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끌렸는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가
그렇다면 끌림에 따르라. 좋은 그림엔 좋은 기(氣)가 감도나니
|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김종학의 유화 ‘설악산풍경’(100호). 2005년 이상준 사장이 경매에서 3900만원에 매입했던 작품. 2년 뒤(2007년) 5억7000만원에 되팔았다. 오른쪽은 매입을 권유받았지만 활기가 없어 보여 고사했던 김종학의 유화 ‘해경’(30호). 2011년 5400만원에 거래돼 큰 편차를 보인다.
국내 기업인 중에는 미술계에서 ‘고수’로 불리는 컬렉터들이 꽤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필두로, 2세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그들이다. 도자기 컬렉터 윤장섭 성보문화재단 이사장, 티베트 불화 컬렉터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이사장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남들보다 한발 앞서 국내외 현대미술품을 수집한 박계희 워커힐미술관장(최종현 회장의 부인),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도 알아주는 고수다. 고서화에 능통한 이우복 전 ㈜대우 회장, 그리고 최근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이 두각을 보이고 있다.
200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경합 끝에 15억원에 매입해온 ‘조선백자대호’(달항아리). 이상준 사장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서울 강남지역에선 프리마호텔 이상준 사장(59)이 주목을 받는다. 샐러리맨 시절 월급을 털어 그림을 사기 시작해 30년간 무려 3000점을 수집했다. ‘조선 최고의 미’로 꼽히는 18세기 백자대호(일명 달항아리)를 뉴욕 경매에서 15억원에 매입해온 것을 비롯해 유명 작가에서 대학생 작가 그림까지 폭이 넓다. 이 중 1000점을 호텔 로비, 식음료업장, 객실에 비치해 호텔업계에선 ‘아트 경영’으로 유명하다.
1998년 프리마호텔 CEO로 취임한 이 사장은 호텔의 기존 이미지를 확 바꾸며 60억원이었던 매출도 5배로 키웠다. 그가 최근 미술품경매사 서울옥션(대표 이옥경)이 주최하는 ‘문화예찬-컬렉터의 선택’에 강사로 초대돼 자신의 수집 비법을 들려줬다. 월간 ANDA가 그 현장을 찾았다.
천경자 화백의 ‘편지 읽는 여인’(1호). 소품이지만 완성도가 높아 2005년 6000만원에 매입했다. 현 시세는 2억~3억원대다.
이 사장은 천경자 화백의 ‘편지 읽는 여인’이란 인물화로 강연을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꺾고 편지를 읽는 여인이 마음에 쏙 와닿아 2005년 K옥션에서 6000만원에 낙찰받았다고 한다. 엽서 크기만 한 작은 그림이었지만 구도와 표현이 좋아 경합이 대단했다는 것. 그는 “이 여인은 요즘도 늘 제 곁에 있어요. 잔소리도 안 하고, 명품백 사달라고도 안 하죠. 내내 편지만 읽고 있으니 참 괜찮은 여성이죠?”라며 웃는다. 이 인물화, 요즘 시세 수억원대다.
천경자 화백의 ‘여인’(8호). 오랫동안 아끼던 소장품으로, 올 3월 경매에서 7억8000만원에 팔렸다.
설악산에서 작업하는 김종학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는 대목에선 강사의 톤이 높아진다. 화폭 가득 꽃과 나무, 새가 강렬하게 어우러진 ‘설악산 풍경’을 이 사장은 2005년 3월 서울옥션에서 샀다. 아무도 사겠다는 이가 없어 유찰될 듯하길래 막판에 손을 들었다. 낙찰가는 3900만원. 호텔로 가져와 로비에 걸었는데 오가는 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기운이 펄펄 난다’며.
그런데 경매사 측에서 이 그림을 ‘다시 팔라’고 조르는 바람에 2007년 7월, 시험 삼아 내놓았다. 추정가 1억5000만~2억5000만원이었는데 엄청난 경합이 일며 5억7000만원에 팔렸다. 불과 2년 만에 14배나 오른 것이다. 주식, 부동산이 따라오기 힘든 수익률이었다. 이후에도 프리마호텔 1층 로비에 내건 작품들은 희한하게도 가격이 승승장구 올라 ‘대박 나는 명당터’라고들 한다.
하지만 같은 김종학 화백 작품이라 해도 편차가 있다고 이 사장은 강조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권했지만 어둡고 기운이 축 처져 고사했던 ‘해경’(30호)의 경우, 아니나 다를까 2011년 경매에서 고작 5400만원에 낙찰됐다. 그는 “그래서 작가 유명세만 보면 안 되는 거다. 김종학의 설악산 그림이 아무리 인기가 높다 해도, 작품에 따라 훗날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 우울하니 축 처지는 작품은 각광받기 어렵다. 기운이 펄펄 살아나는 걸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상준 사장은 김환기 화백의 추상화도 무척 좋아한다. 한국의 얼과 혼을 더없이 잘 녹여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7년 K옥션에서 20호 크기의 김환기 추상화를 2억원에 낙찰받았는데, 10년 뒤인 올 3월 서울옥션에서 6억3000만원에 되팔았다. 이 역시 수익률이 대단하다.
올 들어 가장 이슈인 이우환 화백 작품도 예로 들었다. 그는 “이우환 회화는 요즘 억대가 넘지만, 2005년까지만 해도 ‘조응’ 시리즈는 화랑마다 처치 곤란이었다. 그래서 ‘조응’(100호)을 3500만원에 샀다. 그런데 얼마 전 1억7000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그의 그림투자 수익률이 궁금해진다. 김종학, 이우환, 김환기 작품은 평균 9.6배의 수익률을 거뒀다고 귀띔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그는 “너무 배 아파 마세요. 3000점 중 되판 건 1%도 안 됩니다. 게다가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30년 전 운보 김기창 그림을 적금을 깨 500만원에 샀는데, 요즘 300만원이에요. 그나마 안 팔릴지 몰라요”라고 토로했다. 우리의 전통서화와 동양화를 컬렉터들이 너무 홀대해 값이 형편없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이 사장은 초보 컬렉터를 위한 아트투자 6원칙으로 △자신의 끌림을 존중하라(내면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시대에 부응하고, 주제의식이 뚜렷한지 살핀다(이런 작품은 대개 블루칩이다) △좋은 갤러리를 만나라(검증된 전문가의 판단과 정보가 중요하다) △작품의 출처, 이력이 분명한 작품을 선택하라(그래야 위작을 피할 수 있다) △도반을 곁에 두고 교류하라(유익한 정보를 나눌 수 있다) △자신만의 상한가를 정하라(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되 과욕은 금물이다)를 소개했다. 이어 미술품 수집은 취득세와 보유세가 없고, 양도세도 극히 일부의 고가 작품에 한해 적용되는 만큼 명작을 즐겁게 음미하면서 심안이 길러졌을 때 하나 둘 수집에 나서라고 조언했다. 초창기 아내가 ‘그림에서 밥이 나오냐?’며 힐난했지만 호텔 경영에 성공했으니 결국 밥이 나온 셈이라는 그는 혼자 누렸던 안복(眼福)을 앞으로 대중과 더 적극적으로 나누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