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로 알려진 김주애의 후계자 낙점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사실상 북한 김일성 일가의 4대 세습 군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분석과 아직 확정적으로 보는 건 무리라는 진단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김주애의 공개 석상 등장 이후 그가 김정은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관측은 점차 힘을 얻어온 게 사실이다. 후계자가 아니라면 10살 남짓한 딸 주애에게 ‘존경하는 자제분’ 운운하는 찬양 표현을 쓰지 않을 것이란 해석도 이어졌고, 국가정보원이나 통일부를 비롯한 우리 당국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지난 3월 중순 이후 두 달 가까이 김주애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김정은의 주애 띄우기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계기로 한 일정 등에도 주애가 등장하지 않자 후계 문제와 관련해 뭔가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관망까지 나온 것이다. 지난 3월 15일 북한군 항공육전 부대의 낙하산 훈련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딸 주애가 참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광혁 공군사령관, 훈련부대 관계자, 박정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김정은, 딸 김주애, 리영길 북한군 총참모장. [사진=조선중앙통신]
‘향도의 위대한 분들’ 표현 썼다 삭제 소동
김정은이 딸을 공개 석상에 처음 드러낸 건 지난 2022년 11월 1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을 시험 발사하는 평양 순안공항 활주로였다. 그리고 이튿날 관영 선전매체들은 “김정은 동지께서 사랑하는 자제분과 함께 나오시었다”고 대대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이후 북한의 표현은 ‘존귀하신 자제분’, ‘존경하는 자제분’ 등으로 수위를 올렸고 열병식 본부석과 군 또는 민간 행사의 주빈석에서 김정은과 함께 존재감을 과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올 들어서는 그 활동 범위가 넓어진 데다 표현 또한 극존칭으로 이어지면서 김주애가 후계 지위를 굳히는 듯한 분석까지 대두했다.
특히 지난 3월 16일 자 노동신문은 김정은과 딸 주애를 염두에 둔 듯 ‘향도의 위대한 분들’로 표현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신문은 하루 전 평양 외곽 강동종합온실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 부녀의 소식을 전하면서 “김정은 동지께서는 열광의 환호를 올리는 군인 건설자들과 군중들에게 오래도록 손저어주시며 따뜻한 답례를 보내셨다”며 “향도의 위대한 분들께서 당과 정부, 군부의 간부들과 함께 강동종합온실을 돌아보시었다”고 소개했다.
길을 인도하는 행위나 사람을 지칭하는 향도(嚮導)란 표현은 북한에서 주로 최고지도자와 관련해 사용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김일성의 후계자 시절 ‘향도성’(길을 알리는 별)으로 불린 적이 있다.
북한 매체의 ‘향도’ 표현 사용을 두고 김정은이 사실상 주애를 후계자로 내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왔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당 총비서이기도 한 김정은의 내락 없이 이런 찬양이나 수식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다.
하지만 북한은 조간신문인 노동신문에 썼던 이 표현을 같은 날 오후 조선중앙TV를 통한 녹화방송 때는 슬그머니 빼버렸다. 김정은 동정을 전한 북한 아나운서 이춘희는 이 문구 대신에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는 당과 정부, 군부의 간부들과 함께...”라고 말했다.
북한이 노동신문에 썼던 표현을 슬그머니 빼버린 배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전검열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특히 김정은이나 그 일족과 관련한 사안이라면 더욱 꼼꼼하게 챙기는 북한 매체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여러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내부적으로 ‘향도의 위대한 분들’이란 표현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분들’이란 대목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김주애를 어느 정도 염두에 뒀을 문제의 표현이 지나치다는 신중론이 작용했을 공산이 커 보인다.
치밀한 북 후계전략에 우리 대응은 너무 안이해
이런 상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북한은 김주애의 등장 문제를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여기면서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피드백을 챙기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딸의 등장과 동시에 여동생인 김여정의 수행횟수를 확 줄이고, 영상 등에 등장하는 것 역시 최소화한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자신의 딸이자 가업을 이어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경영자(CEO) 혹은 그 후보군을 키우는 중대사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른바 ‘혁명의 계승’ 차원이란 얘기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 내부에서 김주애의 등장이나 북한 김정은의 후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안이해 보인다.
언론은 피상적인 모습에만 천착해 김주애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에 초점을 맞춘 흥밋거리를 쫓는다. 어느 한 매체가 쓰면 마치 경주마가 앞만 보며 질주하듯 보도를 쏟아내는 형국이다.
정부 당국이나 연구기관, 전문가 그룹도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근거 없이 김정은의 딸이 후계자가 될 것이란 단정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다. 학술적인 논거 없이 그저 북한 선전매체의 문구나 관영TV가 전한 영상이나 사진만으로 이런저런 주관적인 해석까지 더해 언론의 주목이 될 만한 주장을 펼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우리가 목도하고 있고 북한 매체들이 ‘자제분’이라고 칭하는 10살 정도인 여자아이가 ‘김주애’라고 판단할 제대로 된 근거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한 번도 ‘김주애’라는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
정부 당국이나 국가정보원 등에서 국회 정보위 보고 등을 통해 김주애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과거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던 시절 국정원이 이름을 ‘김정운’으로 잘못 파악했던 전례가 있는 터라 불안한 구석이 없지 않다.
10살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어른스러운 것 아니냐는 의문 제기에 국정원은 “원래 좀 덩치가 크다는 첩보가 있었다”고 답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칫 언론 보도나 학술적 연구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사안이지만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추적이나 연구 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2022년 11월 18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딸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을 살펴보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딸을 공개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사진=조선중앙통신]
‘누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 쏠려
돌이켜보면 이런 미덥지 못한 모습은 후계자 김정은 시절의 데자뷔다. 당시 우리 언론과 학계는 김정일의 후계자를 놓고 성혜림과 사이에서 낳은 장남 김정남(2017년 2월 북한 공작원에 의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이 유력하다는 관측을 상당 기간 제기했다.
하지만 그가 일본 공항 밀입국 과정에서 노출되면서 낙마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김정일과 고용희 슬하의 김정철(김정은의 친형)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후 김정철이 호르몬계 이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 나왔다.
결국 막내인 김정은이 권력을 거머쥐었고 이 과정에서 학계·언론의 관심은 온통 ‘세 아들 중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에만 쏠렸다. 그러다 보니 북한의 3대 세습이 가져올 수령 독재의 공고화나 핵·미사일 도발의 고도화, 주민의 인권유린과 식량난 등의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김정일 후계권력 구축작업이 한창이던 2010년 3월 정부의 외교안보를 총괄하는 한 고위급 인사는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되신 분”이라고 지칭하는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의 간판을 내걸고 전대미문의 3대 세습을 진행하는 북한 체제에 대해 피상적이고 흥미 위주의 접근을 하는 바람에 정부 내에서조차 비판적 접근이 이뤄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이번에도 재연될 조짐이 역력하다. 북한 체제의 본질이나 수령 독재, 이른바 백두혈통 계승론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추적 없이 얄팍한 분석이나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북한 연구나 관련 취재·보도에 대한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문제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자성도 이어진다. 김주애를 내세운 김정은의 심리전에 대책 없이 끌려다니는 양상이란 비판까지 제기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건 김주애를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김정은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고 거기에 맞춰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사실 김정은이 왜 10살밖에 되지 않은 딸을 공개 석상에 데리고 나와 부각시키고 ‘후계’ 관련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40살의 청년지도자가 권력 누수라는 부담이 따를 수도 있는데 일찌감치 후계자를 키우려 어린 딸을 대동한다는 게 영 찜찜하기 때문이다.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북한도 딸이 후계자 될 가능성은 열어놓아
김주애가 후계자가 아닐 것이라며 그 이유로 ‘아들이 아닌 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전문가의 분석도 근거가 약하고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북한이 가부장적인 사회인 데다 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수령의 지위가 계승되는 구조라는 점에서 여성이 후계자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북한의 후계자론은 ‘인물 본위’를 강조하면서 “인물이 선출의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표징이고 기타는 모두 상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청년이건 장년이건 관계없이 특출한 인물이면 후계자로 선출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성·여성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 같은 후계자론에 입각해 본다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후계자 반열에 오르기 어렵다. 북한 후계의 기준이나 원칙을 담은 이 책이 “수령과 후계자는 세대적 관계가 같은 세대가 아닌 앞선 세대와 다음 세대와의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이 자신의 자녀가 어리거나 급작스런 와병 등의 사태로 여동생인 김여정에게 통치권을 가교 형태로 이양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4대 세습이 아니다. 형제간의 수평적 권력 이동이자 ‘3.5대 세습’ 정도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김정은이 후계 문제 등과 관련해 결정을 내릴 때 이런저런 틀에 얽매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이 권력을 넘겨받을 후계자가 되는 시점에 나온 북한 후계자론은 평양 권력을 세습해 가는 데 있어 일종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이에 대한 면밀한 이해나 연구가 없이 이런저런 속설이나 속칭 뇌피셜만으로 내밀하게 움직이는 북한 후계와 관련한 동향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건 무리다. 결과적으로 답이 맞는다 해도 과정은 틀리다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후계자 문제는 아직 단정적으로 말하거나 결론 내리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앞으로 다양한 첩보와 관련 자료를 수집해 학술적·정책적 연구와 분석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치밀한 전략하에 내놓는 선전 미디어에 현혹돼 북한 연구는 물론 정책 수립 등의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독재 체제의 세습이 가져올 문제점을 인식하고 면밀하게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