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구, 부산 등 영남권 유력 화랑들의 공세가 뜨겁다. 오랫동안 서울의 메이저 화랑에 비해 지역 화랑들은 정상권은 넘보지 못한 채 ‘지방 화랑’이란 타이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근래 들어 지역 화랑들이 서울 요지에 제대로 된 지점을 내는 것은 물론, 세계 미술시장까지 노크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 화제다.
대구의 리안·우손, 서울 분점 내고 해외시장 공략
그동안 ‘2등’ 취급을 받던 지역의 화랑들이 오히려 뛰어난 경쟁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어지간한 서울 화랑보다 훨씬 역량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2025년 들어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분점을 낼 정도로 세력을 키운 화랑 중에는 대구를 대표하는 리안갤러리(대표 안혜령)가 첫손에 꼽힌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아트컬렉터였다가 지난 2007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갤러리를 만들며 화랑 비즈니스에 뛰어든 안 대표는 개관 초부터 ‘글로벌 수준의 화랑’을 목표로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굵직굵직한 해외 정상급 아티스트 작품전 등을 개최하며 리안은 곧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톱 갤러리로 뛰어올랐다. 2013년에는 서울 경복궁 인근에 서울 분관을 만들어 서울 및 수도권 고객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023년 신축한 대구 리안갤러리. 지역 화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
리안은 여세를 몰아 2023년에는 지역 화랑으로는 최대 규모의 신관을 기존 화랑 바로 건너에 새로 건립해 주목받았다. 3개의 대형 전시실과 교육시설 등을 갖춘 리안갤러리 대구 신관은 작년 말 한국건축가협회가 수여하는 ‘2024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지난해엔 서울 통의동의 서울점을 증축하기도 했다.
또 다른 대구 화랑인 우손갤러리(대표 김은아)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2012년에 대구광역시 봉산문화길에 우손갤러리를 개관한 김 대표는 지난해 대구 본관의 증개축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말 서울 성북동 언덕에 서울 지점을 오픈하기도 했다. 서울 지점 개관전으로는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 국가관 대표 작가(1997년)로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파브리스 이베르 작품전을 선보여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들 화랑은 세계적인 블루칩 작가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전시를 대구 지역에서 개최하며 파란을 일으키는 등 국제 미술계 최신 흐름과 함께해 왔다. 지역 화랑이라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글로벌 미술계와 접점을 만들어온 것이다. 또 대구 등 영남권 미술애호가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고정 수요층을 안정적으로 다져가며 서울은 물론 세계 미술시장까지 공략 중이어서 주목된다. 부산 달맞이길의 조현화랑. 해운대에도 갤러리가 있다.
부산의 톱 갤러리 조현화랑 서울 신라호텔에 지점
부산을 대표하는 화랑으로 36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현화랑(대표 조현)은 지난해 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에 서울 분점을 개관했다. 조현화랑은 1989년 부산광역시에서 개관해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사조인 단색화 작가들의 개인전과 그룹전 등을 개최하며 부산 미술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왔다. 또 프랑스의 유명 작가 끌로드 비알라 전시 등 해외 미술전도 꾸준히 개최해 왔다.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과 해운대에 2개의 화랑을 운영해온 조현은 2024년 서울점을 개관하며 공격적인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이 밖에 대구 기반의 갤러리신라는 지난 2022년 서울 삼청동에 서울점을 개설했고, 서정아트는 부산과 서울에 동시에 갤러리를 개설하고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이 같은 지역 화랑들의 서울 진출은 근래 들어 지역 미술시장이 빠르게 성장한 것에서 기인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수도권 화랑의 작품 판매총액은 2017년 169억원에서 2022년 537억원으로 5년 만에 3배 넘게 증가했다. 또 전국에서 비수도권 화랑이 차지하는 미술품 판매액 비중도 같은 기간 7%에서 12%로 뛰어올랐다.
미술품을 수집하려는 고객층이 서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증가하면서 지역 화랑들의 입지가 커지고 경쟁력이 업그레이드됐다. 미술품의 수요 증가가 지역 갤러리의 확장과 서울점 개설을 가능케 하는 등 선순환을 이끈 셈이다.
서울의 고급 주택가인 성북동 언덕에 분점을 낸 김은아 우손갤러리 대표는 “지난 10여 년간 대구 미술계와 함께 성장해 왔다. 좋은 작품을 선별해 선보이고, 때로는 한 발짝 앞서가는 도전적인 작품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며 “대구의 예술애호가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데 이어 서울 고객과 접점을 만들기 위해 도전장을 냈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동은 ‘한국문화재 지킴이’인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간송미술관을 필두로 캔파운데이션의 오래된 집, BB&M, 옵스큐라, 제이슨함 갤러리 등이 자리 잡아 새로운 미술 거점으로 부상 중이다. 게다가 2026년에는 라인건설의 라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라인미술관도 개관할 예정이어서 서울의 ‘최신 아트 스팟’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 성북동에 지난해 말 문을 연 우손갤러리 서울.
지역 화랑들 해외 아트페어 참가로 세계시장 뚫어
지역 갤러리들의 성장에는 최근 몇 년간 한국 현대미술, 즉 K-아트의 국제적 위상이 훌쩍 올라간 점도 한몫했다. 2010년대 한국의 단색화와 실험미술이 미국 및 유럽 미술계에서 주목받자 이들 작가와 전속계약을 맺어온 지역 화랑들도 동반 성장했다. 지역 내 유망 작가를 발굴 육성하고, 해외 전시 등을 지원한 그간의 끈질긴 투자가 결실을 본 셈이다.
리안갤러리는 그간 남춘모, 김근태, 이진우, 김택상 등 이른바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 최근 그 결실을 보고 있다. 안혜령 대표는 “대구 중심가에 화랑을 개관하며 앤디 워홀, 알렉스 카츠, 데미안 허스트, 이미 크뇌벨 등 해외 유명 작가 작품전을 연속적으로 선보이는 동시에 한국 아티스트를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해외에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이제 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우수한 작가들을 전속으로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가 결국은 국제 미술계에서 그 화랑의 수준과 파워를 가늠하는 열쇠다. 앞으로도 이를 위해 진력하고, 해외 시장도 적극적으로 공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지역 화랑들은 해외 진출을 앞둔 국내 작가들의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아트바젤 홍콩은 물론 최근 들어서는 아트바젤 바젤(스위스)과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미국) 등 특A급 아트페어까지 진출하며 한국의 주요 작가들을 세계 메인 마켓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작년 말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 처음 참가한 리안갤러리와 우손갤러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고환율에 작품운송료, 부스비 등이 천문학적으로 올라 화랑으로선 부담이 크게 늘었으나 ‘더 큰 목표’를 향해 투자를 단행한 것이 ‘호평’이란 열매를 맺은 것.
김은아 대표는 “시대에 따라 미술의 트렌드는 달라지지만 좋은 작품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독창성을 견지하고, 대중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점을 예리하게 제시하는 작가를 앞으로도 계속 발굴해 한국과 세계 무대에 소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역 화랑들의 이 같은 적극적인 전략과 과감한 투자는 불황에 접어들어 활력을 잃고 있는 한국 미술시장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