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신문에 “사상 초유 시련” 표현 등장
뿔난 김정은 ‘8천만 겨레’ 표현 금지도
스위스 유학시절 대남 열등감 느낀 듯
|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newspim.com
새해 들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행보를 보면 좌충우돌하는 듯한 형국이다. 전술핵으로 대남·대미 위협을 노골화하고 핵잠수함 건조까지 공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식량 부족과 주민 생필품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지난 1월 29일 자 보도에서 김정은이 하루 전 잠수함 발사 전략순항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했으며, 핵추진 잠수함 사업도 점검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김정은이 핵잠수함 건조사업을 “구체적으로 요해(了解)했다”며 “핵동력잠수함과 기타 신형 함선 건조사업과 관련한 문제들을 협의하고 해당 부문들이 수행할 당면 과업과 국가적 대책안들을 밝혔으며 그 집행 방도에 대한 중요한 결론을 줬다”고 전했다.
그런데 노동신문은 2월 5일 자 보도를 통해서는 현 상황을 “사상 초유의 시련”으로 평가하면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토로하고 나섰다. 신문은 1면 정론(政論)을 통해 평양과 농촌지역의 동시 발전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 거대하고 사변적인 투쟁은 사상 초유의 시련과 난관이 겹쌓이는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장문의 글에는 “모진 시련”, “최악의 난관”, “엄혹한 도전” 등의 표현이 거듭 등장한다.
김정은은 앞서 1월 1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현 시기 인민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서 중요한 문제는 수도와 지방의 차이, 지역 간 불균형을 극복하는 것”이라며 20개 군에 10년 동안 공장 하나씩을 지어 모두 200개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생필품 부족 타개 등을 주장한 김정은의 발언 중 눈길을 끈 건 “개성시가 자체로 살아나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북한의 지방발전 계획을 완수하자는 선전포스터.
‘개성시 아사자 속출’ 사실상 인정한 김정은
지난해 2월 대통령실과 통일부는 “개성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정보판단을 밝혔다. 북한 지역에서 비교적 살 만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개성에서 굶어죽는 일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는 발표에 발끈하고 나설 만한 일이었지만, 대남 비난 전담역을 맡은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물론 관영 매체들은 함구했다. 그런데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직접 연설을 통해 개성 지역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셈이다. 한때 북한에서 그나마 살림형편이 나은 편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개성공단 가동 시에는 125개 우리 기업에서 5만3000여 명의 근로자가 일하면서 혜택을 누렸던 개성 지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 내부의 상황이 이런데도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敵對)’에 기초한 ‘국가 대 국가’ 관계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노골화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망언 수준의 발언을 쏟아낸 건 지난 1월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0차 회의에서다. 식량난 등으로 인한 주민 불만을 의식한 듯 그는 연설 서두에 노동당의 정책노선에 따라 북한 경제가 얼마나 큰 성장을 하고 있는지를 왜곡·과장해 선전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김정은은 이어 남북관계를 언급하면서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완전한 두 교전국 관계”라고 주장했다. 또 대한민국 헌법 3조가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 점을 거론하면서 이에 맞대응해 관련 조항이 없는 북한 헌법의 개정 필요성까지 제기했다.
최고인민회의는 이 회의에서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등 3곳을 폐지했다. 김정은은 이를 두고 “평화통일을 위한 연대기구로 내왔던 우리의 관련 단체들을 모두 정리한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수불가결한 공정”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폭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민들이 ‘삼천리금수강산’이나 ‘8천만 겨레’ 같은 표현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두고 “북과 남을 동족으로 오도하는 잔재적인 낱말”이란 비판과 함께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 고양사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해당 조문에 명기해야 한다”며 헌법에 이를 담을 것을 지시했다.
이 같은 김정은의 인식은 앞서 지난해 12월 열린 노동당 제8기 9차 전원회의(12월 26~30일) 보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남북관계가 적대이자 교전국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극단적 발언까지 치달았다. 그러면서 노동당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고, 투쟁 원칙과 방향도 전환할 것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침공과 점령을 묘사한 선전포스터.
“식민지 졸개 불과한 족속” 등 거친 표현 쏟아내
대남 문제와 관련한 김정은의 발언들을 분석해 보면 첫째로 그가 한국에 대해 엄청난 좌절과 열패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대한민국 것들’ 운운하며 애써 깎아내리려 애쓰지만 결국 ‘넘사벽’(넘어설 수 없는 높은 벽)임을 현실 속에서 매 순간 절감하고 있다는 걸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양자·다자 외교 무대를 오가며 반도체와 AI(인공지능), 전기차 등 미래 먹거리를 선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해 김정은은 외톨이 신세로 칩거해 왔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고립된 푸틴 대통령을 만나 재래식 포탄을 주고 위성기술을 지원받았지만 수출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진격하는 K-방산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세계가 열광하는 K-팝에 한류문화가 선도적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지만 김정은이 할 수 있는 건 이를 막기 위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본 북한 청소년·학생을 징역 몇 년에 처하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뿐이다. 그를 짓누르고 있는 대남 콤플렉스 증세가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둘째는 남북 당국 관계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가 배경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8년 초 김정은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유화 공세를 펼쳤다. 판문점과 평양 등에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내친 김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정상회담까지 가졌다. 하지만 핵과 미사일에 여전히 집착하면서 국제사회를 기망하려는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은 건 당연했다.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본 처참한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며 화풀이도 했지만 정상회담 성과물을 챙겨 훌쩍 좌판을 걷고 떠나버린 ‘전직 대통령’으로부터는 아무런 울림이 없었다.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대북 정책 전환을 채근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한미일 공조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졌고 대북 제재의 압박은 평양 권력을 호흡곤란에 빠뜨렸다. 김정은이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괴뢰들의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며 싸잡아 비난하게 된 건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여동생인 김여정은 아예 문 전 대통령을 향해 “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라고 비난하며 “참 영특하고 교활한 사람”(1월 2일 자 담화)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셋째는 파국에 이른 경제 문제에 대한 자신감 상실이다. 무엇보다 집권 13년 차에 이르는 동안 4차례의 핵 실험을 거치는 등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면서 북한 체제는 경제·사회적으로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대북 제재와 국제적 고립은 김정은이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딸 주애와 양계장을 방문해 닭을 살펴보고 있다.
경제·민생 문제 자신감 잃은 김정은
2500만 인구 가운데 40%인 1100만 명이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유엔 산하 기구의 지적이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작년 곡물 생산이 103% 늘어난 것처럼 허풍(103% 증산은 본래 2배 넘게 늘었다는 의미)을 떨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103%로 늘어났다”는 교묘한 말장난을 벌인 게 드러난다. 결국 3% 증가에 그쳤고 그마저도 신뢰하기 어려운 수치라는 게 우리 대북 부처 당국자들의 지적이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김정은의 대남 적대감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대한항공기 폭파와 아웅산 테러 등 대남 도발을 일삼던 아버지 김정일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 북한 권력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주적(主敵)’ 인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배경 중 하나는 김정은과 그의 형 정철, 여동생 여정과 함께한 스위스 조기유학 때 형성된 한국에 대한 반감이고,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뇌리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10대 시절 부모와 떨어져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 머물던 김정은은 한국의 대사관 직원, 상사 주재원 등의 자녀와 함께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양에서 온 고위층 자제 정도로 여겨졌고, 이에 호기심을 갖고 학교 행사 등에서 관심을 보인 한국 학부모 등 관계자에게 매우 무례하고 감정적인 언행으로 대응했다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대북전문가인 빅터 차 박사는 그의 저서 ‘불가사의한 국가(The Impossible State)’에서 김정은이 유학 시절 짝사랑했던 한국 여학생 성미에게 그네를 밀어주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계속 치근대는 정은에게 성미가 “하지 말라고!”라며 소리치자 김정은은 분노를 삭이며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린 북한 소년 김정은에게 남한의 모든 것은 다가서기 힘든 금단의 세상이었을 수 있다.
대한민국과 ‘헤어질 결심’을 굳힌 듯한 김정은의 행보는 거침없이 이어질 기세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 하나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철거 지시다.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수도 평양의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이라며 불쾌감을 보였다. 마치 2019년 10월 금강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현대아산이 지은 건물을 보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고 했던 걸 떠오르게 하는 발언이다.
2001년 8.15 때 완공된 이 기념탑은 높이 30m에 너비는 6.15공동선언을 상징하는 61.5m로 만들어졌다. 무게가 60kg에 이르는 잘 다듬어진 화강석 2560개를 붙여 만들었다니 북한 당국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북한은 이른바 조국통일 3대헌장을 금과옥조로 여겨 왔다. 김일성 집권 시기에 이뤄진 △7.4남북공동성명(1972년)의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노동당 6차 대회(1980년 10월)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1993년 4월)에서 내놓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이 그것이다. 1994년 7월 심근경색으로 급사한 김일성이 마지막 서명한 것도 통일 관련 문건이었다면서 김정일이 이른바 ‘통일 유훈’을 받들었다고 선전해 왔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응축해 놓았다고 볼 수 있는 3대헌장기념탑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할아버지이자 선대(先代) 수령인 김일성의 레거시(legacy)를 단박에 없애버린다는 의미다. 이런 김정은의 행보에 노동당과 군부 원로 세력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눈치 빠른 일부 주민들도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꿈틀거릴 수 있다.
김정은 대남 적대 입장에 한국 내 친북세력도 당혹감
반민족·반통일을 노골화한 김정은의 폭주는 한국 내 일부 세력이나 단체에도 당혹감을 안겨줄 게 분명하다. 김일성의 통일 방안을 찬양하며 반정부·반미 투쟁에 청춘을 불사르고 이슈마다 북한 챙기기와 감싸기에 매달려온 이들에게는 김정은의 대남 적대와 ‘국가 대 국가’ 발언이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당국의 불허에도 3대헌장기념탑 준공식 참석을 강행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찾아서는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글을 남긴 친북 성향 인사들은 헛헛한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을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북한이 6.15공동선언에 그토록 담으려 애쓴 ‘우리민족끼리’를 신주단지 모시듯 해온 이들은 망연자실할 것이란 측면에서다. 이적단체로 최종 판결받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북측본부와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등을 하루아침에 없앤 김정은의 결정에 ‘낙동강 오리알’이 돼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란 말이 대공수사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한다.
사실 김정은의 커밍아웃으로 모든 게 명명백백해졌고, 판문점과 평양·백두산에서 그가 보인 웃음 뒤에 가려졌던 본색이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맹목적으로 북한 감싸기에 나섰던 이들에게 김정은의 독설은 매우 쓰지만 좋은 약이 될 것이란 말도 나온다. 청춘 시절 군사독재·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불만이나 반발 때문에 북녘의 주체사상과 반제·자주 슬로건에 매혹당한, 그래서 평생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념의 포로가 된 이들에게 마지막 탈출할 수 있는 구명정이 던져졌다는 것이다.
김정은도 나름대로의 포석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적대화와 대립각 세우기로 대남 도발의 명분을 축적하고, 핵·미사일 위협으로 한국 내 여론 분열을 꾀할 수 있다. 그 결정적 계기는 4월 총선으로 점쳐진다. 국가정보원은 지난해 12월 “김정은이 12월 1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훈련 때 측근 간부들에게 ‘내년(2024년) 초 남한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힌 바 있다. 한반도 긴장 고조로 분쟁지역화해 우크라이나와 중동, 대만 문제에 쏠린 미국 등 서방의 관심을 끄는 전술적 도발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 섞인 전망도 있다.
김정은은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의 화려한 귀환을 기대하는 듯하다. 북핵 인정과 한미합동군사연습의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을 놓고 트럼프와 또 한 번의 담판을 벌인다는 복안일 수 있다. 김정은이 연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지진 위로 전문을 보내면서 ‘각하’라고 깍듯하게 호칭한 건 납치 일본인 문제를 내세워 북일 국교 정상화 등을 꾀하려는 또 하나의 포석일 수 있다.
김정은의 도발적 행보는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는 11월 미 대선까지 한반도 긴장 수위를 한껏 올리는 쪽으로 치달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은 북한판 지방개발 프로젝트인 ‘20×10 정책’을 밝혔고 가발 수출 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언뜻 보면 우리의 새마을운동을 따라 하려는 모양새다. 하지만 김정은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와 핵·미사일을 앞세운 공갈·위협이 거칠어지는 상황에서 아무런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경제발전 구상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