하는 걸 두려워한다. 물론 합리적인 두려움이다. 만약 메타가 인스타그램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메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굉장히 쫓기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마이스페이스와 한국의 싸이월드는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 서비스가 시작된 옛날 사이트다. 그래서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1등을 지키지 못했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카카오스토리는 스마트폰에 최적화돼 출시된 SNS 서비스다. 그런데도 활성사용자 수가 줄어드는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글로벌 연결에서 찾는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언어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제 세계인들과 교류한다. 인스타그램의 경우 글로벌 누구와도 손쉽게 연결된다. 15억명을 훌쩍 넘는 막대한 사용자 수는 다른 SNS 서비스들과 차별화되는 강력한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인들만 사용하는 카카오스토리보다 전 세계인을 연결하는 인스타그램이 구조적으로 더 유리한 게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만 분석한다면 인스타그램보다 사용자 수가 더 많은 페이스북의 심각한 부진을 설명할 수 없다. 결국 SNS의 유행은 돌고 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직관적이고 합리적이다.
MZ 세대가 인스타그램에 열광하는 이유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서도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는 연결은 강하게 거부하는 심리도 있다. 그런 면에서 실명제를 원칙으로 하며 친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는 페이스북의 스타일은 부담스럽다. 반면 인스타그램의 기본 컨셉은 최고의 사진을 보여 주는 거다. 그래서 셀카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취향에 더 잘 맞는 분위기다.
지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대세도 인스타그램으로 전환되고 있다. 전체 사용자 수는 페이스북이 월등히 많지만 적극 사용자 수로 따져보면 인스타그램의 성장성이 훨씬 더 높다. 이유가 뭘까. 인스타그램은 글보다 사진과 동영상 위주여서 더 직관적이고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에 비해 사용자 연령이 낮다. 비실명으로도 계정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스타그램은 40세 미만의 MZ세대가 주력이다. 90년대생이 많다. 또 한 가지 특징은 페이스북이 남자 사용자가 더 많은 반면, 인스타그램은 여자 사용자가 60%를 훌쩍 넘는다. 특히 셀카와 맛집 사진이 많은 게 특징이다. 그래서 ‘셀카그램’ 또는 ‘먹스타그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은 특히 맛집이나 유명 여행지 같은 장소 검색에서 탁월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동일한 맛집 검색 시 다른 모든 포털들을 뛰어넘는 방대한 정보와 최신 사진들이 가득하다. 이유는 물론 사용자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이 2011년에 도입한 ‘해시태그’(게시물에 일종의 꼬리표를 다는 기능)도 한몫했다. 해시태그는 특정 단어 앞에 해시(#)를 붙여 연관된 정보를 한데 묶을 때 쓴다. 해시태그 덕분에 검색이 어려웠던 사진 공유가 손쉽게 이뤄지며 인스타그램의 급성장에 기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하고 은근히 자랑한다. 인스타그램만 보고 있으면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만 초라하고 나머지는 다 잘사는 느낌이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인스타그램에는 즐겁고 행복한 절정의 순간들만을 포착해 올릴 뿐이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고 비꼬는 말도 나온다. 어쨌든 대세는 인스타그램이다.
세계적인 축구선수 호날두의 팔로워 수는?
전 세계 인스타그램 계정 중 팔로워 순위가 가장 높은 계정은 ‘인스타그램’ 스스로의 계정이다. 6억4500만명의 팔로워 수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건 반칙이다. 그래서 순위로는 2위지만 실질적인 1위 계정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축구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팔로워 수가 5억9000만명에 달한다. 한국에서 호날두의 이미지는 매우 좋았지만 몇 년 전 한국에서 치른 유벤투스와의 친선경기에서 노쇼를 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확 나빠졌다.
팔로워 순위 3위지만 실질적으로는 2위인 계정은 역시 축구선수인 ‘리오넬 메시’로 4억7100만명이다. 호날두와 메시는 강력한 라이벌이지만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만큼은 호날두가 압승한 셈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실질적인 팔로워 수 1위와 2위가 모두 연예인이 아니라 축구선수라는 점이다. 인스타그램 세계에서는 연예인보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들 인기가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호날두 입장에서 인스타그램은 유용한 플랫폼이다. 전 세계인을 모두 연결해준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면 아무리 호날두가 인기가 많다 해도 6억명에 육박하는 팔로워를 손쉽게 확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날두의 모국인 포르투갈의 인구 수는 고작 1000만명에 불과하다. 모국 인구 수의 60배에 달하는 팔로워 수를 확보했으니 인스타그램의 막강한 위력을 알 수 있다.
팔로워 수 4억7100만명을 자랑하는 리오넬 메시 역시 마찬가지다. 메시의 모국인 아르헨티나 인구 수도 4600만명에 불과하다. 메시 역시 모국 인구 수의 10배가 넘는 팔로워를 확보했으니 인스타그램에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흥미로운 건 전 세계 순위 10위권인 ‘클로이 카다시안’마저도 팔로워 수가 3억명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이 전 세계인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한국 인스타그램은 블랙핑크와 BTS가 싹쓸이?
한국 인스타그램 팔로워 순위를 살펴보면 글로벌 순위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유명 축구선수 대신 K팝의 싹쓸이다. 그중에서도 단 2개 댄스 그룹인 블랙핑크와 방탄소년단(BTS)이 모든 순위를 점령했다. 1위는 블랙핑크의 제니로 8000만명, 2위 역시 블랙핑크의 지수로 7410만명의 팔로워 수를 자랑한다.
흥미로운 건 10위권 안에 블랙핑크나 방탄소년단과 관련 없는 계정은 단 1개도 없다는 점이다. 한국 축구의 영웅인 손흥민의 팔로워 수는 1230만명이다. 적은 수는 아니지만 글로벌 분위기와 비교해 보면 한국은 스포츠 스타들보다 K팝 스타들의 팔로워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K팝 역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수혜를 톡톡히 봤다. 인스타그램 덕분에 블랙핑크 소속의 제니, 지수, 로제는 한국 전체 인구 수인 5200만명보다 많은 7000만~8000만명의 팔로워 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방탄소년단의 뷔, 지민, 제이홉, 슈가, 진, RM도 5000만~6000만명의 팔로워 수 확보가 가능했다. 만약 인스타그램이 한국에서 한글로 만든 SNS였다면 아무리 유명한 가수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셀럽? 셀러브리티? 그리고 인플루언서
최근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인 12부작 ‘셀러브리티’가 화제다. 셀러브리티(Celebrity)란 영어로 유명인을 뜻한다. 이 드라마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 되는 세계를 실감나게 보여주며 넷플릭스 비영어권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한국에서는 셀러브리티를 줄인 ‘셀럽’이란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팔로워 수가 많은 인스타그램 운용자도 셀럽으로 통하긴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전통적인 아이돌, 배우, 가수처럼 누구에게나 유명한 사람을 뜻한다.
이제 인스타그램은 단순한 SNS가 아니다. 팔로워 수는 곧 권력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으로 돈을 벌기 위해 꼭 블랙핑크나 BTS처럼 수천만 명의 팔로워가 필요한 건 아니다. 팔로워 수가 1만명만 넘어가도 작은 비즈니스는 가능하다. 10만명을 넘어가면 웬만한 비즈니스는 다 가능하다. 100만명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권력이 된다. 이런 인플루언서들에게는 대중의 관심이 집중돼 소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업들은 연예인 광고에 집중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인플루언서를 이용한 광고를 더 선호한다. 연예인 마케팅보다 가격 대비 성능이 좋기 때문이다. 이를 ‘인플루언서(Influencer) 마케팅’이라고 한다. 인플루언서란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전통적인 개념의 연예인과 구분해 인터넷상 유명인 중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네이버 파워블로거, 유명 인스타그램 운영자와 유튜브 운영자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인플루언서가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하는 공동구매는 순식간에 매진된다. 유명 인스타그램 운영자는 피드에 광고 글을 한 번 올려주고 수백만원을 받는다. 패션, 뷰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고를 원하는 광고주들이 넘쳐난다. 인플루언서가 협찬을 통해 원하는 물건이나 식당을 이용하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인플루언서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은 어떻게 돈을 벌까?
하지만 메타 입장에서는 인스타그램 사용자만 돈을 벌어서는 곤란하다. 메타의 주 수익모델 역시 99%가 광고다. 인스타그램을 쓰는 소비자들은 인스타그램의 광고 수익모델에 익숙할 것이다. 지겹도록 광고가 나오니까 말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맞춤형 광고는 효과가 높아 광고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그런데 이 정밀한 타깃 광고는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일단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앱을 설치한 후 동의를 누르는 순간부터 스마트폰 사용자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 왔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식별자’라는 꼬리표를 통해 개별 사용자들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물건을 사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한다. 이 빅데이터를 통해 ‘맞춤형 광고’를 진행해 왔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다 보면 본인이 자주 이용하는 ‘쇼핑몰’이 광고로 보여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스크롤을 밑으로 쭉 내려보면 5개의 게시물당 1개씩의 광고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광고 개수가 늘어나고 있다. 광고 내용은 당연히 타깃 소비자의 취향이나 연령대에 맞는 맞춤형 광고다. 그런데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정책 이후 맞춤형 광고의 정밀도가 확 낮아졌다. 다행히 메타는 강력한 인공지능 기술력을 통해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피드 광고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광고들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또 연예인들과 기업들도 인스타그램을 홍보 목적으로 적극 활용한다. SNS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인스타그램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하고 확장될 수 있을까. 혹시 비슷한 다른 SNS가 나오면 카카오스토리처럼 순식간에 왕좌를 뺏기는 건 아닐까. 인스타그램을 위협하는 새로운 1등 후보로는 중국 기업 바이트댄스가 만든 ‘틱톡’이 있다.
글·사진 시대 끝? 숏폼 동영상 대세
SNS란 Social Network Service의 줄임말이다.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SNS로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숏폼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도 SNS의 범주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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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 콘텐츠’란 15~60초의 짧은 동영상 콘텐츠를 뜻한다. 틱톡은 숏폼 콘텐츠라는 새로운 장르로 유튜브의 빈틈을 공략했다. 날이 갈수록 더 짧아지기만 하는 현대인의 집중력에 착안한 틱톡만의 차별화된 콘텐츠였다. 중국 내 서비스는 2016년, 글로벌 서비스는 2018년에 공개됐다.
이 15~60초 동영상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틱톡의 서비스가 나온 지 불과 1년 만에 전 세계 이용자 수가 1억명을 돌파했다. 동영상에 익숙한 10~20대들의 취향 공략에 성공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MZ(밀레니얼+Z세대, 1981~2010년생)세대들에게 틱톡 같은 숏폼 콘텐츠 시청은 대세가 됐다.
숏폼 콘텐츠의 강점은 시청자들에게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짧은 동영상이 끝나면 끊임없이 다음 영상을 연이어 추천한다. 짧은 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특성상 영상 자체가 유튜브보다 더 자극적인 경우가 많다. 선정성을 무기로 한 숏폼도 상당수다. 또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유지하기 위해 중간광고를 포기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시청자들의 시간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틱톡의 대공세에 유튜브보다 메타(페이스북)가 먼저 대응을 시작했다. 메타는 글·사진 SNS인 페이스북과 감각적인 사진 SNS인 인스타그램으로 톡톡히 재미를 봐 왔다. 하지만 동영상 시대로 넘어오면서 유튜브에 기선을 빼앗겼다. 이런 아픔 때문에 숏폼 플랫폼 틱톡의 등장에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유튜브 ‘쇼츠’보다 빠른 2020년 8월에 틱톡의 숏폼 콘텐츠를 모방한 ‘릴스’를 전격 선보였다.
유튜브는 릴스보다 1년 늦은 2021년 7월에 쇼츠를 정식 출시하고 서비스를 개시했다. 현재 쇼츠의 월간 사용자 수는 15억명 이상, 틱톡은 16억명 이상, 릴스는 10억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메타 입장에서는 선방한 셈이다. 릴스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양쪽에 모두 올릴 수 있게 오픈돼 있다. 이런 정책은 릴스의 사용자 수 확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광고 측면에서 보면 릴스는 기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광고 시장을 일부 잠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메타가 숏폼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용자들이 릴스 영상을 시청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분기에는 릴스 동영상 시청 횟수가 매일 20억회로 늘어났다. 이는 6개월 전보다 2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지난해보다 24% 증가했다. 광고매출도 페이스북 채널에서는 40%, 인스타그램 채널에서는 30% 증가했다.
메타의 대공세에 카카오그룹은 위기
결론적으로 세계 최대 SNS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모두 가지고 있는 메타는 숏폼 동영상인 릴스까지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메타의 대항마라 할 수 있는 카카오그룹의 대응은 어떨까. 카카오스토리는 이미 인스타그램의 대공세에 한국의 SNS 시장을 거의 넘겨주고 있는 상황이다.
카카오그룹은 숏폼 동영상 릴스와 쇼츠의 공세에는 잘 대응할 수 있을까. 네이버는 ‘클립’이라도 있지만 카카오의 숏폼 동영상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용자 수다. 아직 한국에서 전 국민이 사용하고 있는 카카오톡의 입지는 독보적이고 압도적이다.
하지만 SNS 시장과 숏폼 동영상 시장에서 메타에게 계속 밀리는 건 위험 신호다. 미래에는 카카오의 자랑인 메신저 시장마저 메타의 ‘왓츠앱’과 ‘페이스북 메신저’에게 공격받게 될지도 모른다. 카카오는 가장 중요한 자원인 사용자 수가 더 이상 감소하지 않도록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토종 플랫폼 기업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카카오의 선전을 기원한다.

2023년 08월호
차세대 주력사업 메타버스가 적자? 너 나가! 미친 해고로 수익 보전
페이스북 상표, 메타로 바꾸며 메타버스에 올인
메타버스 관심 뚝! 상용화는 먼 미래
메타버스 누적적자 40조원...유저 고작 20만명 굴욕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페이스북이 2021년에 사명을 ‘메타’로 변경했을 때 시장은 의아해했다. 페이스북이라는 엄청난 브랜드를 포기하면서까지 메타로 이름을 바꾼 이유가 뭘까. 이 당시 페이스북은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이미지 하락, 내부 폭로로 드러난 기업 도덕성 문제, 아재들의 SNS로 전락한 페이스북 등 고민거리가 많았다.
이에 회사를 재창업하는 수준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고민 끝에 나온 전략은 미래 유망 산업인 메타버스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CEO인 마크 저커버그는 2021년에 새로운 사명인 메타와 새로운 로고를 공개하며 “오랫동안 우리 회사가 메타버스 기업으로 보여지기를 희망했다”고 말했다. 메타버스에 집중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메타버스의 의미는?
그런데 ‘메타버스’가 뭘까? 가상현실(VR)은 알겠는데 메타버스의 정의는 좀 모호하다. 가상현실은 메타버스의 일종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와 가상현실이 동의어는 아니다. 메타버스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단어의 의미만 합쳐보면 ‘초월적 우주’라는 뜻이다. 초월적 우주라니 모호하다. 이 세상 얘기가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또 다른 의미로는 가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쳐 ‘가상세계’라고도 표현한다. ‘3차원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아바타를 통해 서로 교류하고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함으로써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예 이름까지 바꿔버린 메타는 메타버스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메타버스를 ‘가상공간의 집합체’라고 표현했다. 점과 선, 면에 이은 새로운 디지털 연결점인 가상공간(Virtual space)에 의미를 뒀다. 이런 가상공간이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집합체를 이룬다는 게 메타의 설명이다.
메타는 가상공간을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전 세계에서 20억명 이상이 페이스북 SNS를 쓰지만 각자가 물리적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현실세계의 구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서로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무수히 많은 가상공간에서 만나 다양한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메타가 앞장서겠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친구를 만나고 일하고 놀고 배우고 쇼핑하고 뭔가를 만드는 작업을 자신들이 제공하는 가상공간 안에서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다. 이런 상호작용이 가능한 가상공간의 집합체를 메타버스라고 정의했다.
가상현실 세계가 활성화되려면
메타가 꿈꾸는 메타버스가 활성화되려면 먼저 가상현실 세계가 활성화되는 게 순서다. 그런데 가상현실 세계가 활성화되려면 최소한 3가지 요소가 우선적으로 충족돼야 한다.
첫째는 디바이스다. 사람들이 가상현실 세계에 자유롭게 접근하려면 스마트폰처럼 누구나 가상현실 세계에 접속 가능한 디바이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VR 헤드셋이다. 메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VR 헤드셋 전문 회사인 오큘러스를 2014년에 과감하게 인수했다.
스마트폰처럼 세상 사람 누구나 VR 관련 디바이스를 1개씩 보유하게 하려면 대중적으로 접근 가능한 합리적 가격이 제일 중요하다. 메타는 VR의 대중화를 위해 VR 헤드셋인 ‘메타 퀘스트2’를 원가 수준인 60만원(499달러)에 판매했다. 하지만 메타 VR 기기의 누적 판매대수는 아직 2000만대에도 못 미친다. 전 세계에서 1년간 팔리는 스마트폰이 14억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VR 헤드셋이 스마트폰을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둘째는 콘텐츠다. VR과 관련된 게임들이 출시된 지도 벌써 7년이 넘었다. 하지만 게임 콘텐츠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사용자 수가 2000만명에도 못 미치다 보니 게임을 만들어도 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 사용자 수가 적으니 VR 게임 개발사 입장에서는 대규모로 자금을 투자하기 어렵다. 이런 악순환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셋째는 인터넷 속도다. 가상현실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빠른 인터넷을 통해 사용자들에게 초고화질의 가상화면을 실시간으로 전송해야 한다. 집에서 혼자 게임을 하던 ‘콘솔’의 시대에는 인터넷이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VR 게임의 경우 빠른 속도가 필수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가 있더라도 인터넷 연결이 느리면 소용없다.
예를 들어 적의 공격을 피하며 무기를 쏘는 슈팅 게임에서 내가 총 한 번 쏠 때 상대방은 이미 난사를 하고 있다면? 그냥 게임 끝이다. 미래에 VR 게임이 활성화하려면 언제 어디서든 빠른 속도로 게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5G 통신의 3요소인 초고속, 초저지연, 초연결은 가상현실 활성화를 위한 필수 요소다. 하지만 아직 5G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
‘호라이즌 월드’의 끔찍한 그래픽 디자인
더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다 게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게임만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가상현실 세계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게임 시장 규모는 거대하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정적이다. 나머지 사람들을 가상현실로 오게 하려면 다른 게 필요하다.
친구를 만나고 일하고 놀고 배우고 쇼핑하는 걸 자신들이 제공하는 가상공간 안에서 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상공간의 집합체가 필요하다. 이 세계를 메타는 메타버스라고 정의하고 ‘호라이즌 월드(Horizon World)’로 구현했다. 자신들이 3차원적인 가상공간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2차원적인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용자들이 호라이즌 월드로 몰려들 거라는 게 저커버그의 순진한 계산이었다.
저커버그는 메타의 메타버스 사업을 담당하는 ‘리얼리티 랩스’에 매년 12조원(100억달러)씩 10년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메타가 야심 차게 공개한 호라이즌 월드를 본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호라이즌 월드의 그래픽 수준은 너무도 충격적으로 조잡했다.
1990년대 그래픽 디자인 같은 허접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특히 압권은 CEO인 저커버그가 공개한 자신의 아바타였다. 엄청난 금액이 투자된 만큼 뭔가 근사한 아바타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놀랄 만큼 유치한 디자인을 선보여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됐다. 물론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화제성이었다.
또 아바타의 다리가 없는 부분도 많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VR 헤드셋으로는 다리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없앴다는 변명이었지만 사용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메타는 당초 2022년 말까지 호라이즌 월드의 월간 활성사용자 수 50만명 달성을 목표로 했는데 실제로는 20만명에도 못 미쳤다.
사실 페이스북 SNS의 사용자 수만 20억명이다. 따라서 호라이즌 월드가 목표 사용자 수인 50만명을 달성했다 쳐도 결코 많은 게 아니었다. 이 겸손한 목표마저 달성 못하다니 사용자들이 호라이즌 월드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메타 직원들조차도 호라이즌 월드에 접속하는 걸 꺼렸다. 같은 기간 네이버 ‘제페토’의 월간 활성사용자 수는 2000만명으로 호라이즌 월드의 100배였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결론적으로 고작 호라이즌 월드에 접속하기 위해 그 무거운 메타의 VR 헤드셋을 쓰고 불편을 감수하는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최초 기획 단계에서는 잘될 것 같았지만 막상 실전에 투입해 보면 혹평을 받는 사례들은 흔하다. 이런 계산 착오가 꼭 메타의 호라이즌 월드 기획에서만 발생한 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공지능 스피커를 꼽을 수 있다. 아마존, 구글, 애플이 모두 야심 차게 뛰어든 인공지능 스피커는 시장에서 잘 팔렸다. 하지만 구매 후 한 달도 못 가서 구석에 처박히는 일이 많아졌다. 실제 활용도가 낮기 때문이다. 메타의 VR 헤드셋 역시 사용자 경험이 아직은 좋지 않은 편이다. 결국 이런 부분이 호라이즌 월드의 흥행 실패에도 영향을 미쳤다.
‘메타버스’로 손실, 저커버그의 너 해고! 폭발
여러 가지 악재로 2022년에 메타의 주가는 -64% 폭락했다. 돈은 냉정하다. 메타 주식을 약 200만주 보유하고 있던 헤지펀드 알티미터 캐피털의 브래드 거스트너 CEO는 2022년 10월에 메타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메타가 인력을 방만하게 운용하고 있으며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인력을 20% 줄이고 메타버스 투자를 연간 12조원(100억달러)에서 절반인 6조원(50억 달러) 이하로 줄여라”는 내용이었다.
거스트너 CEO는 “메타는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시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며 “사람들은 ‘메타버스’가 뭘 의미하는지조차 헷갈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 “메타가 현재 투자하고 있는 가상세계 분야가 결실을 보는 데 10년은 걸릴 수 있다”며 “불확실한 미래에 연간 12조원(100억달러)씩 총 120조원(10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계획은 너무 무모하다”고 우려했다.
거스트너 CEO가 지적한 ‘메타의 방만한 인력 운용’은 일리 있는 주장이다. 메타는 2020년에 5만8000명이었던 직원 수를 2년 만인 2022년 9월에는 8만7000명까지 늘렸다. 늘어난 직원이 무려 1만9000명에 달했다. 이들의 엄청난 인건비를 계산해 보면 메타의 손실 급증이 이해가 된다.
메타의 2022년 중위 연봉은 3억6000만원(29만6000달러)이다. 이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 중 가장 높다. 리서치 회사인 마이로그아이큐(MyLogIQ)가 집계한 2022년 중위 연봉 데이터를 살펴보면 애플은 1억원(8만4000달러), 구글은 3억4000만원(28만달러)이다. 메타와 구글의 인건비가 높은 이유는 급여가 높은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많은 것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주가 대폭락과 주주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저커버그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마침 SNS 회사인 트위터를 인수한 후 직원의 3분의 2를 해고한 일론 머스크의 비용절감 방식이 저커버그에게 큰 자극이 됐다. 저커버그는 트위터와 경쟁할 새로운 텍스트 기반의 SNS인 스레드를 출시해 트위터를 괴롭히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머스크의 과감한 구조조정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실 2022년 10월에 공개서한을 보낸 알티미터 캐피털 헤지펀드가 보유한 메타 주식 200만주는 무시할 만한 주식 수는 아니지만 경영권에는 전혀 영향을 못 미치는 작은 지분율이다. 그런데도 저커버그는 이 공개서한을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해고를 진행했다. 바로 다음달인 2022년 11월에 1만10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4개월 뒤인 2023년 3월에는 추가로 1만명을 더 해고했다. 해고비율이 전체 직원의 24%다.
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날 일이다. 한국은 노동법상 해고가 어렵다. 해고 요건이 엄격해 보통 2년 연속 적자가 나야만 해고할 수 있다. 메타처럼 이익이 좀 줄었다고 직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했다가는 노동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를 수 있다. 이렇게 한국과 미국은 해고 문화가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이라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해고를 하면 직원들의 사기는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커버그, 폭풍 해고로 메타 수익 보전 성공
물론 저커버그의 폭풍 해고 덕분에 메타는 2022년의 최악의 실적에서 벗어나 2023년부터 수익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단순 계산해 봐도 [중위연봉 3억6000만원 × 해고인원 2만1000명 = 인건비 연간 절감금액 약 7조6000억원]이다. 저커버그가 욕을 먹으면서도 해고를 강행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메타버스 올인 전략 실패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건 직원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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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의 최근 3년간 지역별 매출현황을 살펴보면 미국·캐나다의 비중이 43%, 유럽 23%, 아시아·태평양 24%의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전반으로 매출액이 고르게 분산돼 있는 것이 장점이다. 가장 성장세가 뚜렷한 지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다. 2022년의 부진한 매출 속에서도 유일하게 소폭이지만 플러스 성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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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의 2021년 총매출액은 141조원(1179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38조원(319억달러)이 증가했다. 성장률이 무려 37%에 이른다. 이 당시만 해도 코로나19 특수까지 겹쳐 메타의 성장성에 대한 기대감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하지만 2022년 2월부터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급증하던 메타의 총매출액은 2022년에 전년 대비 1조원 감소한 140조원(1166억달러)을 기록했다.
더 심각한 건 영업이익이었다. 메타의 2021년 영업이익은 56조원(468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17조원(141억달러) 급증했다. 증가율이 무려 43%에 이른다. 같은 기간 아마존 영업이익의 2배에 가깝다.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애플의 개인정보 보호 정책은 메타의 성장세에 찬물을 확 끼얹었다.
2022년 메타의 총영업이익은 35조원(289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무려 21조원(179억달러) 급감했다. 감소율이 -38%에 달했다. 메타의 주력 수익은 ‘패밀리 오브 앱(페이스북·인스타그램·페이스북 메신저·왓츠앱)’ 부문의 광고수익이다. 이 광고수익이 애플의 ‘앱 추적 투명성’ 정책 영향으로 2022년에 -16조원(142억달러) 급감했다.
주력 부문의 수익이 급감하고 나니 미래 성장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했던 ‘리얼리티 랩’(AR·VR 하드웨어 기기인 메타퀘스트와 VR 소프트웨어인 호라이즌 월드) 부문의 적자 대행진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메타는 이 부문에서만 2020년에 -8조원(66억달러), 2021년에 -12조원(102억달러), 2022년에 -16조원(137억달러)의 경이적인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3년 누적 적자금액은 무려 -36조원(305억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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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의 분기실적 중 가장 최악은 2022년 3분기였다. 이 당시 메타 수익의 주력인 ‘패밀리 오브 앱’ 부문의 영업이익은 11조2000억원(93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급감했다. 또 메타 수익성 악화의 주범인 ‘리얼리티 랩’ 부문의 영업손실도 -4조4000억원(37억달러)으로 부진이 지속됐다.
다행히 2023년에 들어서면서 수익성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2023년 1분기 ‘패밀리 오브 앱’의 수익은 13조4000억원(112억달러)으로 최악이었던 2022년 3분기보다 20% 급증했다. 골칫덩어리인 ‘리얼리티 랩’의 영업손실은 -4조8000억원(40억달러)으로 적자가 지속됐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또 향후 ‘리얼리티 랩’ 분야의 적자는 2만명 이상의 거침없는 해고로 인해 앞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최악은 지났다는 분위기다.
롤러코스터 주가, 메타의 미래는?
페이스북(메타)의 시가총액은 한때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7위를 지키고 있다. 메타의 주가는 2022년 한 해 동안에만 -64% 폭락했다. 투자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메타의 롤러코스터 같은 주가 폭락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메타 주식 장기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분노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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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 6개월간의 주가 흐름을 살펴보면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이 발표된 2018년 3월부터 메타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해 2018년 말까지 -40% 폭락했다. 그 후 조금씩 주가를 회복하다가 2020년의 코로나19 특수로 인해 2021년 8월에 사상 최대치인 384달러까지 폭등하게 된다. 그런데 애플의 앱 추적 금지 정책 발표 후 이익 급감으로 2022년 10월에는 주가가 88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최고점 대비 하락률이 무려 -77%다.
그 뒤 2023년 7월에는 다시 287달러까지 급반등해 바닥에서의 상승률은 무려 226%에 달한다. 이렇게 변동성이 심하니 메타 주식을 장기 투자하는 건 투자자 입장에서 쉽지 않다. 이 롤러코스터 같은 주가 변동성에 자칫 매매를 잘못했을 경우 투자자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만약 고점 매도에 실패했다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반대로 바닥인 88달러에 매도한 후 220% 폭등한 287달러의 주가를 쳐다보는 건 더 고통스럽다.
투자자들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알파벳),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들에 투자하는 이유는 변동성이 작아서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기업 못지않게 규모가 큰 메타 주가의 높은 변동성은 투자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1등 주식인 애플 대신 메타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메타는 빅테크 기업치고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종목이다. 하지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페이스북 메신저를 사랑하는 30억명(중복 제거)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익화 모델은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충분히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 게다가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를 겨냥해 새로 출시한 ‘스레드’ SNS까지 성공할 조짐을 보이면서 기대감이 더 커지고 있다.
메타가 500자의 짧은 글로 소통하는 SNS 스레드를 내놓자 초반 반응이 뜨겁다. 특히 인스타그램과의 연동이 편리해 출시 후 짧은 기간에 사용자 수 1억명을 돌파했다. 메타가 스레드를 통해 3억5000만명에 달하는 트위터 사용자마저 빼앗아 온다면 메타의 SNS 영향력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메타가 그토록 염원하는 메타버스의 대중화다. 과연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처럼 ‘메타 퀘스트’를 각자 1개씩 가지게 되는 날이 올까. 만약 전 세계인이 모두 메타의 ‘AR글래스’를 통해 메타버스 세계인 호라이즌 월드에 접속해 웃고 즐기며 생활하는 날이 온다고 믿는다면 메타(페이스북) 주식에 관심을 가져보자. 널뛰는 주가로 고통받았던 주주들이 충분히 보상받게 될지도 모른다.

2023년 07월호
창사 후 처음 맞는 ‘검색 위기’...자가당착에 빠진 구글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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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90조원 영업이익 정체 고민
구글 ‘자기 파괴’ 딜레마...사업다각화 관건
클라우드·유튜브·구글플레이·구글맵 성장속도 높여야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구글은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가장 먼저 알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네이버가 먼저 안다. 오늘날 구글이 현대적인 신(神)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전 세계 사용자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친한 친구나 변호사, 의사,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들을 구글에게 서슴없이 털어놓고 질문한다.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사람들의 구글에 대한 신뢰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구글 신’이라 불린다.
‘구글 신’에게 덤비는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
이런 ‘구글 신’에게 오픈AI의 ‘챗GPT’와 이를 탑재한 MS의 ‘빙’이 도전을 시작했다. 챗GPT가 발표되고 시장이 보여준 엄청난 반응을 확인한 구글은 즉각 ‘코드 레드’를 발령했다. ‘검색 창’이 ‘채팅 창’으로 바뀌는 대변혁이다. 지난 25년간 신의 자리를 지켜온 구글의 지위가 위태롭다. 구글 창사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검색의 위기다.
챗GPT 등장 직후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는 이미 2019년에 은퇴한 구글의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까지 모셔와 비상대책회의를 진행했다. 챗GPT의 기습에 기선을 빼앗겼지만 사실 구글은 인공지능(AI) 분야의 절대 강자다. 이미 6년 전인 2017년의 개발자회의 때부터 회사의 방향을 ‘AI 퍼스트’로 전환했다. 기술적으로는 오픈AI나 MS보다 우위에 있다.
또 구글이 경쟁사에 비해 유리한 부분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다. 경쟁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도 모두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만 구글만큼은 아니다. 전 세계 인류는 모두 구글 검색이 생활화돼 있다. 이를 통해 취득한 방대한 데이터는 ‘구글 신’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강점이다.
구글이 과거에 발표했던 트랜스머 알고리즘 논문이 오픈AI의 챗GPT를 탄생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2016년에 바둑 천재 이세돌을 이겨 유명세를 떨친 ‘알파고’를 만든 ‘딥 마인드’도 구글이 인수한 회사다. 현재 구글이 보유하고 있는 초대형 언어 모델 종류도 다양하다.
구글이 2018년에 개발한 ‘버트(BERT)’는 자연어 이해를 위해 설계된 언어 모델이다. 단어와 구의 의미를 이해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2021년에 개발한 ‘람다(LaMDA)’는 대화형 애플리케이션을 위해 설계된 언어 모델로 1370억개의 매개변수(파라미터)를 가졌다. 텍스트 생성, 언어 번역, 다양한 종류의 창의적 콘텐츠를 작성할 수 있고 다양한 질문에도 답변할 수 있다.
구글이 2022년에 개발한 ‘팜(PaLM)’은 기존 람다보다 3배 이상 많은 5400억개의 매개변수를 가졌다. 하지만 매개변수의 개수가 많은 것만이 성능 향상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2023년에 개발된 ‘팜2(PaLM2)’는 팜의 최신 버전이다. 구글은 이제 매개변수의 개수보다 학습 방식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런 이유로 팜2의 학습 데이터 양은 이전 모델보다 5배 증가했다.
구글, 올해 연례개발자회의 통해 기사회생
구글은 2023년 5월 10일의 연례개발자회의(I/O)에서 CEO인 순다르 피차이를 비롯해 주요 경영진이 총 출동해 부문별 회사 비전을 발표했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의 ‘바드(Bard)’에는 최신 버전인 팜2 모델이 적용됐다. 과학, 수학 추론과 코딩 작업까지 구현할 수 있다. 시각적 분석이 가능한 구글 렌즈도 통합됐다. 그림 생성 기능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도비의 파이어플라이(Firefly)와도 제휴를 맺었다.
구글은 또 새롭게 개선된 G메일, 구글 맵, 포토 서비스와 코딩 생성 기술을 선보였다. 이렇게 구글은 총 25개의 제품에 대거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는 물량공세를 펼쳤다. 또 인공지능에 집중하기 위해 딥마인드 CEO 데미스 하사비스를 중심으로 구글 리서치, 딥마인드, 브레인 팀을 하나로 통합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기선을 제압당하며 체면을 구겼던 구글의 대반격이었다. 이번 발표로 구글의 기술력에 대한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다. 구글은 궁극적으로 자사의 모든 서비스에 인공지능을 적용해 장기적으로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생성형 AI 챗봇의 또 다른 문제는 비용
문제는 비용이다. 현재 챗GPT의 쿼리당 비용은 최소 10센트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구글의 기존 키워드 검색비용은 쿼리당 약 0.28센트(3원) 수준이다. 하지만 생성형 AI 검색 방식을 활용하면 이보다 7배 많은 2센트(24원) 이상의 높은 비용을 발생시킬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 구글이 기존처럼 하루 100억개에 육박하는 쿼리를 처리할 경우 연간 최소 수조원 이상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챗GPT가 재빠르게 한 달에 20달러의 구독 모델을 도입한 이유도 급격한 트래픽 증가에 따른 비용 급증 때문이다. 챗GPT의 인공지능 학습에는 대부분 엔비디아의 GPU가 사용된다. 그런데 엔비디아의 GPU는 결코 싸지 않다. 요즘 엔비디아의 주가가 폭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다.
다행히 구글은 GPU 대신 자체 개발한 텐서 프로세싱 유닛(Tensor Processing Unit, TPU)을 활용한다. 구글이 지난 4월에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4세대 인공지능 반도체인 TPU의 성능은 기존 3세대보다 10배 이상 뛰어나다. 에너지 효율도 2~3배 이상 높다. TPU는 딥러닝에 특화된 전용 프로세서로 인공지능 연산에 최적화돼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엔비디아의 GPU에 비해 비용도 저렴하다는 점이다.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도 GPU가 아닌 TPU로 학습했다. 또 TPU는 구글의 초거대 언어 모델인 팜에 최적화돼 있다. 결론적으로 TPU 기반의 팜 덕분에 구글은 오픈AI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다. 구글의 강력한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바드를 오픈AI의 챗GPT와 단순 비교했을 때 유리하다는 뜻이다. 현실은 다르다. 구글은 아직 인공지능과 관련한 확실한 수익 모델을 확보하지 못했다. 오픈AI와 MS의 파상공세에 어쩔 수 없이 바드를 전 세계에 공개했지만 이로 인해 비용이 급증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이 비용은 장기적으로는 크게 하락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구글의 재정을 심각하게 압박할 수 있다.
돈 없으면 못 뛰어드는 AI 전쟁
인공지능 개발에는 기본적으로 막대한 자금력이 필수적이다. 이제 미국 시가총액 상위 4개 기업의 영업이익을 살펴보자. 애플은 143조원, 마이크로소프트는 100조원, 알파벳(구글)은 90조원, 아마존은 15조원이다. 아마존의 영업이익이 상대적으로 부진하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자금력과 수익력을 갖춘 기업이라야 인공지능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거대한 플랫폼 기업들은 이미 자신들의 탁월한 서비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더 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인공지능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총력을 다해 몰두해 왔다.
초거대 인공지능 개발은 자금력이 막강한 빅테크 기업들만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금력이 막강하다고 모두가 경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빨리 대응하지 못해 순식간에 경쟁에서 도태됐던 기업들의 슬픈 역사는 무수히 많다. 빅테크 기업이라도 인공지능 발전을 빠르게 쫓아가지 못할 경우 규모가 확 쪼그라들 가능성이 크다. 지금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인공지능 전쟁에 진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파괴가 살길? 딜레마 빠진 구글
구글의 전통적인 ‘검색 창’ 대신 생성형 AI가 적용된 챗봇 바드의 ‘대화 창’으로 검색 방식이 바뀐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과거의 구글 검색을 통한 정보 탐색의 길고 불편한 과정들이 대거 생략돼 버린다. 구글 검색은 사용자의 질문에 100개 이상의 문서를 보여주지만 구글 바드는 단 1개의 정답, 유사 답변까지 포함해도 단 3개만 보여준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편리해졌지만 검색 광고 매출이 57%인 구글이 어떻게 새로운 ‘대화 창’ 검색 방식에서 사업성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빠른 시일 내에 구글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이 흔들리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구글은 새로운 검색 서비스인 바드의 대화 창 때문에 기존의 검색 서비스인 검색 창의 매출이 줄어드는 ‘자기 시장 잠식(cannibalization)’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카니발 효과’라고도 불리는 자기 잠식 효과는 기업이 새롭게 출시한 제품이 매출 증대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주력 상품의 매출을 마이너스로 만드는 현상을 뜻한다.
다행인 건 아직 구글엔 시간이 남아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 기반의 챗봇이 결합된 검색 엔진인 MS의 빙과 구글의 바드는 둘 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따라서 지금 당장 기존의 검색 엔진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소비자들은 당분간 대화 창과 검색 창을 동시에 이용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구글에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투자자들은 구글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 시장 잠식 문제를 해결할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구글은 여전히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구글은 어떻게 챗봇 바드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모든 투자자들의 궁금증이기도 하다.
유럽의 반독점 규제와 부진한 구글 실적
구글의 검색 광고와 관련해 반독점행위를 규제하는 각국의 감시도 부담이다. 유럽연합(EU)은 2015년 이후 무려 네 차례나 구글의 불공정 행위를 문제 삼았다. EU 전체 검색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구글의 본사가 미국이라는 점은 규제 당국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미국이나 한국의 규제 당국도 구글의 독점 행태를 눈여겨보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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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사실 오픈AI의 챗GPT가 등장하기 전부터 위기였다. 알파벳(구글)의 2022년 전체 매출액은 339조원(2828억달러)으로 전년도의 309조원(2576억달러)보다 10% 증가했다. 외견상은 양호해 보이는 수치다. 하지만 실적을 자세히 뜯어보면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클라우드 분야만 37% 고성장했을 뿐이다. 그 외 구글 검색은 9%, 유튜브 광고는 1%, 구글 네트워크는 3%의 부진한 성장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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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구글)의 2022년도 영업이익은 90조원(748억달러)으로 전년도의 94조원(787억달러)보다 오히려 -5% 감소했다. 구글 서비스를 제외하면 클라우드 등 나머지 모든 분야에서 적자를 기록했다. 알파벳의 수익 대부분이 검색 광고 등에 집중돼 있는 점도 늘 지적돼 온 리스크 요인이다.
알파벳(구글)의 2023년 1분기 전체 실적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1분기 전체 매출액은 84조원(698억달러)으로 전년 동분기의 82조원(680억달러) 대비 고작 3% 증가에 그쳤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21조원(174억달러)으로 전년 동분기의 24조원(201억달러) 대비 무려 -13% 감소한 부진한 실적이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만년 적자였던 클라우드 부문의 영업이익이 사상 처음으로 2023년 1분기에 2400억원(2억달러)의 흑자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클라우드 사업에서만큼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전통적인 구글 검색 광고 매출이 바드로 인해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분간 검색 광고의 이익은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알파벳(구글)의 영업이익 전망은 향후에도 상당 기간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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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다각화가 ‘검색 위기’ 돌파의 열쇠
구글이 검색 위기를 돌파하려면 검색 광고에 치중돼 있는 사업을 다각화해야 한다. 다행히 구글은 사업 다각화에 유리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 구글 같은 플랫폼 기업에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바로 사용자 수다. 구글의 다양한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실제로 얼마나 될까. 구글은 정확한 사용자 수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를 통해 대략 추정해 보면 10억명 이상의 사용자 수를 가진 서비스가 무려 7개다.
구글 검색 30억명, 유튜브 20억명, 구글 맵 20억명, 안드로이드 30억명, 구글 크롬 27억명, 구글 번역 10억명, G메일 20억명 등 구글은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막대한 사용자 수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플랫폼(Platform)’이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기차정거장’이지만 현재는 이용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온라인 서비스를 통칭하는 의미로 쓰인다.
구글은 세계 최강의 플랫폼 기업이다. 이 막대한 사용자 수를 바탕으로 다양한 수익 모델을 만들어낼 잠재력이 있다. 세계인들의 일상은 구글과 함께 시작된다. 구글은 충성도 높은 사용자 수를 활용해 미래에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유튜브, 구글 번역, 구글 맵, 구글 플레이의 성장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 성장성이 높은 클라우드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더 높여야 한다. 이게 현재 위기에 처한 구글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한국 투자자, 구글 대신 마이크로소프트 승리에 베팅
한국 투자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알파벳(구글) 주식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2023년 4월 말 기준으로 마이크로소프트 투자금액은 2조9000억원, 알파벳(구글)은 클래스 A와 C의 투자금액을 합쳐 2조7000억원이다. 실제 미국에서 두 종목의 시가총액 격차는 2배에 가깝지만 한국인들의 투자금액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1위 테슬라, 2위 애플, 3위 엔비디아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상당한 금액을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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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최근 3개월간의 해외주식 순매수 현황이다. 한국 투자자들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순매수 순위는 4위인 데 비해 알파벳(구글)은 50위권 밖이다. 한국 투자자들은 최근의 생성형 인공지능 싸움에서 구글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에 훨씬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검색 시장 점유율은 3%에도 못 미친다. 챗GPT를 적용한 검색 엔진 빙의 점유율을 큰 폭으로 늘리지 못해도 크게 손해볼 게 없다는 뜻이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기존부터 유료 서비스였던 ‘마이크로소프트365’에 챗GPT의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해 성능을 고도화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성능 향상이 마무리된 후 유료 요금도 같이 인상하면 추가적인 이익은 고스란히 마이크로소프트에 쌓이게 된다.
하지만 구글 입장에서는 이미 독점하고 있던 검색 시장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또 바드를 통해 검색 시장을 방어한다 해도 상당 기간 검색 광고 수익이 줄어들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그래서 이번 인공지능 챗봇 전쟁은 애초부터 구글에 불리한 게임이다.
헤지펀드 선수들, 그럼에도 구글에 베팅하는 이유는?
인공지능 시장의 성장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보는 회사는 GPU를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엔비디아다. 올 들어 엔비디아는 170% 이상 폭등하며 챗GPT로 촉발된 인공지능 시장의 성장 과실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또 인공지능 시장의 주도권을 먼저 잡은 마이크로소프트도 올 들어 40%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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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엔비디아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집중 투자했던 한국 투자자들이 옳았다. 그런데도 미국 헤지펀드들은 엔비디아나 마이크로소프트 외에 구글(알파벳)에도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리틀 버핏’으로 불리는 빌 애크먼의 헤지펀드인 ‘퍼싱스퀘어 캐피털 매니지먼트’는 올해 1분기에 약 1조2800억원(10억6400만달러)의 알파벳(구글) 주식을 새로 매입했다.
레이 달리오가 이끄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도 같은 기간 약 2200억원(1억8000만달러)의 알파벳(구글) 주식을 매입했다. 헤지펀드의 전설로 불리는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운용하는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도 1100억원(9100만달러)의 알파벳 주식을 신규 매수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헤지 펀드들이 알파벳(구글) 주식을 매수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구글이 스스로 만들어낸 바드로 인해 기존 검색 광고 매출이 파괴되는 걸 감안하더라도 구글 자체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헤지펀드들 사이에서는 미래에 슈퍼 인공지능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구글의 AI 기술력을 얕봤다가 나중에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또 구글 서비스를 사용하는 전 세계의 막대한 사용자 수까지 감안하면 알파벳(구글) 주식에 베팅하는 헤지펀드들의 전략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알파벳(구글)의 지난 10년 5개월간의 주가 흐름을 살펴보면 검색 시장을 독점한 플랫폼 기업답게 10년 내내 꾸준히 상승해 왔다. 2012년 말에 18달러에 불과했던 알파벳의 주가는 10년 뒤인 2022년 2월에는 최고 151달러까지 치솟으며 8배 이상의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이후 실적 부진과 구글 챗봇 바드의 연이은 실수로 인해 올해 2월에는 84달러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다행히 5월의 구글 개발자회의 때 성능이 큰 폭으로 개선된 바드와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력을 선보이며 주가가 급반등해 120달러를 회복한 상태다.
챗GPT의 등장으로 구글의 ‘검색 창’이 위기에 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글과 연예인 걱정은 쓸데없다. 구글은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 개발과 수십억 명이 넘는 막대한 사용자 수를 활용한 사업 다각화로 대역전극을 노리고 있다. 아직도 구글의 인공지능 기술력에 불안감이 느껴진다면 왜 헤지펀드들이 여전히 알파벳(구글) 주식을 매집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2023년 07월호
구글, 챗GPT로 위기? "네이버가 더 위험하다"
구글, 한국·일본 시장 공략 진짜 목표는 네이버?
AI 번역, 세계 공용어 시대 앞당겨...한국 시장 장악 시간문제
‘딥엘’도 뛰어든 한국어 번역 시장...완벽할수록 네이버엔 악재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구글의 연례 개발자회의(구글I/O)가 열린 2023년 5월 11일 전 세계 투자자들은 모두 구글 CEO 순다르 피차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했다. 지난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됐던 발표에서 구글의 챗봇인 ‘바드’는 실수를 연발했다. 만약 이번 발표에서도 실수한다면 구글의 인공지능(AI) 기술력에 대한 실망감은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발표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행히 구글의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구글은 검색엔진, 이메일, 문서 등 25개 제품에 대거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는 물량 공세를 펼쳤다. 마이크로소프트(MS)에 기선을 제압당하며 체면을 구겼던 구글의 대반격이었다. 이를 통해 구글은 자사의 인공지능 기술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며 자신들이 인공지능의 원조 맛집임을 입증했다. 이에 주식시장도 화답했다.
구글(알파벳)의 주가는 주식시장의 부진으로 2023년 1월 초에 85달러까지 하락했다. 이후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주식들의 동반 반등에 힘입어 2월 초에는 107달러까지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의 검색엔진 ‘빙’에 챗GPT 기술을 적용한다고 발표한 지난 2월에 구글의 챗봇인 ‘바드’는 실수를 연발했다. 이에 충격받은 투자자들이 구글 주식을 투매하면서 주가는 한때 90달러까지 폭락했다.
다행히 절치부심한 구글이 3개월 뒤인 5월의 연례 개발자회의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빙보다 뛰어난 바드의 성능을 과시하자 투자자들은 안도했다. 연례 개발자회의 이후 구글(알파벳) 주식은 3일간 10% 이상 급반등하는 안도 랠리를 보여주며 120달러를 회복했다.
구글, MS 대신 네이버에 화풀이?
그런데 5월 연례회의 때 구글의 발표 중 한국 입장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AI 챗봇 ‘바드’는 이날부터 180여 개국에 모두 영어로 전면 공개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과 일본에서만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 순다르 피차이 CEO는 “한국과 일본은 최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거침이 없는 역동적인 국가로서 서구권에 비해 모바일 속도가 굉장히 앞서 있다”며 “바드의 언어를 지원하는 데 적격이었다”고 말했다.
또 1999년에 서울을 방문했던 경험을 설명하면서 “서울에서 택시를 탔을 때 택시기사가 휴대폰을 동시에 3대나 썼던 장면이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본심이 아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절대 우연은 없다. 모든 움직임에는 숨은 의도가 있다. 구글이 노리는 건 한국의 검색시장, 더 정확히는 네이버일 가능성이 크다.
5년 전인 2017년까지만 해도 한국 검색시장은 네이버의 독무대였다. 전 세계에서 구글이 진입하지 못한 3개 국가는 중국, 러시아, 한국이다. 한국이 이들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네이버 덕분이었다. 하지만 78.9%의 압도적 점유율을 자랑했던 네이버의 점유율은 5년 뒤인 2022년에 -16.1% 감소했다. 점유율이 60%대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검색점유율 2위였던 다음의 점유율도 지난 5년간 -4.6% 감소해 현재는 5.1%에 불과하다. 구글은 이미 2017년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확고한 검색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서만큼은 네이버의 기세에 눌려 9%에 불과한 한 자릿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꾸준히 점유율을 끌어올려 현재는 2017년보다 3배 증가한 31.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22.4%라는 괴물 같은 점유율 증가세다.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추세적으로 구글의 점유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네이버의 검색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근본 원인은 뭘까. 바로 검색품질 저하다. 네이버 검색은 점점 검색 본연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게 사용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블로그의 품질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도 요인 중 하나다. 요즘 네이버 블로그에는 광고 협찬 글이 많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검색 신뢰도가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반면 구글 검색은 이 틈새를 파고들며 지속적으로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런 중요하고 미묘한 시기에 구글은 자사의 인공지능 기술력을 모두 녹여낸 AI 챗봇 바드의 한국어 서비스를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영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다. 한국어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는 힌두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다 뛰어넘고 한국어 서비스를 먼저 선보이다니 파격적인 조치다.
실제 전 세계에서 한국어 사용자 수는 북한까지 합쳐도 8170만명으로 23위에 불과하다. 구글이 생뚱맞게도 전 세계 사용자 수 6억명이 넘는 힌두어나 5억명이 넘는 스페인어보다 한국어를 먼저 서비스하다니 뭔가 부자연스럽다. 구글의 이런 과감한 전략은 검색의 큰 틀이 바뀌는 과도기에 한국 시장을 전면적으로 공략해 검색시장 판을 뒤집어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다.
MS, 구글, 네이버의 자금력 차이는 넘사벽?
물론 네이버도 오래전부터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해 왔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한국 시장 공략에 대비해 이미 상당한 준비를 끝낸 상태다. 하지만 현재 생성형 인공지능 시장에서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같은 빅테크 기업과는 체급 차이가 너무도 크다. 인공지능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자금력과 데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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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2022년 말 기준 네이버의 시가총액은 고작 29조원에 불과하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시가총액은 네이버의 70배가 넘는 2145조원(1조7877억달러)다. 구글(알파벳)도 네이버의 50배에 가까운 1378조원(1조1484억달러)이다.
영업이익 격차도 현격하다. 네이버의 2022년 영업이익은 1조3000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영업이익은 70배가 넘는 100조원이다. 구글(알파벳)의 영업이익도 90조원이다. 자금력 부문에서 네이버는 MS와 구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런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네이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한국어 데이터다. 그간 한국 검색시장 진입에 구글이 어려움을 겪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은 바로 언어 장벽이었다. 지금처럼 기존의 검색시장 질서가 무너지고 신기술이 등장하는 시점에서도 네이버가 태연했던 것은 한국의 검색시장을 독점하며 그동안 충실하게 쌓아온 방대한 한국어 데이터 자산 덕분이었다.
이 데이터를 무기로 네이버도 호기롭게 초거대 AI 언어모델 개발에 뛰어들었다. 오픈AI의 GPT 4.0이나 구글의 람다(LaMDA)와 팜2(PaLM2)에 맞설 무기는 바로 ‘하이퍼클로바X’다. 네이버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진 않았지만 올여름 공개를 목표로 부지런히 준비 중이다.
이런 네이버의 초거대 언어모델에 대해 시장은 우려 반 기대 반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챗GPT 모델을 개발한 오픈AI는 상당한 규모의 적자를 보고 있다. 다행히 오픈AI 뒤에는 자금력이 넘쳐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 당연히 네이버도 상당한 수준의 하이퍼클로바X 개발비용을 감내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이버는 든든한 물주 없이 자체 자금만으로 개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AI 번역이 세계 공용어 시대 앞당겨
압도적인 자금력 차이 외에도 우려되는 건 오픈AI의 챗GPT나 구글 바드의 한국어 실력이 결코 낮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성능 개선에 영향을 미치는 건 한국어 데이터뿐만이 아니다. 사실 데이터는 크롤링(crawling, 인터넷상 정보를 자동으로 수집하는 작업)을 통해 긁어와도 된다. 인터넷에는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한국어 데이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빅테크 기업들의 초거대 언어모델은 데이터뿐 아니라 알고리즘, 최적화 기법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어 기반 생성형 인공지능의 기술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네이버가 믿고 있는 한국어 언어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네이버의 한국 검색시장 점유율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 수도 있다.
실제로 오픈AI의 챗GPT-4는 한국어 정확도가 80%에 육박할 정도로 성능이 개선되고 있다. 네이버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네이버의 사업모델은 검색 플랫폼 외에도 다양한다. 쇼핑(커머스), 핀테크, 콘텐츠, 클라우드 분야에서 각각 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쇼핑 기능을 대거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검색 플랫폼만큼 높은 매출을 보이고 있는 사업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이버의 국내 사업환경은 녹록지 않다. 정치권으로부터는 뉴스 배치의 편향성과 알고리즘 불공정성을 이유로 공격받고 있다. 언론사로부터는 헐값에 뉴스를 활용한다며 비난을 받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네이버의 뉴스 트래픽 자체가 감소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글로 된 ‘포털 뉴스’ 대신 구글의 유튜브를 활용한 ‘동영상 뉴스’ 소비가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네이버의 초거대 언어모델인 ‘하이퍼클로바X’와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인 ‘서치GPT’의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네이버는 서치GPT를 올해 7월에 선보일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네이버의 인공지능 기술력은 과연 투자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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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일본 시장 공략, 진짜 목표는 네이버?
구글은 이미 일본의 검색시장에서 점유율 73%를 차지하며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2위인 야후재팬의 점유율도 23%로 선전하고 있다. 또 야후의 검색점유율은 낮지만 포털사이트의 특성상 뉴스와 생활정보를 보기 위해 접속하는 사람도 많다. 따라서 실제 영향력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구글이 자신들의 야심작인 바드를 영어 외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우선 공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걸리적거리는 야후재팬을 완전히 눌러버리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 시장은 외견상 구글과 야후의 싸움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 싸움에도 네이버가 등장한다. 네이버는 야후재팬의 모회사인 일본의 Z홀딩스 지분을 약 50%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네이버는 한국에서 카카오가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석권할 때 속도전에서 밀렸다. 이후 대안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네이버 ‘라인(LINE)’의 일본 모바일 메신저 시장 점유율은 무려 85%다. 한국 인구 수보다 많은 9500만명의 활성사용자수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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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상장된 Z홀딩스의 주가를 살펴보면 2021년 초에는 614엔을 기록했다. 이후 Z홀딩스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2021년 11월에는 818엔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3년 5월 현재는 353엔까지 폭락해 최고점 대비 -57%의 부진한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네이버는 몇 년 전부터 일본 내의 광고, 커머스, 핀테크 사업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의 자회사인 일본 1위 포털 사업자 야후재팬과 광고, 커머스, 핀테크 등 대부분의 사업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치열한 경쟁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양 회사 간에는 극적인 타협이 이뤄졌다.
결국 네이버의 관계사인 라인과 야후재팬을 가지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Z홀딩스가 2021년 3월에 5 대 5의 지분으로 경영통합을 진행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네이버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됐다. 또 ‘Z홀딩스’라는 어려운 이름은 2023년 10월부터 직관적으로 더 기억하기 쉽게 LINE과 YAHOO의 상표를 활용한 ‘라인야후(LY Corporation)’로 변경된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구글의 새로운 인공지능 챗봇 바드가 한국어 시장과 일본어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는 모양새는 예사롭지 않다. 한국 투자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챗GPT를 앞세워 빙 검색엔진으로 치고나오자 ‘구글 검색’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마디로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걱정해야 할 것은 ‘네이버 검색’으로 보인다. 앞으로 구글이 한국 시장에서 검색점유율을 10%만 더 끌어올리면 40%를 돌파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네이버의 독주가 아닌 양강 체제로 경쟁 구도가 바뀐다.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 대화형 챗봇인 MS의 빙과 구글의 바드가 등장하면서 2023년 4월의 네이버 검색점유율은 60%마저 붕괴돼 50%대를 헤매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구글의 검색점유율은 진작에 30%를 뛰어넘은 후 40%를 향해 계속 질주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서비스에 활용이 가능하다. 인공지능 기술력이 뛰어난 구글은 이번 기회에 한국의 인공지능 생태계를 선점하겠다는 심산이다. 구글의 한국 시장 공략이 실제로 성공한다면 현재 한국 시장을 독식하고 있는 네이버의 타격이 제일 클 수밖에 없다. 또 일본 시장에도 공격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구글 바드의 기세로 볼 때 일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네이버의 전략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번역의 미래? 완벽해질수록 네이버엔 악재
번역과 통역 산업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세계 인구는 총 78억명이다. 이들 중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채 5억명도 되지 않는다. 영어를 공용어나 제2외국어로 사용하는 인구까지 다 합쳐도 15억명을 넘지 않는다. 전 세계 인구의 19%에 불과한 셈이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세계인들도 모두 온라인을 통해 소통하기를 원한다.
한국인은 영어 공부에 진심이다. 한국토익(TOEIC)위원회가 발표한 2022년 한국 평균 토익 점수는 675점(990점 만점)으로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매년 순위가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 든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영어 울렁증이 심하다. 일본은 더 심각하다. 일본의 평균 토익 점수는 561점으로 한국보다 114점이나 뒤져 있다. 그런데 전 세계인이 모두 영어를 공부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또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변역과 통역 서비스는 점점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면서 실시간 번역의 필요성이 급증했다. 번역 서비스는 온라인에서 세계인을 서로 연결해 주는 기본 도구다. 또 언어 장벽을 극복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번역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거대한 수요를 눈치챈 구글은 오래전부터 번역기술 개발에 올인해 왔다. 일반적인 번역을 넘어서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글자를 비추기만 해도 글자를 인식해 번역해 주는 기술까지 개발한 지 오래다.
번역은 당장 돈이 되는 서비스는 아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게 목적인 구글이 세계인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구글은 현재 133개 이상의 언어를 지원하고 있다. 경쟁사들은 실제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들 위주로 번역 서비스를 집중하는 데 비해 구글은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를 모두 번역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구글번역의 월간사용자수는 얼마나 될까. 스태티스타의 자료에 따르면 10억명 이상이다. 전 세계 시장점유율은 92%다. 구글의 번역기술은 여행, 사업, 학업, 온라인상의 대화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이런 구글번역의 핵심 기술력은 당연히 인공지능이다. 아직도 구글의 번역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경이적인 속도로 완벽해지고 있다. 역시 인공지능 덕분이다.
한국어 번역시장은 원래 구글번역과 네이버 파파고의 양강 구도였다. 하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새로운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 기업인 ‘딥엘(DeepL)’이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기술력을 끌어올린 딥엘 번역을 사용해본 사용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구글번역이나 네이버 파파고보다 자연스럽고 완벽한 번역기술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딥엘 창업자인 야렉 쿠틸로브스키는 2023년 5월 한국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8월부터 기업고객을 위한 유료 번역 서비스인 ‘딥엘 프로’를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은 10년 내에 딥엘의 5대 시장 중 한 곳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구글과 딥엘의 연속적인 한국어 번역시장 공략이 시시하는 바는 크다.
한국 시장이 그만큼 돈이 되는 시장이라는 방증이다. 만약 언젠가 구글번역이 완벽해진다면 한국어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장점으로 한국 시장을 지켜내고 있는 네이버엔 득이 될까, 아니면 실이 될까. 이런 측면으로 볼 때 이번 구글 바드의 한국 시장 대공세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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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식시장에서 네이버의 주가는 코로나19의 수혜로 2021년 7월 46만5000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기대치가 크게 낮아졌다. 결국 주가는 큰 폭의 조정을 받아 2023년 5월에는 20만5000원까지 낮아진 상태다. 최고점 대비 하락률이 무려 -56%다. 그런데 엄청난 낙폭에도 불구하고 주가 반등은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그동안 한국 고유의 언어인 한국어는 한국 시장을 방어하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번역기술의 발달로 그 견고한 성이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 네이버에 방대한 한국어 데이터는 늘 자랑이었다. 투자자들은 모두 네이버의 초거대 언어모델인 하이퍼클로바X와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인 서치GPT의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2023년 7월 출시가 예정된 서치GPT가 막대한 한국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의 성능을 보일지에 따라 네이버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
이제 곧 기존의 ‘검색창’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대화창’으로 바뀌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쏘아올린 챗GPT 혁명. 네이버는 이 거대한 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볼 때 구글보다 네이버가 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의 ‘데이터 주권’이 걸려 있는 구글과 네이버의 싸움. 네이버의 선전을 기원한다.

2023년 07월호
폭발적 성장 유튜브 아성…'숏폼' 틱톡 도전에 흔들리나
구독자 수 1위 유튜브 채널, 한국 인구의 5배
외국인들 K팝에 ‘흠뻑’...블랙핑크 구독자 수도 1억명
중국 기업 틱톡, 숏폼만으로 유튜브 3분의 1 매출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취향에 변화를 만들어낸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20년 이상 웹 시장의 중심에 서 있던 ‘글’이 최근 들어 홀대받고 있다. 다 유튜브 때문이다. 이제 ‘글’은 서서히 ‘영상’에 그 권력을 넘기고 있다. 요즘 젊은 층은 정보를 습득할 때 글보다 영상을 선호하는 비중이 확연히 높아졌다. 검색도 글보다 영상이다. 이런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 데 앞장선 건 단연 구글의 유튜브다.
구독자 수 1위 유튜브 채널, 한국 인구의 5배 육박
전 세계 유튜브 구독자 수 상위 10개의 순위를 살펴보면 결과가 흥미롭다. 구독자 수 1위는 인도의 음악 채널인 ‘T-시리즈’가 차지했는데 전체 구독자가 무려 2억4100만명이다. 한국 전체 인구의 5배에 육박한다. 전 세계 1위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인 넷플릭스의 유료구독자 수 2억3250만명(2023년 3월 말)보다도 많다. 물론 넷플릭스는 1개의 계정을 여러 명이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놀라운 변화다.
전 세계 유튜브 구독자 수 2위는 미국의 아동 교육 채널인 ‘코코멜론’이 차지했다. 구독자는 1억5800만명이다. 전 세계 2위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인 ‘디즈니플러스’를 근소하게 앞서는 놀라운 수치다. 디즈니플러스의 구독자 수는 1억5780만명(2023년 3월 말)이다.
전 세계에서 1억명이 넘는 구독자 수를 가지고 있는 유튜브 채널이 무려 7개나 되다니 격세지감이다. 과거처럼 국가별 방송사 방식으로 운영될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제 방송국의 역할을 유튜브가 하고 있는 꼴이다. 이렇게 전 세계인을 거대한 동영상 플랫폼으로 연결한 유튜브를 보유한 구글은 경이로운 회사다.
유튜브 구독자 수 상위 10개 순위를 국가별로 정리해 보면 미국 채널이 4개, 인도 채널이 3개다. 그 외 스웨덴, 우크라이나, 러시아 채널이 각각 1개씩 진입해 있다. 인구대국 인도의 저력이 느껴진다. 상위 10개 채널이 모두 한국의 전체 인구 수보다 많은 구독자 수를 보유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블랙핑크 구독자 1억 육박...K팝에 미친(?) 외국인들
그렇다면 한국 상황은 어떨까. 한국의 유튜브 구독자 수 상위 10개 순위를 확인해 보면 K팝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1위인 블랙핑크 채널은 8830만명으로 조만간 1억명을 넘길 기세다. 2위인 방탄소년단(BTS) 채널은 7470만명이다. 3위인 하이브 채널은 7060만명으로 방탄소년단의 소속사라는 게 특징이다. 4위는 SM, 7위는 JYP, 10위는 원더케이다.
상위 10개 채널 중 무려 6개가 한국의 자랑인 K팝과 관련이 있다. 유튜브 구독자 수를 통해서도 K팝의 높은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9위를 차지한 원밀리언은 성격이 약간 다르지만 역시 음악·댄스 장르다. 한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연예기획사들은 빠짐없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외 웬만한 기업들도 다 유튜브를 운영한다. 이제 기업들 입장에서도 유튜브를 통한 홍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이렇게 분석해 보니 유튜브는 개인보다 기업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한국에서 구독자 수 상위 10위권에 3개나 진입한 키즈 장르의 경우 개인으로 시작해 규모를 키워 법인으로 전환한 경우도 흔하다.
키즈 장르로 당당히 구독자 수 5위에 올라선 ‘도나(DONA)’ 채널은 3140만명의 구독자를 기록 중이다. 키즈와 먹방을 섞은 게 특징이다. 6위인 보람튜브 브이로그(Boram Tube vlog)도 3020만명의 구독자를 자랑한다. 보람튜브는 유튜브로 큰돈을 벌어 빌딩을 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새로운 동영상은 올리지 않고 있다. 7위에 랭크된 ‘토이푸딩’은 실제 사람 대신 애니메이션이나 인형들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10위 안에는 못 들었지만 또 유명한 장르로는 ASMR과 먹방이 있다. 먹방과 ASMR을 섞어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제인’ 채널의 구독자 수는 1760만명이다. 제인은 얼굴 노출 없이 입만 보이는 먹방을 찍는 게 특징이다. 주로 젤리, 초콜릿, 마카롱 등 생김새가 화려한 음식들로 먹방을 찍는다. ‘홍유’도 먹방 ASMR 장르다. 제인과 비슷하게 얼굴 노출 없이 입만 보이는 먹방이다.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이란 자율, 감각, 쾌감, 반응의 줄임말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쾌감을 느껴 심리적 안정감과 즐거운 기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유튜브는 K팝과 키즈, 먹방이 대세다. 이런 장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언어장벽이 없다. 그래서 전 세계인들을 타깃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인구 수인 5200만명을 뛰어넘는 한국 채널들이 3개나 탄생할 수 있었다. 유튜브 구독자 수가 1000만명을 넘어가면 웬만한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다. 유튜브가 새로운 고소득 직업군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렇다면 유튜브 슈퍼스타의 연간 수익은 얼마나 될까. 유튜브 수익 규모가 가장 컸던 창작자(크리에이터)는 전 세계 구독자 수 4위에 랭크된 ‘미스터비스트’다. 현실판 오징어게임을 진행한 채널로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채널의 2022년 수익금은 무려 7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이유는 창작자와 유튜브가 광고 수익을 55 대 45로 나눠 가지는 구조 때문이다. 즉, 창작자는 광고로 생성된 수익의 55%를, 유튜브는 45%를 가져가는 구조다. 초등학생 희망직업군에서 크리에이터(유튜버 등)가 의사를 제치고 3위까지 급상승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월 100만원도 가져가지 못하는 가난한 유튜버들이 수두룩한 게 현실이다.
글로벌 방송국 유튜브를 16년 전에 알아본 구글
유튜브는 엔터테인먼트의 정의를 완전히 뒤바꿨다. 전통적인 음악이나 영화 장르 외에도 뷰티, 먹방, 게임 해설, 상품 후기까지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콘텐츠들이 더 인기를 끈다. 이제껏 국가 간 장벽에 막혔던 다른 나라들의 미디어를 유튜브 덕분에 안방에서 편안하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세계는 더욱 평평해졌다.
반대로 한낱 소비자에 불과했던 일반 대중이 제작자가 되는 세상이 됐다. 자신이 직접 만든 독창적인 동영상을 몇 번의 클릭만으로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배포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드라마감독, 영화감독, PD 등 전문가만 할 수 있던 동영상 제작을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가능하게 만든 것 또한 유튜브다.
전 세계 기업들의 새로운 고민은 어떻게 ‘소비자의 시간’을 가장 많이 점유할 수 있는가다. 광고주, 방송사, 기업, 앱 개발자 모두 소비자의 관심을 얻고 그들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과거에는 TV가 핵심이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을 통한 영상 시청이 핵심이다. 영상 시청은 인간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 중 가장 인기가 높다.
한국인들의 유튜브 사용시간은 얼마나 될까. 모바일 인덱스 분석 결과 2022년 9월 기준 유튜브 앱 사용자 수는 4183만명으로 조사됐다. 한국 전체 인구 5163만명 중 무려 81%가 사용한다는 뜻이다. 1인당 월평균 사용시간은 32.9시간이다. 매일 최소 1시간 이상 유튜브를 본다니 어마어마하다. 월간 총 사용시간도 유튜브가 13억8000만 시간인 데 비해 2위인 인스타그램은 1억7000만 시간, 3위인 넷플릭스는 1억 시간에 그쳐 압도적인 격차를 보였다.
이런 유튜브 열풍은 한국만의 특이한 상황일까. 한국이 좀 심한 편이긴 하지만 글로벌로 범위를 넓혀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터 에이아이(data.ai)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기준 전 세계 유튜브 사용자 월평균 사용 시간(중국 제외)은 23.2시간이었다. 한국 평균보다 9.7시간이 적다. 그래도 일평균 약 46분씩 유튜브를 시청하는 꼴이다. 웬만한 SNS 중 사용시간이 가장 길다. 유튜브의 월간 사용자 수(MAU)는 20억~23억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월간 사용자 중 실제로 유튜브를 유료로 이용하는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자 수는 얼마나 될까. 약 8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유튜브 월간 사용자 수의 4% 미만이다. 대신 유튜브는 무료 사용자들에게도 광고를 통해 수익을 내고 있다. 유튜브 프리미엄과 연동되는 유튜브 뮤직의 사용자 수도 5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음악앱 1위 자리를 놓고 ‘멜론’과 ‘유튜브 뮤직’이 지금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요즘 시대에는 언제 어디서나 동영상을 플레이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인터넷 서비스 초창기만 해도 제한된 속도 때문에 영상파일을 어디서나 플레이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16년 전인 2006년에 지금의 미래를 예견했던 ‘구글 신’만 빼고 말이다. 인터넷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질 걸로 예상한 구글은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인 2조원(16억5000만달러)에 유튜브를 전격 인수했다.
당시 시장에서의 유튜브 가치 평가는 1조2000억원(10억달러)이었으니 무려 8000억원을 더 베팅한 꼴이다. 하지만 이 베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구글은 유튜브 인수로 엄청난 이득을 봤다. 지금 유튜브 없는 구글은 상상할 수도 없다. 구글 검색과 유튜브가 연동되면서 서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숏폼 전성시대 일군 틱톡, 구글과 메타의 반격
이런 유튜브에 도전장을 낸 회사가 있다. 바로 중국 바이트댄스가 만들어낸 ‘틱톡’이다. 틱톡은 ‘숏폼 콘텐츠’라는 새로운 장르로 유튜브의 빈틈을 공략했다. 숏폼 콘텐츠란 15~60초 이하의 짧은 동영상 콘텐츠를 뜻한다. 날이 갈수록 더 짧아지기만 하는 현대인의 집중력에 착안한 틱톡만의 차별화된 콘텐츠였다. 중국 내 서비스는 2016년, 글로벌 서비스는 2018년에 공개됐다.
이 15~60초 이하 동영상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틱톡의 서비스가 나온 이후 불과 1년 만에 전 세계 이용자 수가 1억명을 돌파했다. 동영상에 익숙한 10~20대들의 취향 공략에 성공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MZ(밀레니얼+Z세대, 1981~2010년생)세대에게 틱톡 같은 숏폼 콘텐츠 시청은 대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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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 콘텐츠의 강점은 시청자들에게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짧은 동영상이 끝나면 끊임없이 다음 영상을 연이어 추천한다. 짧은 시간에 승부를 봐야 하는 특성상 영상 자체가 유튜브보다 더 자극적인 경우가 많다. 선정성을 무기로 한 숏폼도 상당수다. 또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유지하기 위해 중간광고를 포기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시청자들의 시간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유튜브를 모방했지만 더 짧은 시간으로 승부를 거는 틱톡으로 인해 동영상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대신 시장은 그만큼 더 확대됐다. 이제 사람들은 글 대신 동영상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초등학생도 동영상 제작자가 돼 자신의 동영상을 전 세계에 배포하고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기까지 하는 좋은 세상이 됐다.
틱톡의 1인당 월평균 사용시간은 얼마나 될까. 데이터 에이아이(data.ai)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틱톡의 1인당 월평균 사용시간(중국 제외)은 23.6시간으로 같은 기간 유튜브 월평균 사용시간(23.2시간)을 제쳤다. 틱톡의 기세가 엄청나다.
틱톡의 대공세에 유튜브보다 메타(페이스북)가 먼저 대응을 시작했다. 글과 사진을 올리는 SNS인 페이스북으로 재미를 본 메타는 감각적인 사진 SNS인 인스타그램을 인수하며 다시 한 번 대박을 쳤다. 하지만 동영상 시대로 넘어오면서 유튜브와 틱톡에 기선을 빼앗겼다. 이런 아픔 때문에 이번만큼은 매우 빠르게 대응해 2020년 8월 틱톡의 숏폼 콘텐츠를 모방한 ‘릴스’를 선보였다.
이후 유튜브도 대응을 시작했다. 릴스보다 1년 늦은 2021년 7월에 ‘쇼츠’를 정식 출시하고 서비스를 개시했다. 현재 유튜브 쇼츠의 월간 사용자 수는 15억명 이상, 틱톡은 16억명 이상, 메타(페이스북) 릴스는 10억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유튜브 쇼츠가 가장 늦게 대응했음에도 많은 월간 사용자 수를 확보한 이유가 뭘까.
숏폼 콘텐츠 가운데 최초로 광고 수익을 크리에이터들에게 제대로 배분하는 화끈한 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다. 쇼츠는 2023년 2월부터 크리에이터들에게 광고 수익의 45%를 배분했다. 롱폼 동영상의 55% 배분비율보다는 작지만 경쟁사들의 수익 배분이 상당히 미미한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치다. 이 정책으로 경쟁 플랫폼인 틱톡과 릴스에서 활동 중인 ‘숏폼 크리에이터’ 중 상당수가 유튜브 쇼츠로의 이동을 고민하고 있다.
유튜브 쇼츠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유튜브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더 많이 생성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다. 유튜브 쇼츠는 원본이 아닌 동영상이나 다른 플랫폼에 이미 업로드한 동영상을 다시 쇼츠에 올리는 것은 수익 산정 조건에서 제외된다고 공지했다. 이런 정책으로 오리지널 원본 영상을 쇼츠에 올리는 크리에이터들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수익에 진심인 크리에이터들을 유치할 수 있는 영리한 전략이다.
틱톡, 숏폼만으로 유튜브 3분의 1까지 성장
지난 몇 년간 유튜브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렇다면 구글의 전체 매출액 중 유튜브 광고 매출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의외로 생각보다 높지 않다. 2022년 구글 전체 매출액은 309조원(2576억달러)이다. 이 중 유튜브 광고 매출은 35조원(292억달러)으로 11%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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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요즘 대세로 떠오르는 틱톡과 유튜브의 매출 격차는 얼마나 될까. 이들 채널의 매출액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수치가 눈에 띈다. 먼저 유튜브의 매출액은 2020년 24조원(198억달러)이었지만 2022년에는 35조원(292억달러)으로 11조원 증가했다. 2년간 성장률은 47%다. 반면 틱톡의 2020년 매출액은 3조원(26억달러)에 불과했지만 2022년에는 11조원(94억달러)으로 무려 8조원 증가했다. 2년간 틱톡의 매출 성장률은 262%로 유튜브 매출 성장률의 5배가 넘는다.
기간을 최근 1년으로 줄이면 수치는 더 극적으로 변한다. 유튜브는 2021년 대비 2022년 매출액 증가율이 고작 1%대에 불과하다. 거의 정체 수준이다. 반면 틱톡은 지난 1년간 딱 100% 성장했다. 1년 만에 매출액이 2배 급증한 셈이다. 유튜브가 숏폼 시장에 부랴부랴 뛰어든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런 틱톡의 급성장으로 2020년에는 유튜브 대비 틱톡의 매출 비중은 13%에 그쳤지만 2022년에는 무려 32%까지 올라왔다. 숏폼 위주의 틱톡이 동영상 길이가 긴 롱폼과 숏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튜브의 3분의 1까지 성장했다는 뜻이다.
세계적으로 롱폼 대신 숏폼 동영상이 정말 대세인 걸까. 크리에이터 전문 업체 콜랩아시아의 쇼츠 분석 결과도 흥미롭다. 콜랩아시아는 쇼츠 활성화 이전(2020년 9월~2021년 6월) 대비 활성화 이후(2021년 7월~2023년 1월)에 평균 영상 시청시간이 2분에서 1분으로 줄었다고 분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채널별 시청시간은 2.3배 증가했다. 또 10분 길이의 유튜브 영상 1편을 보는 것보다 60초 분량의 쇼츠를 10번 이상 보는 빈도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취향이 롱폼에서 숏폼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유튜브와 반대로 틱톡은 이제 전략을 바꿔 동영상 길이를 늘리고 있다. 유튜브가 롱폼 위주에서 틱톡에 대응하기 위해 15~60초 분량의 숏폼 시장에 진입한 것과 같은 논리다. 유튜브의 롱폼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틱톡은 최대 3분으로 제한했던 동영상의 길이를 최대 10분까지 허용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구글의 유튜브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틱톡, 美 정부는 퇴출 원해...반사이익 기대하는 구글
틱톡의 월간 사용자 수는 약 16억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용자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틱톡 사용자 수는 1억5000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틱톡의 사용자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중국을 극혐하는 미국 정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미·중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기업이 만든 영상 플랫폼’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부감은 상당하다. 이미 미국 의회는 틱톡 사용 금지법을 발의한 상태다.
미국 정보기관은 틱톡이 미국인들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해 중국 정부에 넘긴다고 의심하고 있다. 틱톡 외에도 모든 SNS 앱은 데이터를 수집하지만 틱톡은 중국 회사가 보유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일종의 중국 ‘스파이 앱’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심증일 뿐이다. 실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명백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또 1억5000만명이 넘는 미국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틱톡을 금지하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1조를 위반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위헌 논란 때문에 실제로 틱톡이 미국에서 금지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는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에 퇴출을 감내하든가, 틱톡 미국 사업을 매각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틱톡을 퇴출시킨다면 그 방식은 구글의 ‘구글플레이’나 애플의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를 막는 방식이 될 것이다.
미국 Z세대들의 의견은 어떨까. 틱톡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우려하면서도 전면 금지에는 반대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 3월 미국의 여론조사 업체 소셜스피어는 틱톡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 미국에서 틱톡 사용을 금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설문응답자의 과반이 넘는 53%가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찬성은 34%에 그쳤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에서 실제 틱톡이 퇴출되기는 어렵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설문조사 결과다.
미국과 달리 틱톡을 실제 퇴출시킨 나라도 있다. 바로 인도다. 중국과 사이가 안 좋은 인도는 2021년에 국가 안보를 둘러싼 우려를 이유로 틱톡을 포함한 200개 이상의 중국 앱 사용을 금지했다. 이 당시 인도의 틱톡 사용자 수는 2억명이 넘었지만 인도 정부의 조치는 단호했다.
인도의 일부 크리에이터들은 슬퍼했지만 사용자들은 틱톡을 대체할 수 있는 유튜브 쇼츠나 메타의 릴스로 빠르게 갈아탔다. 오히려 미국 기업들은 수혜를 본 셈이다. 만에 하나 미국에서 틱톡이 정말로 퇴출된다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까. 당연히 쇼츠와 릴스가 될 것이다. 구글과 메타는 미국 정부가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유튜브의 아성에 도전한 틱톡에 대응하기 위해 유튜브도 쇼츠를 출시하는 등 기존의 동영상 전략에 많은 변화를 줬다. 다행스러운 건 틱톡의 도전에 대한 유튜브의 대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트브는 기존 롱폼 시장 외에 새롭게 생겨난 숏폼 시장에서도 쇼츠를 통해 잘 방어해 나가고 있다. 또 미국 정부의 입장도 유튜브에는 유리하다. 전 세계 모든 소비자들은 여전히 유튜브의 생태계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틱톡의 급성장은 경이롭지만 유튜브 역시 앞으로 상당 기간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알파벳(구글)의 전체 매출에서 유튜브의 매출 비중은 아직 11%인 35조원(292억달러)에 불과하다. 향후 유튜브는 MS ‘빙’의 공격으로 힘겨워하는 ‘구글 검색’ 부문의 무거운 짐을 나눠 갖기 위해 매출을 더 큰 폭으로 늘리는 게 지상과제다.

2023년 06월호
[진격의 MS] MS, 연속 대형 M&A로 시총 1위 애플 잡는다
올해 한국 투자자 MS 매수 급증
‘링크드인’ 인수 핵심은 사용자 수
‘깃 허브’ 인수로 개발자 기술도 싹쓸이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한국인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MS)는 어떤 이미지일까. 과거 윈도우와 MS오피스 시리즈로 IT 시장을 독점했던 제왕의 이미지도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은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엔비디아, 테슬라 등 강력한 신흥 IT 강자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이렇게 역동적인 IT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큰 실수를 했다. PC 시장 운영체제(OS) 독점에 취해 2007년의 스마트폰 출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뺏기며 굴뚝기업(전통산업) 이미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 진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동안 안정적으로 성장해 왔다. 워낙 강력한 윈도우와 MS오피스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매출과 배당이 꾸준했다. 주식 투자자 입장에서는 큰 불만이 없는 회사였다. 또 2014년부터 구세주인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가 회사를 이끌면서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저를 통해 화려하게 제2의 도약을 이뤄냈다.
그런데 조용한 주식이라는 평가를 받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최근 주식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오픈AI의 챗GPT 관련 뉴스 덕분이다. 안정적인 성장과 배당을 노리는 투자자들이 선호하던 마이크로소프트였다. 하지만 이제는 인공지능의 발전 가능성을 확신하는 성장주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뜨거운 주식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빌 게이츠와 사티아 나델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소프트웨어인 MS-DOS를 판매해 떼돈을 벌었던 천재적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이미 오래전에 은퇴했다. 이제 빌 게이츠는 MS의 실적발표장에서는 볼 수 없다. 대신 환경이나 전염병 등 인류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다. 그는 또 농지 투자의 끝판왕이기도 하다. 미국 농지 중 상당량을 빌 게이츠가 보유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 식량에 대한 걱정도 남다르다.
이렇게 걱정이 많은 빌 게이츠지만 본인이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은 도대체 볼 수가 없다. 전혀 걱정이 없어 보인다. 돈에 진심인 빌 게이츠는 어찌 이리도 마음 편하게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든든한 후임 CEO인 사티아 나델라 덕분이다.
사티아 나델라는 인도 출신의 클라우드 전문가다. 클라우드 애저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약을 이뤄낸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CEO를 맡은 뒤 마이크로소프트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사티아 나델라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다시 1위 회사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런 제3의 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검색 시장, 게임 시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밀한 전략을 통해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빌 게이츠의 성공적인 은퇴생활은 미국의 다른 빅테크 기업 창업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도 그를 모방해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 후 편안하게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브린과 페이지는 둘 다 73년생이라 이제 고작 50살인데 이미 2019년에 은퇴했다.
그만큼 구글의 후임 CEO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점이 고려된 듯하다. 구글의 현재 CEO인 순다르 피차이도 그동안 구글을 잘 이끌어 왔다. 하지만 최근 3000억원의 높은 연봉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애플의 경우 CEO의 은퇴가 아니라 불세출의 천재 스티브 잡스의 사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팀 쿡이 CEO를 물려받았다. 팀 쿡 역시 눈부시게 높은 성과를 기록 중이다.
“마소를 샀으면 팔지 마소”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투자자들의 이미지는 믿음 그 자체다. 격동의 미국 주식 시장에서 일시적으로는 시가총액 순위 10위까지 밀려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간 동안 1위와 2위를 넘나들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또 어김없이 지급되는 배당금도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투자자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난 10년간 주가 차트는 경이롭다. 2012년 말 22달러였던 주가는 작년에 큰 폭의 조정을 거쳤음에도 2023년 4월 말에는 300달러를 돌파했다. 10년간 13배가 넘게 오른 셈이다. 오죽하면 한국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마소를 샀으면 팔지 마소”라는 농담까지 나왔을까. 또 마이크로소프트 주가가 -20% 이상 조정받았다면 절호의 매수 기회라는 의견도 많다. 과거 주가를 살펴보면 대부분 -20% 조정 후 반등했던 경험 때문이다.
과거 마이크로소프트의 주력 매출은 윈도우와 MS오피스 시리즈(엑셀, 파워포인트, 워드)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PC 시대가 끝나면서 이런 주력 모델의 매출 성장률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 진입에 실패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내놓은 모델이 바로 오피스365(현 마이크로소프트365)였다.
오피스365는 대표적인 구독형 모델로 정체된 마이크로소프트 매출을 증대시켜 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저’다. 이 회심의 역작인 애저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고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배당주냐 성장주냐... MS의 정체는?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의 시가 배당률은 연간 0.8~1% 내외 수준이다. 다른 배당주들과 비교하면 높은 배당수익률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당당하게 배당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첫 번째 이유는 회사 이익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실 시가 배당률이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낮은 이유가 꼭 마이크로소프트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매 분기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현금흐름이 소중한 은퇴자들 사이에서 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은 인기가 많다. 그리고 매년 배당금을 올려주고 있다. 2022년 12월 8일에도 기존 0.62달러에서 0.68달러로 10%포인트 배당금을 인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배당률이 높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가 매년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2022년도에 시가 배당률이 오랜만에 1%를 넘긴 이유 역시 2022년도에 주가가 부진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다. 배당금은 더 증가하는데 주가 상승으로 인해 시가 배당률이 낮아지는 현상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잘못이 아니다. 그만큼 투자자들의 선호도가 높고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 주주들 중에는 공격적인 성향보다 어느 정도 보장된 성장성과 꾸준한 배당금에 매료돼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투자자들이 다른 종목보다 많은 편이다. 기관투자자들 사이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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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투자자 MS 매수 급증
미국 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 주식은 애플이다. 2위는 마이크로소프트이고 테슬라는 5위권 밖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미국 주식 선호도는 미국 시가총액 순위와 크게 다르다. 한국인들이 보유 중인 미국 주식 1위는 압도적인 격차로 테슬라다. 보유금액이 무려 14조1000억원이다. 2위를 기록한 애플의 6조1000억원보다 무려 8조원이 많은 수치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5위를 기록해 실제 미국에서의 시가총액 순위보다는 훨씬 인기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2023년 1분기부터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챗GPT를 자사의 검색엔진 ‘빙’이나 ‘마이크로소프트365’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상태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매수금액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최근 한국인들의 해외주식 투자 트렌드는 3배 레버리지의 전성시대다. 그래서 1분기에 해외주식 순매수 1위를 기록한 종목은 20년 이상의 미국 국채에 3배 레버리지로 투자하는 ‘디렉시온 데일리 만기 20년 이상 국채 불 3배 ETF’다. 순매수 3위도 나스닥 지수에 3배 레버리지로 투자하는 ‘프로셰어즈 울트라프로 QQQ ETF’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테슬라는 당당히 순매수 금액 2위를 차지하며 여전히 한국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의외로 한동안 인기가 없었던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도 1분기에만 무려 2130억원의 자금이 몰리며 순매수 4위를 기록했다. 챗GPT의 나비 효과로 마이크로소프트도 새롭게 한국인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M&A에 진심인 나델라의 큰 그림은?
빅테크 회사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어떤 부분을 확인해 봐야 할까. 바로 해당 회사의 실제 인수합병(M&A) 리스트를 살펴보면 된다. M&A에는 막대한 돈이 투자된다. 회사가 막대한 현금을 들여 진행하는 M&A라는 중대 의사결정을 대충 하는 경우도 있을까. 규모가 큰 M&A일수록 인수 회사의 진심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앞으로의 회사 방향성을 알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과연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욕심 많은 CEO 사티아 나델라는 2014년에 취임한 후 다양하고 굵직한 인수합병을 진행해 왔다. 그가 취임한 뒤 진행된 대형 M&A만 살펴봐도 무려 7건이다. 그중 대표적인 기업들을 살펴보자. 링크드인,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 깃 허브 등 해외 기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 들어보는 회사들도 즐비하다.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력이 뛰어난 오픈AI의 경우 M&A는 아니지만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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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가 인수한 회사들의 현재 실적은 대부분 양호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몇 년간 M&A 전략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M&A 리스트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역시 게임 회사들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에 스웨덴 게임 회사 모장을 3조원(25억달러)에 인수했다. 2020년에는 게임 회사 제니맥스 미디어를 9조원(75억달러)에 인수했다.
그리고 2022년에는 무려 82조원(687억달러)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게임 회사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했다. 게임 회사 인수에 투자되는 자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MS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 건은 미국, 유럽, 영국, 중국 등에서 독과점 심사를 진행 중이라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 인수 무산 가능성도 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 세계 각국 반발
과거에 사티아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임에 올인하는 기업”이라고 발언하며 게임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의 말은 진심일까. 마이크로소프트의 그간 게임 시장에 대한 움직임을 관찰해 보면 진심임을 알 수 있다. 사티아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 사상 최대 규모의 M&A로 주목받은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왜 그렇게도 거금을 주고서라도 인수하고 싶어 하는 걸까.
게임은 크게 PC 게임, 콘솔 게임, 모바일 게임으로 분류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구독형 게임 서비스인 ‘X박스 게임 패스’는 월 7900원으로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모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판 넷플릭스인 셈이다. 당연히 구독형 서비스의 핵심은 게임 콘텐츠 확보다. 하지만 그동안은 욕심만큼 킬러 게임을 확보하지 못해 왔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에 진심이듯이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게임 콘텐츠 확보에 진심이다.
그런데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손에 넣게 되면 콘솔 게임에서는 단숨에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액티비전의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손에 넣게 된다. PC 게임에서는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시리즈’,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워 크래프트 시리즈’, ‘오버워치’ 등 한국에서도 유명한 막강한 게임 IP를 가져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미약한 모바일 게임 부문에서도 킹의 ‘캔디 크러쉬’를 확보해 단숨에 엄청난 사용자 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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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비전 블리자드의 2022년 실적을 살펴보면 매출액은 9조7000억원(81억달러), 영업이익은 3조7000억원(31억달러)이다. 양호한 편이지만 인상적이진 않다. 이미 마이크로소프트의 연간 영업이익이 100조원이 넘는 상황에서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겸손한 3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이 중요한 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콕 찍은 이유는 실적 때문이 아니다. 월간 사용자 수가 더 중요했다.
2022년 말 기준 액티비전의 월간 활성사용자 수는 1억1100만명, 블리자드는 4500만명, 킹은 2억3300만명이다. 다 합치면 무려 3억8900만명의 압도적인 사용자 수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2022년 기준 X박스 게임패스 구독자 수는 2500만명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번 인수합병이 성공한다면 그 상승작용으로 ‘X박스’의 구독자 수까지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한국은 PC로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콘솔을 통해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이 콘솔 게임의 양대 산맥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인수한 후 콘솔 게임의 넘버 원인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다른 콘솔 회사에는 제공하지 않고 독점해 버리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사용자 수는 급감할 수 있다. 이번 인수합병에 대한 일본 소니의 저항이 격렬한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반독점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향후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 후에도 다른 콘솔 회사들에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10년 이상 판매를 보장하는 당근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MS를 제외한 그 어떤 회사도 MS가 실제로 액티비전 블리자드를 손에 넣는 걸 바라지 않는다. 이는 각국의 반독점 감독기관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3년 4월 26일(현지시간) 영국의 경쟁시장국(CMA)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가 게임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것이라며 M&A 승인 거부를 발표했다. MS가 이번 합병으로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 시장에서 더욱 강력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이 승인 거부의 이유였다. MS는 강력히 반발하며 소송을 준비 중이다.
영국 외에 미국, 유럽, 일본, 중국, 한국 등에서도 계속 반독점 심사가 진행 중이다. 워낙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이라 최종적으로 합병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는 낙관하기 어렵다. 만약 최종적으로 이번 M&A가 실패할 경우 마이크로소프트는 액티비전 블리자드에 무려 3조6000억원(30억달러)의 위약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사티아 나델라는 왜 게임 산업에 진심일까. MS가 진입에 실패한 스마트폰 운영체제인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애플의 iOS 매출액 중 상당수가 게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두 회사가 무려 30%의 앱 장터 수수료를 손쉽게 가져가는 것을 보며 오래전부터 칼을 갈아온 것으로 보인다. 게임 시장은 마진도 높고 매출 규모도 크기 때문이다.
또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게임패스’라는 플랫폼이 강해지려면 초기에는 게임 콘텐츠를 대거 확보해야 한다. 이후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통해 충분한 사용자 수가 확보되면 자연스럽게 플랫폼도 강해진다. 이는 모든 플랫폼 비즈니스의 공통된 공식이다. 사티아 나델라는 게임 플랫폼으로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게임 매출을 뺏어 오겠다는 심산이다.
더 장기적으로는 X박스가 필요 없는 스트리밍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자기 파괴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스트리밍 게임은 클라우드 애저 위에서 돌아가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스트리밍 게임은 사용자 경험이 좋지 않다. 5G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돌리기 위한 통신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다운로드 시장이 대세일 듯하다.
게임 시장의 또 다른 변수는 인공지능 기술이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챗GPT를 활용할 경우 게임 개발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픈AI에 이미 막대한 투자를 단행해 기술을 공유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다. 당장 게임 사업에도 해당 기술을 적용해 높은 품질의 게임을 빠른 시간 안에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크다.
‘링크드인’ 인수의 핵심은 사용자 수
마이크로소프트는 2016년에 31조원(262억달러)에 전격적으로 링크드인을 인수했다. 그 당시로는 마이크로소프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M&A로 기록됐다. 링크드인은 세계 최대의 구인·구직자를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링크드인과 한국의 전통적인 구인·구직 플랫폼인 잡코리아, 사람인, 인크루트와의 차이점은 뭘까. 링크드인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기능이 추가돼 있다는 점이다.
링크드인 회원들은 지인들과 ‘1촌’을 맺을 수 있고 재직 중인 회사, 출신학교, 대외활동 등 취업에 유리한 모든 정보를 자신의 공간에 등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 이력서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와 링크드인의 비즈니스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왜 링크드인을 인수한 걸까.
마이크로소프트가 노린 건 인수 당시인 2016년 기준 4억명이 넘는 막대한 링크드인 사용자 수다. 결과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링크드인 인수는 성공적이었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사용자 수는 인수 당시의 2배인 8억명이 넘기 때문이다. MS의 기술력과 링크드인의 플랫폼이 결합되면서 다양한 수익 창출이 가능한 핵심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MS의 행보는 B2B(기업 간 거래) 시장의 장악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구인·구직 시장에는 개인들도 많지만 구직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도 많기 때문이다.
‘깃 허브’ 인수로 개발자 기술 싹쓸이
컴퓨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깃 허브라는 회사는 완전히 낯설다. 깃 허브는 전 세계 개발자들이 오픈 소스를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오픈 소스란 누구나 볼 수 있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노출해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깃 허브는 ‘개발자들의 놀이터’로 불리는 ‘소스 코드 공개 저장소’이기도 하다. 또 개발자들에게 코드 작성에 필요한 여러 가지 편의 기능을 제공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8년에 9조원(75억달러)이라는 거금을 주고 깃 허브를 인수했다. 이번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노린 건 사용자 수다. 2018년 인수 당시의 깃 허브 사용자 수는 2800만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4년 뒤인 2022년에는 깃 허브를 이용하는 전 세계 개발자 수가 9400만명으로 3배 이상 늘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깃 허브 인수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건 뭘까. 바로 인건비가 비싼 인간 개발자 대신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프로그래밍 코드를 설계하는 서비스를 내놓는 게 목적이었다. MS가 내놓은 ‘생성형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은 2022년에 100만명의 베타 사용자들을 통해 무사히 테스트를 마쳤다.
이후 2023년에 ‘깃 허브 코파일럿’이라는 기업용 서비스를 출시했다. 사용자당 이용료는 월 19달러(약 2만3000원)다. 이렇게 신속하게 생성형 AI 프로그래밍 도구를 출시할 수 있게 된 것은 깃 허브의 방대한 코드 데이터 덕분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서비스에 인공지능을 고도화해 다양한 수익모델을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 인수로 의료 분야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2021년에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를 24조원(197억달러)에 전격 인수했다. 액티브 블리자드, 링크드인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의 인수합병이다.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는 어떤 곳일까. 의료 분야의 인공지능 서비스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회사다. 특히 음성 인식과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개발에 강점이 있다. 애플이 ‘시리’를 개발할 때도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먹거리인 헬스케어 시장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티아 나델라 CEO는 인공지능 기술을 의료 현장에 도입하려는 큰 그림을 그려 왔다. 그런 측면에서 의료 분야에 집중해온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의 인수를 통해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확보해 헬스케어 시장에 진출하려는 전략이다.
미국의 병원 중 70% 이상이 뉘앙스의 인공지능 솔루션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오픈AI의 챗GPT 인공지능 기술과 결합되면 향후 더 큰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자체 기술력까지 합쳐지면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의 헬스케어 솔루션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이크로소프트의 M&A 방향성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사티아 나델라 CEO는 게임 산업, 인공지능, 의료 산업, 검색광고 등에 관심이 많다. 또 많은 사용자 수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을 선호해 왔다. 그동안의 이런 M&A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투자자들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밝은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06월호
AI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알파고 이후 조용했던 인공지능 다시 격전지로
인공지능 개발에 필요한 것은 자금과 데이터
인공지능 스피커 싸움, 아마존·구글·애플...웬 MS?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인공지능(AI) ‘알파고’가 불세출의 바둑 천재 이세돌을 이겼던 2016년 이후 한동안 온 세상이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으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이런 뜨거운 관심은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알파고가 인간에게 승리한 이후 한참 동안은 세상을 뒤집을 만한 또 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공지능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대신 인류의 관심은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 NFT, 메타버스, VR, AR 등의 신기술로 빠르게 옮겨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지만 인공지능에 대한 빅테크들의 개발 노력은 계속됐다. 그리고 2023년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과거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인공지능 챗봇이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챗GPT’. 이 낯선 이름의 주인공이 출시되자마자 전 세계는 난리가 났다.
챗GPT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한 종류다. 즉 언어모델을 통해 자연어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니즈가 다양한 수많은 사용자의 질문에 척척 답변을 생성해 낸다. 챗GPT가 뜨겁게 주목받는 이유는 답변이 기대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 자연어 답변이라 인간들에게 더 친근하다는 점도 강점이다.
챗GPT를 만들어낸 회사는 ‘오픈AI’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약 16조원(130억달러)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인공지능 시장 이슈를 완벽히 선점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동안 인공지능 기술력과 관련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챗GPT 열풍이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 출현, 2007년의 아이폰 출현에 이어 세상을 확 뒤집을 게 분명한 3번째 혁신임을 단숨에 깨달았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른 현대사회에서 챗GPT가 전 세계로 퍼지는 데는 2개월이면 충분했다. 1억명 이상이 이미 챗GPT를 몸소 체험했다. 말 그대로 열풍이다. 수많은 사용자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챗GPT의 놀라운 답변에 감탄하며 다양한 사용자 경험들을 인터넷에 쏟아내고 있다.
인공지능 개발의 필요 조건은 자금력·데이터
인공지능 개발에는 기본적으로 막대한 자금력이 필수적이다. 이제 미국 시가총액 상위 4개 기업의 영업이익을 살펴보자. 애플은 143조원, 마이크로소프트는 100조원, 알파벳(구글)은 90조원, 아마존은 15조원이다. 아마존의 영업이익이 상대적으로 부진하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자금력과 수익력을 갖춘 기업이라야 인공지능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거대한 플랫폼 기업들은 이미 자신들의 탁월한 서비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더 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인공지능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인공지능 개발에 총력을 다해 몰두해 왔다.
초거대 인공지능 개발은 자금력이 막강한 빅테크 기업들만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금력이 막강하다고 모두가 경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빨리 대응하지 못해 순식간에 경쟁에서 도태됐던 기업들의 슬픈 역사는 무수히 많다. 아무리 빅테크 기업이라 해도 인공지능 발전을 빠르게 쫓아가지 못할 경우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규모가 쪼그라들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의 개발에는 자금력 외에도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데이터다. 구글,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모두 데이터를 취득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들 기업 중에서도 최상의 데이터 취득에 가장 유리한 기업은 역시 구글이다. 구글이 가진 장점은 이미 사용자별 데이터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거대 플랫폼 기업들의 핵심 경쟁력은 사용자 수다. 구글의 유튜브는 21억명, 애플의 iOS 10억명, 페이스북 22억명,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14억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엄청난 사용자 수를 바탕으로 각 빅테크 기업이 확보한 데이터는 탄탄하다. 또 사용자 수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오래전부터 인공지능을 준비해온 아마존도 있다.
세계인들 중 상당수는 일상 자체를 구글 서비스와 함께하고 있어 구글은 압도적인 데이터 확보가 가능하다. 사람들은 구글에 자신의 모든 데이터를 아낌없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 어떤 걸 먹었는지 구글은 다 알고 있다. 구글이 ‘구글 신’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존은 물건 구매자들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애플은 iOS 앱을 사용하는 고객들의 다양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메타(구 페이스북)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용자 수를 가지고 있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데이터를 확보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4억명이 넘는 윈도우 사용자 수를 기반으로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챗GPT는 자체 데이터 대신 크롤링(인터넷상 정보를 자동으로 수집하는 작업)을 통해 사전 학습을 해 왔다. 하지만 만약 허용하지 않은 데이터를 갖다 썼을 경우 향후 저작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경과할수록 각 빅테크가 보유하고 있는 합법적인 데이터들이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향후 돈과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 개발 경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란?
‘인공지능(AI)’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지능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 시스템’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지능을 기계 등에 인공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이 예상보다 급격히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지만 앞으로는 기계(인공지능)가 인간의 두뇌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다.
인공지능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캘리포니아대학 컴퓨터과학 교수인 스튜어트 러셀의 4가지 분류가 가장 직관적이다. (1) 인간처럼 행동하는 인공지능 (2) 인간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 (3)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공지능 (4)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공지능으로 구별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을 발전 단계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한 접근법도 있다. 1단계인 ‘약인공지능’은 유용한 도구로서 설계된 인공지능으로 특정 분야에서만 활용 가능하다. 2단계인 ‘강인공지능’은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한 인공지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 가능하다. 3단계인 ‘초인공지능’은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로 자아를 가진 미래의 인공지능을 말한다.
인공지능의 발달 과정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앨런 튜링은 현대 AI 연구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암호를 해독해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AI는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의 연구를 했다. 그가 발표한 ‘튜링 테스트’는 컴퓨터와 인간이 대화해 컴퓨터의 반응을 인간의 반응과 구분할 수 없다면 컴퓨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컴퓨터와 인간이 대화해 30% 이상을 속이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 지적 능력을 지녔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챗GPT는 아직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만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인공지능 연구는 언제부터 활발하게 이뤄졌을까. 1950년대부터 컴퓨터 발달이 본격화되면서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됐다. 사람 대신 컴퓨터로 두뇌를 만들어 사람의 일을 대신 해주는 개념은 근사하다. 자연어 처리나 복잡한 수학문제 풀이 등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들도 해결하고자 한 혁신적인 연구였다. 당연히 인공지능 개발은 쉽지 않았다. 곧 수많은 난제에 부딪쳤다.
이에 따라 인공지능 연구는 두 번의 ‘인공지능 겨울’을 맞이했다. 1차 겨울은 1970년대로 단일 계층 신경망의 한계에 부딪쳤다. 1980년대에 신경망 이론에 대한 연구가 재개됐지만 역시 한계를 보이며 2차 겨울을 맞이했다. 이렇게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계속돼 왔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의사결정 방식을 흉내내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 크게 4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양한 형태의 서로 다른 데이터를 인지하는 것, 두 번째는 인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하는 것, 세 번째는 추론한 결과를 출력하는 과정, 네 번째는 출력한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다. 이후에 이 4가지 방식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게 인공지능 학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인공지능 연구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술용어 3가지는 기계학습(머신러닝), 인공신경망, 딥러닝이다. 기계학습(머신러닝)이란 많은 데이터를 넣어주면 프로그램이 스스로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알고리즘을 통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분석 결과와 패턴을 컴퓨터가 스스로 인식해 특정 프로그래밍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컴퓨터가 지속적으로 학습과 분석을 반복하는 것을 총칭한다.
인공신경망이란 인간의 뉴런 구조를 본떠 만든 기계학습(머신러닝) 모델이다. 딥 러닝이란 기계학습(머신러닝)에 활용되는 알고리즘 중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한 분석방법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딥러닝을 다르게 설명하면 입력과 출력 사이에 있는 인공 뉴런들을 층층이 쌓고 연결한 인공신경망 기법을 다루는 연구다. 수십 개 층으로 이뤄진 인간의 신경망을 흉내 낸 ‘심층 신경망(DNN)’을 기반으로 한다. 딥러닝은 인공지능 기술의 핵심이다.
인공지능 발전이 급격히 가속화된 계기는 제프리 힌턴 박사에 의해 2006년에 딥러닝 논문이 발표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비지도 학습(Unsupervised Learning)’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면서 인공지능 연구가 가속화됐다.
인공지능 모델의 핵심은 사람보다 빠르게 결과물을 출력해 내는 게 핵심이다. 사람보다 빨리 결과물을 내놓으려면 먼저 데이터로부터 학습을 해야 한다. ‘지도학습’은 말 그대로 정답이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데이터를 학습시킨다.
반면 ‘비지도 학습’에서는 정답 라벨이 없는 데이터를 비슷한 특징끼리 군집화해 새로운 데이터에 대한 결과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지도학습’보다 난도가 더 높다. 인공지능을 어린아이라고 가정해 보자. 지도 학습은 단어, 숫자, 색깔과 같이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과 같다. 비지도 학습은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풀고 추론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공지능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스스로 학습하며 계속 능력이 진화해 왔다.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지만 컴퓨터의 기억력은 무한대다. 인간세계에서 수천 년간 쌓인 데이터를 인공지능은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분석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됐다.
AI 스피커 싸움, 아마존·구글·애플...난데없는 MS
사실 마이크로소프트가 챗GPT를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내놓기 훨씬 전부터 빅테크들은 인공지능 기술을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인공지능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빅테크 기업들은 인공지능 개발에 사활을 걸고 매달려 왔다. 그 전초전이 바로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이었다.
아마존, 구글, 애플은 인공지능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을 공략해 왔다. 미국의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점유율을 살펴보면 아마존의 ‘에코’는 47%, 구글의 ‘구글홈’은 42%, 애플의 ‘홈팟’은 11%를 차지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전쟁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순위에 없다.
인공지능 스피커 외에도 인공지능 비서 역할을 하는 아마존의 ‘알렉사’, 구글 ‘어시스턴트’, 애플의 ‘시리’ 간 경쟁도 치열했다.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에도 ‘코타나’라는 인공지능 비서가 있었지만 존재감은 거의 없었다. 가장 꼴찌였던 마이크로소프트가 갑자기 생성형 AI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춘 ‘오픈AI’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며 기습적으로 인공지능 시장에 선두로 올라선 셈이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인공지능 시장 이슈를 완벽히 선점하고 있으니 경쟁사들은 말 그대로 모두 난리가 난 상황이다.
이제 MS의 경쟁사인 구글, 애플, 아마존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기업과 아이폰 시절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했던 노키아 사례를 떠올려 보면 쉽게 짐작된다. 심지어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마저도 스마트폰 시대의 대응에 실패해 위기를 맞았었다. 그 결과 PC 운영체제하에서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스마트폰 운영체제는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모두 뺏겨버리는 결말을 맞이하게 됐다.
어쨌든 아마존, 구글, 애플과 달리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의외로 인공지능 분야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특히 경쟁사 중에서도 구글의 충격이 제일 크다. 지금 시장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오픈AI 기술의 원천은 바로 구글이기 때문이다. 2017년에 구글이 발표한 논문에서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기반이 되는 트랜스포머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GPT의 ‘T’도 트랜스포머를 의미한다.
트랜스포머는 문장 내 단어 사이의 관계를 추적해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 따라서 자연어로 명령어(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이를 분석해 자연어로 답을 내놓는 지금의 생성형 AI 구조는 모두 구글의 트랜스포머 논문이 그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MS가 인공지능 전쟁 최후의 승리자?
오픈AI가 2022년 11월에 챗GPT를 선보인 후 불과 2개월 만에 월간 활성이용자 수는 1억명을 돌파했다. 과거 페이스북이 이용자 수 1억명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4.5년이다. 이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던 틱톡도 9개월이 걸렸다. 챗GPT의 확산 속도가 얼마나 경이적인지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챗GPT를 만든 오픈AI는 비영리 기관이라는 점이다. 오픈AI는 ‘인류에 기여하겠다’는 사명으로 수익성 대신 공공성을 추구해 왔다. 그런데 비영리를 추구하던 오픈AI가 왜 MS에게 독점적으로 챗GPT 등의 초거대 언어모델(LLM)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면서까지 무리하게 막대한 투자를 받았을까. 이런 초거대 언어모델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개발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려 해도 돈이 있어야 한다. 신생 회사였던 오픈AI에게는 늘 자금이 부족했다. 반대로 MS는 인공지능 기술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두 회사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한 셈이다. 이런 필요에 의해 MS는 오픈AI에 2019년에 10억달러, 2021년에 20억달러, 2023년에는 무려 100억달러를 투자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누적 투자금액이 무려 130억달러(약 16조원)에 달한다.
전 세계에서 이 정도의 거금을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은 MS, 애플, 구글, 아마존 등 소수의 빅테크 기업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AI 기술력이 낮은 것으로 평가받던 MS의 과감한 승부수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의 화끈한 베팅은 17년 전인 2006년도에 유튜브를 무려 2조원(16억5000만달러)에 인수한 구글의 결단력에 버금가는 빅딜이다. 지금 관점에서는 소액일지 몰라도 그 당시로 돌아가보면 구글의 유튜브 인수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었다.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했던 2006년 당시에는 인터넷 속도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동영상을 세계 곳곳에서 편안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이 언제쯤에나 구축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 못했던 불확실한 시대였다. 그런 열악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도 언젠가는 인터넷 인프라가 개선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튜브를 인수한 구글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튜브를 고작 2조원에 인수하다니 구글은 무지막지하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이제 유튜브가 없는 구글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유튜브와 구글 두 사이트의 계정이 연동되고 검색 알고리즘이 서로 밀접하게 작동하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 사이트와 가장 강력한 검색엔진이 서로 연결됐다. 이게 지금의 구글을 있게 한 강력한 2개의 킬러 서비스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에는 MS와 오픈AI의 관계도 비슷하게 흘러갈까.
사람들은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미래에는 이 거대한 인공지능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게 종속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아마존, 메타, 테슬라까지 모두 회사의 명운을 걸고 인공지능 전쟁에 뛰어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빅테크 기업들 간의 인공지능 경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인공지능 전쟁의 최종 승리자를 지레짐작하는 건 섣부르다. 인공지능을 지배하는 기업이 세계를 지배한다.

2023년 06월호
MS, 세계 1위 도약은 시간문제?
MS와 구글은 수익모델 DNA가 현격히 달라
MS 실적 밋밋...클라우드 성장도 예전 같지 않아
MS 365에 적용된 코파일러...유료화 시 게임 끝?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1975년에 회사를 설립해 2000년까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다. 그 후 2대 CEO인 스티브 발머를 거쳐 지금은 3대 CEO인 사티아 나델라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가진 최대 강점은 뭘까. 바로 무형의 상품을 유료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점이다.
MS와 구글, 판이한 수익모델
마이크로소프트의 1차적인 대성공은 1981년에 IBM이 개인용컴퓨터(PC)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MS-DOS(운영체제)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특이하게도 이 계약은 IBM에 MS-DOS 저작권을 통째로 넘긴 게 아니었다. IBM PC에 MS-DOS를 설치할 때마다 일정한 수수료를 받는 소프트웨어 사용 계약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프트웨어 사용 계약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실행하다니 빌 게이츠는 오래전부터 천재적인 사업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IBM의 PC가 인기리에 팔려 나가면서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도 MS-DOS로 떼돈을 벌게 된다.
MS는 이처럼 탄탄한 수익모델을 갖춘 채로 출발한 회사다. 따라서 MS의 원초적인 DNA는 사용자들에게 직접 돈을 받아내는 거다. 그래서 윈도우, MS오피스(엑셀·파워포인트·워드), 마이크로소프트365 등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MS는 소비자들에게 아주 비싼 요금을 청구한다.
반면 구글은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며 출발한 회사다. 소비자가 구글을 통해 아무리 많은 검색을 해도 소비자는 구글에게 돈을 한푼도 내지 않는다. 대신 그런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전 세계의 수많은 기업이 구글에게 광고료를 지불하는 구조다.
유튜브의 수익모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유튜브 프리미엄이라는 유료 정액제 모델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소비자들은 무료로 유튜브를 구독한다. 대신 이런 소비자들에게 광고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전 세계 수많은 기업이 구글에게 앞다퉈 광고료를 지급하면서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두 회사의 수익모델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두 수익 모델 중 어느 쪽이 더 탄탄한 수익모델일까. 당연히 소비자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익모델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
이렇게 MS처럼 광고수익보다 소비자들에게 직접 사용료를 받아 회사를 유지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넷플릭스다. 넷플릭스 또한 고객들에게 매월 편안하게 구독료를 따박따박 현금으로 받아간다. 많은 투자 전문가가 넷플릭스를 걱정하지만 넷플릭스가 건재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업가 입장에서는 역시 현금장사가 최고다.
언제 적 ‘윈도우’와 ‘MS오피스’? 아직도 MS의 돈줄
아주 오래전인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출시한 ‘윈도우95’는 아름다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혁신적인 ‘마우스’ 방식으로 전 세계 PC 운영체제 시장을 석권했다. 1997년에 내놓은 전설의 ‘MS오피스 97’은 엑셀, 파워포인트, MS워드를 묶어 전 세계의 모든 문서를 표준화해 버렸다. 한마디로 독점의 끝판왕이었다.
최초로 원도우와 MS오피스가 나온 지 거의 30년이 지났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장 독점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지금도 전 세계 직장인들 중 상당수가 원도우와 MS오피스(엑셀·파워포인트·MS워드)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MS가 초기 진입에 실패했다. 따라서 스마트폰 운영체제는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재 윈도우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몇 명이나 될까.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인 AI 챗봇 ‘뉴 빙’에 물어봤다. 뉴 빙은 “윈도우 전 세계 사용자 수는 정확한 수치를 찾기는 어렵지만 윈도우10의 사용자 수(2021년 8월 기준)는 전 세계에서 약 14억명”이라고 답변했다. 유튜브 사용자 수 20억명과 비교해 봐도 크게 밀리지 않는 숫자다. 특히 유튜브는 무료 사용자 수가 많지만 윈도우는 대부분이 유료 사용자라는 점에서 질적인 격차가 크다.
소비자들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윈도우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건 새로 노트북이나 PC를 구매할 때다. 윈도우가 장착된 노트북과 윈도우가 미설치된 프리 도스 방식의 노트북과는 가격 차이가 꽤 크다. 그래서 여전히 개인들 중에는 정품이 아닌 윈도우를 어둠의 경로로 설치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도대체 윈도우 가격은 얼마나 하는 걸까. 뉴 빙에 물어보니 “한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가격은 판매처에 따라 다르고 버전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윈도우10의 정품 가격은 15만원 이상이고 윈도우11은 18만원 이상”이라고 답변했다. 전 세계 14억명이 사용하는 윈도우10 가격이 최소 15만원 이상이라니 단순하게 곱해 보면 총 21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온다.
문제는 PC 운영체제인 윈도우와 문서편집 프로그램인 MS오피스(엑셀·파워포인트·MS워드)는 별개의 상품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윈도우만 구매했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구조는 아니다. 문서작업을 위해서는 MS오피스를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MS 홈페이지에서 MS오피스 가격을 확인해 보면 ‘구매형 오피스’와 ‘클라우드 버전’으로 다시 종류가 나뉜다.
구매형 오피스인 ‘오피스홈 2021’은 일회성 구매비용으로 17만9000원, 클라우드 버전인 ‘마이크로소프트 365’는 1인용 퍼스널은 연 8만9000원, 6인까지 쓸 수 있는 패밀리는 연 11만9000원으로 가격이 책정돼 있다. 클라우드 버전인 ‘마이크로소프트 365’는 원활한 통합 작업 환경과 최신 업데이트를 제공하는 게 장점이다. 대신 연간 구독료를 내야 하므로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부담스러운 요금제라 할 수 있다.
반면 MS 입장에서는 한 번만 설치하면 평생 쓸 수 있는 ‘구매형 오피스’보다는 매년 구독료를 징수할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365’의 가격 정책이 훨씬 더 쏠쏠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의 향후 계획은 클라우드 버전인 ‘마이크로소프트 365’의 사용자 수를 대폭 늘려 나가는 것이다.
꺾이기 시작한 실적, 클라우드 성장도 기대 못 미쳐
마이크로소프트는 크게 3개 부문으로 나눠서 실적을 발표한다. MS오피스와 링크드인 등의 실적을 합친 ‘생산성 및 비즈니스 프로세스’, 애저 등의 ‘인텔리전트 클라우드’, 윈도우와 X박스 등의 ‘퍼스널 컴퓨팅’으로 구분된다. 이 3개의 주요 사업들이 그동안 MS의 성장을 잘 견인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022 회계연도 매출액 성장률은 양호하다. ‘생산성 및 비즈니스 프로세스’ 부문은 전년보다 18% 성장했고, ‘인텔리전트 클라우드’ 부문도 전년보다 25% 성장했다. 윈도우와 X박스가 주력인 ‘퍼스널 컴퓨팅’ 부문은 다른 부문에 비해 성장성이 약했지만 그래도 10%라는 두 자릿수 성장률을 달성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전체 매출은 2021년 202조원(1681억달러), 2022년에는 238조원(1983억달러)을 달성해 거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18%의 고성장세를 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022 회계연도 영업이익 또한 양호하다. ‘생산성 및 비즈니스 프로세스’ 부문은 전년보다 22% 성장했고, ‘인텔리전트 클라우드’ 부문도 전년보다 25% 성장했다. 윈도우와 X박스가 주력인 ‘퍼스널 컴퓨팅’ 부문은 다른 부문에 비해 저조한 8% 성장률을 기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전체 영업이익은 2021년 84조원(699억달러), 2022년에는 100조원(834억달러)을 달성해 전년 대비 19%의 고성장세를 보였다. 매출액이 238조원(1983억달러)인데 영업이익이 100조원(834억달러)이라니 놀라운 수익성이다. 영업이익률이 무려 42%다. 제조업 영업이익률은 평균이 5%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상품을 판매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익성이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2023 회계연도부터 실적이 크게 꺾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6월 결산법인이라 2023 회계연도의 상반기 실적은 실제 캘린더상 2022년 7월 1일~12월 31일이다. MS가 발표한 2023 회계연도 상반기의 매출액과 영업이익 성장률은 애널리스트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전년도에 무려 19%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전체 매출액 성장률은 2023년 상반기에 고작 6% 성장에 그쳤다. 더 충격적인 건 영업이익 성장률이 -1.3%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부문별로 살펴봐도 모든 부문이 다 기대치에 못 미쳤다. 특히 퍼스널 컴퓨팅 부문은 전년 상반기보다 매출이 -10.7% 감소하며 크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또 그동안 마이크로소프트의 실적을 견인해 왔던 인텔리전트 클라우드 분야의 성장률도 11.7%에 불과해 기대보다 악화된 실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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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분기 실적은 소폭 개선...MS의 큰 그림은?
가장 최근에 발표했던 2023 회계연도 3분기(2023년 1~3월) 실적은 애널리스트들의 기대를 살짝 상회했다. 전체 매출액은 63조원(521억달러)으로 전년 동분기 대비 7.1% 성장했다. 세부항목별로 보면 생산성 및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매출액은 21조원(175억달러)으로 10.9%, 인텔리전트 클라우드 매출액은 27조원(221억달러)으로 16.3% 성장했다. 반면 퍼스널 컴퓨팅 분야 매출액은 16조원(133억달러)으로 -9.1%의 역성장을 지속했다.
워낙 기대치가 낮아 실적 발표 후 시장은 환호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살펴보면 향후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해 내지 못할 경우 성장이 멈출 수도 있는 상황이다. MS의 사업구조를 살펴보면 윈도우, 오피스, 클라우드, 개발자 도구, 게임, 광고가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 B2B(기업 간 거래)에도 강하지만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 MS의 생태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업부문별 점유율 추이를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캐시카우 역할을 해온 오피스와 윈도우 부문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축소되고 있다. 과거에는 윈도우 버전이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추가로 돈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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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윈도우10’을 ‘윈도우11’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업그레이드 무료 정책을 선보였다. 따라서 앞으로는 윈도우 부문의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되기 어려워 보인다. 다행스러운 건 비싼 가격에 인수했던 온라인 구인·구직 플랫폼 ‘링크드인’의 매출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인 2014년에 사티아 나델라가 처음 CEO를 맡았을 당시부터 그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퇴보해 가던 마이크로소프트를 클라우드(Cloud)로 부활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사티아 나델라는 “클라우드 퍼스트”를 외치며 ‘애저’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이런 노력으로 클라우드를 서비스하는 애저의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은 2위까지 빠르게 올라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체 매출에서도 ‘클라우드/서버’ 부문의 점유율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2023년에 들어서면서 믿었던 클라우드 부문의 성장세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또 지난 몇 년간 정체 중인 검색광고 부문의 부진도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검색 시장은 구글의 독무대였다. 구글의 검색점유율은 93%인 데 비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빙’ 검색점유율은 3%에도 못 미쳤다. 특히 뼈아픈 건 인터넷 접속의 최초 관문인 웹 브라우저 시장마저 구글에 밀린 현실이다. 과거 익스플로러 점유율이 90% 넘는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구글의 크롬 점유율이 70%에 육박한다. 반면 MS의 새로운 브라우저인 ‘엣지’의 점유율은 미미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티아 나델라는 회심의 반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공격적인 M&A’와 ‘인공지능 퍼스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예측하고 싶다면 사티아 나델라가 취임 이후 M&A로 인수한 회사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된다.
사티아 나델라는 취임 후 블리자드(82조원), 링크드인(31조원),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 게임(24조원), 깃 허브(9조원), 제니맥스 미디어(9조원), 오픈AI(16조원) 등에 투자했다. 게임, SNS, 광고, 의료, 인공지능 등 향후 돈이 될 만한 사업들만 콕 찍어서 집중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 사티아 나델라는 오픈AI가 만들어낸 챗GPT의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을 MS 자사의 모든 분야에 활용하는 공격적이고 대담한 전략을 쓰고 있다. 클라우드, 검색광고, MS오피스, 게임 등에 모두 생성형 AI 기술을 결합하면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길까.
생성형 AI 유료화 성공 여부가 승부처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누적 130억달러(16조원)라는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 과감한 투자는 오래전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했던 대담한 승부수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 오픈AI는 챗GPT 유료화를 통해 일정 부분 수익을 내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오픈AI의 ‘생성형 AI’ 기술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원천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오픈AI의 수익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익으로 100% 연결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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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픈AI 투자와 관련된 최종 조건은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MS가 오픈AI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챗GPT 기술을 마이크로소프트의 자사 서비스에 순차적으로 결합해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챗GPT를 운용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픈AI는 전격적으로 유료화를 시도해 월 20달러의 요금제를 전격 출시했다. 이와 별개로 마이크로소프트도 빠르게 자사의 대표적인 상품들에 오픈AI의 기술을 적용해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사티아 나델라는 MS의 기존 DNA와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전을 통해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먼저 가장 주목을 받은 건 챗GPT4를 검색엔진 ‘빙’과 결합해 내놓은 생성형 AI 검색엔진 ‘뉴 빙’이다. 구글의 93%에 달하는 검색광고 시장 분야에서 빙의 점유율이 높아질수록 MS에게는 이득이다. 현재 MS의 빙은 3%에 불과한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AI 기술 적용으로 성능이 대폭 개선된 빙의 검색엔진 시장 점유율이 향후 1% 증가할 때마다 광고 매출이 약 2조4000억원(20억달러)씩 증가할 수 있다는 게 MS의 주장이다. 최근 빙의 사용자수 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MS는 더욱 공격적으로 빙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MS의 최종 목표는 구글의 검색시장 점유율을 뛰어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모든 직장인들이 경악한 혁신적인 서비스인 ‘마이크로소프트365 코파일럿’에 대한 기대도 크다. 코파일럿은 사용자가 채팅을 통해 자연어로 명령을 내리면 이를 알아듣고 그대로 작업을 실행해 엑셀, 파워포인트, 팀즈 등의 프로그램을 원하는 방향으로 구동해 준다.
마이크로소프트365 코파일럿은 모든 회사의 사무 업무에 엄청난 혁신을 일으킬 만한 기술이다. 이 서비스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365의 기존 구독료(1인용 퍼스널은 연 8만9000원, 6인용 패밀리는 연 11만9000원, 한국 기준)를 큰 폭으로 인상한다면 인상금액만큼 고스란히 MS의 추가 수익이 된다. 또는 별도의 프리미엄 요금제 형태로 출시할 수도 있다. 또 MS는 인공지능 코드 작성 프로그램인 ‘깃 허브’의 ‘코파일럿’ 비즈니스 버전도 출시했다. 이 서비스의 가격은 월 19달러에 달한다.
MS가 2016년에 인수한 링크드인은 8억명이 넘는 사용자 수를 보유한 세계 최대의 구인·구직 SNS 회사다. MS는 아직 링크드인에는 챗GPT를 활용한 유료 서비스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만 생각해 봐도 사용자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대신 작성해 주는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또 구직자를 정확히 분석해 그에 맞는 회사를 추천해 주거나 반대로 특정 회사에 딱 맞는 구직자를 링크드인이 직접 추천해 줄 수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원래부터도 인기가 많았던 자사의 서비스들에 생성형 AI를 적용해 모든 서비스를 고도화하려는 계획을 빠르게 실행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365에 적용되는 생성 AI 기반의 코파일럿 제품군의 가격 정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투자자들의 기대는 이미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다.
또 인공지능 서비스 사용량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클라우드 컴퓨팅의 사용량 증가로 이어진다. 이 경우 클라우드 점유율이 높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수혜를 보게 된다. 결국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은 모두 이 빅 클라우드 위에서 개발되고 운영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애저는 오픈AI 서비스를 통한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 판매 등을 통해 추가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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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애플 제치고 1위 탈환? 특이점 온다
주식 시장은 비이성적이다. 가끔은 터무니없이 주가가 고평가되는 경우도 있고 저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혁신적인 신약 개발을 발표한 바이오 회사의 주가는 한도 끝도 없이 급등하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상이나 3상의 임상 실패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90%의 손실을 기록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런데 바이오 회사가 아니라 IT 회사에서 엄청난 혁신 제품이 등장한다면 해당 회사의 주가는 어떻게 변할까.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름다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마우스를 같이 선보인 ‘원도우95’는 이후 전 세계 운영체제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그 후 10년간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는 약 4배 상승했다.
또 불세출의 천재 스티브 잡스가 2007년에 혁신의 아이폰을 선보인 이후 10년간 애플의 주가는 6.1달러에서 40.2달러로 무려 5.6배 폭등했다. 그렇다면 생성형 AI 기술은 마이크로소프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마이크로소프트같이 이미 성숙기에 진입해 시가총액이 2000조원을 훌쩍 넘는 회사의 주가는 기본적으로 무겁다. 웬만한 호재로 2배 이상 주가가 오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을 바꿀 만한 혁신적인 기술이라면? 그 기술을 통해 미래에 매출과 순이익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고 믿는 투자자들이 많아진다면? 이런 특이점이 오면 주가는 선행해서 움직일 수 있다. 만약 MS의 주가가 지금 수준에서 2배 이상 오른다면 시가총액이 5000조원을 돌파하게 된다. 증시 역사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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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다수 미국 IT기업이 수혜를 봤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2021년 초에 215달러였던 주가는 같은 해 11월에 345달러까지 60% 치솟았다. 하지만 2022년에 증시가 전반적으로 조정을 받으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주가 또한 맥없이 하락했다.
그런데 2023년에 챗GPT로 혁신이 일어나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주가 또한 큰 폭 반등에 성공했다. 2023년 4월 말 기준 주가는 300달러 수준이다. 회복 속도로만 보면 다시 전 고점을 향해 맹렬히 달려갈 기세다. 문제는 2023년의 마이크로소프트 실적이 밋밋하다는 점이다.
실적은 밋밋한데 주가는 전 고점 회복을 시도한다면? 주가가 너무 고평가됐다고 판단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주식 시장의 역사는 실적과 주가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왔다. 주식 시장은 꿈을 먹고 자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을 활용한 공격적 전략과 게임 사업을 확대하려는 대형 M&A 전략에 투자자들이 거는 기대는 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와의 굳건한 협력 관계를 통한 인공지능 기술력 우위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향후 구글 등의 경쟁사들도 빠르게 생성 인공지능 시장에서 반격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경쟁력 차별화의 관건은 얼마나 확고하게 마이크로소프트만의 플랫폼과 생태계를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번 기회를 잘 살린다면 지난 몇 년간 고착화됐던 1위 애플, 2위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시가총액 순위가 뒤집힐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물론 이런 낙관적인 가정에는 큰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M&A 중 가장 핵심으로 평가받는 ‘액티비전 블라자드’의 인수가 까다로운 심사를 뚫고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한다. 애플은 위대한 기업이지만 인공지능을 등에 업은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갖췄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1위 전쟁, 과연 최후의 승자는 어떤 기업이 될까?

2023년 05월호
글로벌 은행 연쇄 파산...국내 은행은 안전한가
국내은행 퇴출, 1998년 이후엔 없어
국내은행 코코본드 상각 조건, 유럽과 달라
저축은행 등 2금융권은 PF 부실 우려 심각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에서 시작된 나비 효과가 이제 본격적으로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 여파로 스위스의 크레디트스위스(CS)마저 UBS에 3월 20일 자로 헐값에 매각됐다. 최근에는 독일의 초우량 은행으로 평가받던 도이체방크마저 유동성을 의심받으며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글로벌 전체적으로 은행들이 위기를 겪자 국내 은행에 여유자금을 맡긴 예금자들도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번 글로벌 은행들의 위기 사태로 인해 국내 은행들마저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 “국내 은행 파산 확률 낮아”
한국에서도 은행이 망한 사례가 있을까? 국내에서 은행들이 파산 위기를 겪은 사례는 IMF 구제금융 직후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8년 6월에 동화, 동남, 대동, 충청, 경기 등 5개 은행이 퇴출된 이후 더 이상의 은행 퇴출은 발생한 적이 없다.
5개 은행 퇴출 당시 금융시장 충격을 고려해 금융당국은 파산이 아닌 P&A(자산부채 이전) 방식을 선택했다. 따라서 동화은행은 신한은행, 대동은행은 국민은행, 동남은행은 주택은행, 경기은행은 한미은행, 충청은행은 하나은행으로 각각 자산과 부채가 이전됐다.
25년 전의 5개 은행 퇴출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금융당국은 BIS 비율 등 금융건전성 제도를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2년 9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총자본비율은 무려 14.84%다. BIS 비율은 은행들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로 BIS에서는 은행들에 8% 이상을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은행들의 BIS 비율은 권고치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또 한국의 경우 금리 위험과 유동성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바젤위원회 규제가 모든 은행에 엄격히 적용되고 있어 미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 은행들과의 또 다른 차이점이라면 한국 은행들은 IMF 이후 정부가 인위적으로 대형화를 추진해 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은행보다 국내 은행들은 아직 총자산 규모가 작다. 하지만 국가별 경제 규모와 대비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은 여러 건의 은행 간 인수합병(M&A)으로 인해 은행의 수가 적은 대신 평균 총자산 규모는 큰 편이다.
이렇게 규모가 큰 국내 은행들이 파산할 경우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따라서 시스템적인 위기 징후 발생 시 금융당국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언제든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국내 은행이 파산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 은행, 코코본드 차환 발행시 어려움 겪을 수도
미국 SVB의 파산 원인은 미국 장기 국채 집중 투자가 원인으로 지적된다. 갑작스러운 미국 기준금리의 폭등으로 SVB가 보유한 장기 국채 평가손실이 커졌다는 소문이 시장에 알려지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이에 불안을 느낀 예금자들이 모바일뱅킹을 통해 빠르게 예금을 인출하면서 결국 SVB를 무너뜨렸다.
스위스의 크레디트스위스(CS) 역시 과거의 여러 가지 투자가 실패하면서 예금자들의 뱅크런이 시작된 게 헐값 매각의 주요 원인이다. 그런데 CS의 처리 과정에서 이슈가 된 건 바로 주주보다 채권자의 손실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주주는 채권자보다 후순위다. 따라서 크레디트스위스가 발행한 일반채권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코코본드(AT1, 조건부자본증권)는 달랐다. ‘파산을 방지하기 위해 공공 부문의 자본 지원이 있을 경우 전액 상각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60억스위스프랑(약 22조원) 규모의 코코본드가 모두 상각되면서 투자자들이 전액 손실을 떠안게 됐다.
반면 CS 주식 보유자들의 UBS 주식 교환비율은 CS 22.48주당 UBS 1주였다. 주식 수량이 원래 수량의 4.4%로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CS 주식 보유자들도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됐지만 그래도 코코본드 보유자들에 비해서는 손실이 덜해 논란이 됐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국내 은행들이 발행한 코코본드가 안전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금융당국이 밝힌 국내 은행권의 코코본드 발행 규모는 약 31조원이다. 금융지주가 19조원, 은행이 12조원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발행된 코코본드도 상각 사유가 정해져 있다.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되거나 BIS 비율이 큰 폭으로 폭락할 경우’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조건이다. 또 CS가 발행한 코코본드처럼 ‘보통주보다 먼저 상각할 수 있다’는 조항도 없다. 따라서 유럽의 코코본드 투자자보다는 한국의 투자자 상황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
하지만 냉정히 분석해 보면 국내 은행에 예금한 예금자들의 경우 설사 은행 파산이라는 최악의 위기가 와도 정부가 금융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원리금 보장한도인 5000만원을 초과하는 예금도 전액 지급보증을 결정할 수 있다. 미국도 이런 방식으로 위기를 넘긴 선례가 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코코본드 투자자까지 보호할 리는 없다.
미국과 유럽도 예금주가 아닌 투자자를 보호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한국 코코본드 투자자들에게 다행인 건 국내 은행들의 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장의 리스크는 매우 낮지만 만기가 도래하는 코코본드의 차환 발행 때는 애를 먹을 가능성도 있다.
PF 부실 우려 심각한 2금융권 안전 장담 못해
각국의 정부와 금융당국은 금융 위기 발생 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유시장경제하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들은 도태시켜야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하지만 금융기관이 파산할 경우 금융시장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대형 위기 때마다 각국 정부는 고민스럽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각국 정부들은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까? 대체로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위험에 빠진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방식을 쓴다. 이런 이유로 대마불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만약 은행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저축은행이 위기에 빠진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금융시장이 붕괴될 정도의 심각한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는 한 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 파산을 용인할 수도 있다. 그래야 시장에 경각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2011년에 20개가 넘는 저축은행이 연쇄적으로 파산했던 사례가 있다.
한국은행 발표자료에 따르면 2022년 9월 말 기준 저축은행, 증권 등 제2금융권의 부동산 PF 위험노출 규모는 대출 91조2000억원, 채무보증 24조3000억원 등 합계 115조5000억원으로 집계됐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덩달아 연체율까지 급증하고 있다.
PF 부실이 급증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 부동산시장의 장기 활황으로 인해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한 시장 참여자들이 늘어난 상황에서 미국의 기준금리가 불과 1년 새 0%대에서 5%로 급등했기 때문이다. 1년 전 대출받았던 투자자들 중 본인의 대출금리가 1년 만에 2배 이상 폭등할 거라고 예상한 투자자는 없다. 이 여파로 부동산시장이 순식간에 냉각되면서 부실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만약 중소형 증권사나 저축은행이 유동성 위기를 겪는다면 금융당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유시장경제하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들은 도태시키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금융 시스템 자체가 위협받는다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의 점검에 따르면 한국에서 예금자 보호한도인 5000만원 이상을 1개의 금융기관에 예금한 예금자 수 비율은 고작 1.9%에 불과하다. 나머지 98.1%의 예금자는 5000만원 이하로 예금하고 있다는 점에서 뱅크런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저축은행 예금자들의 경우 과거 저축은행 연쇄 부도 당시의 학습효과로 인해 5억원을 예금할 경우 10개 이상의 저축은행에 쪼개는 방식으로 예금자보호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건 기본 상식이 됐다. 이렇게 안전판이 많은 상황이지만 실제로 저축은행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금융당국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무리한 투자로 손실을 보고 있는 금융기관들은 분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히지만 막상 저축은행이나 중소형 증권사가 1개라도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금융 신뢰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5000만원 이하로 예금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분위기에 휩쓸려 무차별적인 뱅크런이 일어날 수도 있다.
미국 연준은 글로벌 은행들이 파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최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추가 인상해 5%의 고금리로 만들었다. 그만큼 인플레이션 위기 또한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런 고금리 환경은 낯설다. 살얼음판 같다.
한국의 은행들은 튼튼하다. 하지만 제2금융권까지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 위기 발생 시 금융당국은 모럴 해저드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아야 할지를 두고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완벽한 대비 태세를 갖춰야 할 때다.

2023년 05월호
리먼 쇼크와 다른 '초고속 연쇄 붕괴극'...글로벌 은행 위기의 실체는?
‘신용 위험’ 안도감 속 ‘가격 변동 리스크’는 간과
미국 은행 자산 시가평가하면 절반이 자본 잠식?
예금 유출 속 수익성 악화 직면...조달비용 상승
| 이홍규 기자 bernard0202@newspim.com
2008년 이른바 ‘리먼 쇼크’ 이후 세계 주요 은행은 자기자본을 강화했기 때문에 금융 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불과 몇 개월 전까지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뱅크의 파산, 크레디트스위스(CS)의 구제 합병에 이르기까지 은행들의 ‘초고속 연쇄 붕괴’는 이런 상식을 뒤엎었다.
방아쇠는 SNS발 뱅크런, 발단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나서 은행권 경영 불안을 진화하려고 했지만 불안감은 다른 은행으로 옮겨붙는 분위기다. 투자자와 당국자가 안심하는 사이 물밑에서는 새 위기가 싹트고 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새 위기의 서막이었을까. 최근 시그니처와 SVB, CS의 연쇄 붕괴 이면에 대한 분석으로 관련 물음의 답을 알아보고자 한다.
최근 일련의 은행 붕괴극은 ‘서브프라임론’이라는 특정 상품이 진원지가 된 리먼 쇼크와는 다른 성격을 띤다. 사업에 대한 의구심 속 소셜 미디어에서 불안감이 확산한 것이 ‘뱅크런’을 일으켜 순식간에 파국으로 몰아넣은 게 특징이다. 또 은행의 유동성 면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특히 CS는 자기자본비율이 당국의 기준보다 높은 데다 업계에서도 상위권에 속해 재무적으로는 오히려 건전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번 연쇄 붕괴극은 정보가 빠르게 확산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서는 아무리 건전하다고 해도 신뢰를 잃으면 초고속으로 몰락할 수 있는 은행업 위험성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이번 붕괴극의 방아쇠는 소셜 미디어발 뱅크런이었다지만 발단은 따로 있다. 보유 채권의 평가손실(SVB)과 경쟁력 확보 실패에 따른 예금 감소(CS)다. 각기 다른 이유로 보이지만 현재 모두 은행권이 직면한 위험과 과제라는 점에서 함의가 있다. 종전보다 은행권의 자본비율이 건전해졌다는 이유로 개별 문제로 국한해 볼 사안은 아니라는 얘기다.
미국 은행 절반이 자본 잠식?
SVB의 파산은 리먼 쇼크 이후 금융 규제로 ‘신용 리스크’가 작아졌다고 해도 ‘가격변동 리스크’는 여전하다는 점을 각인시켜준 사례다. 그동안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금리 상승에 의한 채권 가격 변동의 위험성은 간과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동안 잊혀진 불편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은행은 안전할까. 3월 24일 SSRN에 게재된 ‘2023년 통화긴축과 미국 은행의 취약성: 시가평가 손실과 비보험 예금자의 이탈?’ 논문에 따르면 미국 은행 4800여 곳의 자산(국채 등 보유 유가증권, 부동산 대출과 일반 대출 등 한정)을 시가평가하면 2조2000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하고 절반에 가까운 2315곳의 자기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자본잠식)가 된다고 한다.
또 시가평가 손실액이 2조2000억달러인 반면 은행권의 자기자본은 2조2000억달러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평가대로라면 미국 은행권은 시가평가상 파산에 가까울 정도로 부실한 상태에 있는 셈이다. 논문 저자들은 “은행 대차대조표상의 모든 자산이 아니라 부동산 대출과 기타 자산, 유가증권 및 대출의 가치만 하향 조정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추정치는 보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은행 다수가 이자율 헷지를 하고 있고 자산 모두가 시가평가 대상도 아니며 금리 상승기에는 손실만 일방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 수익도 발생하는 만큼 관련 조사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관련 논문은 은행 자산이 그만큼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SVB 사태에서도 시가평가 대상이 돼 평가손실이 발생한 채권 등 유가증권은 보유분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이젠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미국 은행의 국채와 모기지담보부증권 투자분에서는 이미 막대한 평가손실이 발생했다. 2020년 이후 불어난 예금을 관련 채권에 투자했지만 금리 급등으로 가격이 떨어진 탓이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미국 은행의 보유 유가증권 평가손실은 작년 4분기 6200억달러로 1년 전의 80억달러에서 78배가량이 됐다. 어떻게 보면 SVB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는 셈이다.
예금 유출 속 수익성 악화 직면
자체적인 경영 재건 노력에도 예금 이탈을 막지 못한 CS의 사례 역시 은행권 전반이 마주한 위험이다. CS에서는 경영 불안 우려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작년 10월부터 예금 이탈이 꾸준히 발생했다. 적자의 늪에서 나오려고 구조조정에 착수했으나 경영 재건 계획의 핵심인 부유층에서 매일 100억스위스프랑이 넘는 자금이 빠져나갔다. 그 뒤 SVB가 파산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자금이 인출됐다.
경영 부진은 CS 개별 문제일 수 있어도 예금 급감은 은행권 전반에 해당한다. 작년 미국 상업은행의 예금은 1948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해 순인출액이 2780억달러로 집계됐다. 국채 금리 등이 높아지자 자금 예치의 동기가 사라진 까닭이다. 은행에 예금은 비용이 적게 드는 사업자금원이라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자금력이 약한 은행일수록 타격이 크다. 회사채 시장 등에서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현재 은행 사이에서는 예금 유출을 막으려고 금리 인상 경쟁에 돌입했다. 블룸버그통신(3월 6일)에 따르면 미국 은행 10여 곳의 1년짜리 CD(양도성예금증서) 금리는 연 5%다. 대형 은행으로 한정하면 훨씬 낮지만 웰스파고에서 11개월 만기 연 4% CD 금리도 나왔다. 1년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정책금리 인상 전 대형 은행의 평균 1년 CD 금리는 0.25%였다.
예금 유출을 막기 위한 금리 인상은 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수익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경기 냉각에 따른 대출 둔화나 침체에 대비한 대손충당금까지 고려하면 수익 창출 환경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바클레이스에 따르면 대형 은행의 순이자이익 증가율은 작년 22%(중앙값)에서 올해 11%로 하락이 예상된다.
당장 은행권 불안이 정부나 통화당국의 지원으로 일단락될 수 있다고 해도 경영 상황은 종전보다 어두워질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규제는 한층 강화하고 자금조달 비용은 상승하며 대출과 유가증권 투자에 대한 시각은 더 보수적으로 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용 부담은 커지는 한편 수익 창출의 통로는 위축돼 결국 수익성 저하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미국 금융 부문 평론가 로버트 암스트롱은 “병리학적 비유를 하자면 은행에 대한 공적 지원으로 파산 위기가 진정되면서 은행의 ‘심장마비’ 단계가 지났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이익 감소라는 ‘암’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은행이 있는지 지켜봐야 한다”며 “예금이 가장 많이 이탈하는 취약한 은행일수록 신규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마진이 가장 많이 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