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표가 공관위원장 임명...공천권 집중 ‘불가피’
MB·친박 공천 학살 공포, 내년 총선 되풀이 우려
박영선 “100% 국민 공천하면 계파정치 필요 없어”
| 홍석희 기자 hong90@newspim.com
| 윤채영 기자 ycy1486@newspim.com
정당의 공천권은 역사적으로 당 총수에게 집중됐다. 1963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당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공천권은 당 총재에게 있다’는 내용 등을 당헌에 담았다. 지도부가 포함된 공천심사위원회가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투표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현행 공천 구조도 이때 시작됐다.
이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당대표가 공천권을 쥐고 있다 보니 당대표 의중에 따라 공천이 판가름 난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에 전문가들은 “공천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중대선거구제로 바꿔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각 정당의 공천 개혁이 가장 시급한 정치 개혁 주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등을 도입하거나 공천 심사과정을 투명하게 해 당대표 개인의 입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당 일각에선 현역 정치인에게 유리한 현행 공천 제도를 정치 신인들의 진입이 용이하도록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지난해 12월 7일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열린 ‘전국경실련 2024 정치개혁 운동’ 선언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정일구 기자]
당대표에게 집중된 거대 양당 공천권
국민의힘은 현행 제도상 당대표가 공천관리위원회 위원장(공관위원장) 임명 권한을 갖고 있고, 공관위원장이 공관위원을 구성하도록 돼 있다. 당대표에게 실질적인 공천 권한이 막강하게 실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실제 공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친이(친이명박계), 친박(친박근혜)의 이른바 ‘공천 학살’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이계는 친박계로 불리는 의원을 대거 공천에서 배제했다. 친이계인 당시 이방호 사무총장이 공천을 주도하며 박근혜 경선캠프를 이끌었던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김재원 전 의원 등 중진부터 초선까지 대거 탈락시켰다.
4년이 지난 후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당이 재편되며 다시 친박계가 주류로 급부상했다. 친이계의 공천 탈락이 줄줄이 이어졌다. 안상수, 진수희 전 의원을 비롯해 친이계 핵심인 박형준 전 의원까지 공천에서 탈락했다.
더불어민주당도 당대표에게 공천 권한이 집중돼 있다. 국민의힘과 마찬가지로 당대표가 공천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공관위원장 및 위원을 최고위원회 심의를 거쳐 임명한다.
다만 민주당은 ‘시스템 공천’을 통해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한 상태다. 시스템 공천은 당대표의 주관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당헌·당규에 명시된 객관적 기준에 따라 공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 당헌 제89조 4항은 당대표가 전체 선거구의 20% 이내로만 전략공천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략공천이 당대표 ‘사천(私薦)’의 핵심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이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 수차례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시스템 공천’을 정착시켜 계파 간 불만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야당 간사를 맡고 있는 전재수 의원은 통화에서 “추미애·이해찬 당대표를 지나오며 시스템 공천이 자리 잡았고 공천을 가지고 잡음이 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제도적으론 시스템 공천이 자리 잡았어도 여전히 당대표 개인이 구조적 허점을 파고들 여지는 남아 있다. 민주당 소속의 한 정개특위 위원은 “당대표가 (전략공천에) 과도하게 개입해서 자기 사람을 심거나 경선을 치르는 지역에서 여론조사 업체를 어떻게 할지 등 미세하게 개입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있다.
2024년 총선 ‘공천 학살’ 재연 우려
내년 총선거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여당의 차기 당대표는 사실상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다시 ‘공천 학살’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여당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처럼 대통령의 의중을 바탕으로 한 공천이 자행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논리다. 차기 당권주자들의 ‘윤심’ 경쟁이 치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의힘 혁신위 관계자는 뉴스핌 월간ANDA와의 통화에서 “당대표의 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행 공천 시스템으로는 (당대표 의중이 많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며 “가급적 시스템으로 보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 혁신위원은 “공천을 받기 위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며 “기준이 없다 보니 결국 잘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가 나온다. 사실은 각 지역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국회 정개특위에서 22대 총선 선거구획정위원으로 활동 중인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법과 제도를 갖춰놨다고 해도 운영 과정에서 얼마든지 (개입할 여지가 있다)”며 “법·제도하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권력이고, 당 수뇌부와 지도부는 그런 힘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야당은 차기 당권을 누가 가져가느냐에 차기 대권 구도 형성이 달렸다. 사법 리스크가 큰 이재명 대표를 둘러싸고 ‘친명’ 대 ‘비명’의 계파 갈등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각 당이 당헌·당규에 따라 공천 시스템이 정비돼 있어 마음대로 공천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공언하지만 공천룰 변경이나 공관위원장이 누구냐에 따라 공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홍근 원내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난 1월 1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3 신년인사회’에서 떡케이크를 커팅하고 있다.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해야...“한국엔 안 맞아” 반론도
공천 개혁과 관련해 정치권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안이 미국식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다. 오픈 프라이머리란 당원들뿐만 아니라 당에 속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도 후보자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경선제도다.
미국의 경우 당에서 후보를 공천하지 않고 주마다 후보자 지명을 위한 예비선거를 진행한다. 이후 각 당의 최다 득표자가 본선 후보로 지명돼 선거를 치르는 방식이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유권자들이 상향식으로 후보를 선출하기 때문에 당대표와 권력자의 영향력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 개혁의 여러 요소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오픈 프라이머리”라며 “100% 국민공천제를 하면 줄 서지 않아도 되고 계파 정치가 필요 없다”고 거듭 주장한 바 있다.
다만 후보의 인지도에 크게 좌우되는 오픈 프라이머리 특성상 현역 의원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미국의 경우 정당들이 평소 정치 신인 발굴에 꾸준히 투자하지만 우리나라는 신인들의 정치적 기반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오픈 프라이머리로 경선을 하면 현역 의원들이 정치 신인들을 상대로 질 이유가 없다”며 “우리나라 선거법상 정치 신인들이 평상시에 할 수 있는 선거운동이 거의 없다. 선거에 닥쳐서 갑자기 경선하자고 하면 이길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청년 정치인들은 오픈 프라이머리 형태보다는 후보들의 역량을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동학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당원과 지역구 주민들로 구성되는 일종의 ‘배심원제’가 돼야 한다”며 “배심원들 앞에서 토론도 하고 정견도 밝히면서 ‘저 사람이 우리 지역의 대표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더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불투명한’ 공천 과정...“심사과정 회의록 공개해야”
여야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정당의 현행 공천 제도는 철저히 당대표 1인의 주관적 개입이 용이한 구조다. 게다가 공천 심사과정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당대표는 공천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부담이 적다. 공천 과정에서 진행된 회의록 등을 외부에 공개해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단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조 교수는 “공천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공천 기준도 급박하게 설정되는 부분이 있다”며 “그래서 공천 과정에서의 회의록이나 근거가 되는 것들을 잘 모르게 된다. 공천한 근거나 회의록을 남겨두고 나중에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활동을 종료한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의 한 위원도 통화에서 “공천 기준을 볼 데이터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출마 희망자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본인 활동 내역을 올리거나 해서 공관위가 믿을 만한 자료를 토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이른바 ‘시스템 공천’이 정착했다고 자평하지만 조 교수는 국민들의 눈높이에선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공천 과정을 최대한 공개해 당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더욱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선도 실시하고 여론조사도 활용하기 때문에 분명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면서도 “여전히 국민들은 당 수뇌부의 입김이나 계파 나눠먹기나 파워 싸움이 있다고 느낀다. 당원·국민·전문가·시민단체가 그런 부분에 의혹이 없을 정도가 돼야 ‘시스템 공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당 수뇌부가 전반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식을 갖고 공천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러한 책임 의식을 끌어올려 공천 제도를 한 단계 발전시킬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