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버그에 따르면 지구촌의 150개 통화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2024년 초 이후 달러화에 대해 내림세를 나타냈다. 말 그대로 ‘슈퍼달러’ 기류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후폭풍이 지구촌 경제 곳곳에 번지는 모습이다.
캐리 트레이드 공식 깨졌다
먼저, 강달러는 외환시장의 캐리 트레이드 공식마저 흔들고 있다. 달러화로 자금을 조달해 고수익률을 제공하는 신흥국 통화 및 자산을 매입하는 전략이 지난 수십 년간 트레이더들 사이에 불변의 원칙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저금리 기조를 지속한 데 따른 결과였는데, 이른바 피벗(pivot, 정책 전환) 기대감이 크게 후퇴하면서 새로운 기류가 등장했다. 신흥국 통화로 자금을 조달해 달러화 자산을 매입하는 전략이 트레이더들 사이에 인기몰이 중이다. 실제로 이 같은 전략이 2024년 초 이후 9%를 웃도는 수익률을 창출했다. 반면 달러화 자금을 조달해 신흥국 통화 또는 관련 자산을 매입한 캐리 트레이더들은 2021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손실을 떠안았다.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소비와 고용 등 탄탄한 펀더멘털과 끈적한 물가로 인해 연초 6차례 금리 인하 기대감이 꺾였고, 연준 안팎에서 금리 인상 전망까지 등장하자 강달러에 힘이 실리는 상황.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 위안화와 태국 바트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여기에 체코의 코루나까지 캐리 트레이드의 통화로 동원되고 있다. 멕시코 페소화나 터키 리라화, 이집트 파운드화가 여전히 타깃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등 전통적인 캐리 트레이드가 뿌리 뽑히지는 않았지만 전례 없는 기류가 전개되고 있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월가는 말한다.
런던 소재 피델리티 인터내셔널의 폴 그리어 머니매니저는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아시아 통화에 대한 달러화 상승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며 “수익률과 베타가 낮은 아시아 통화로 자금을 조달하는 움직임이고, 그 밖에 경제 전망이 흐린 유로존의 유로화와 체코의 코루나 역시 조달 통화로 인기를 얻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전통적인 캐리 트레이드의 공식이 바뀐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이자율 차이와 통화 향방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신흥국의 금리 괴리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 기준금리가 5.25~5.50%로 23년래 최고치에 이른 가운데 과테말라(5.00%), 베트남(4.50%), 이스라엘(4.50%), 불가리아(3.80%), 몰도바(3.80%), 한국(3.50%), 중국(3.50%), 말레이시아(3.0%), 태국(2.50%), 대만(2.00%) 등 상당수의 신흥국 기준금리가 미국을 밑도는 실정이다.
신흥국 통화 전반에 걸쳐 약세 흐름이 확산되면 이들을 조달 통화로 하는 소위 리버스 캐리 트레이드(reverse carry trade)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다고 UBS는 말한다. 모넥스 유럽의 사이먼 하비 외환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외환시장의 트레이더들뿐 아니라 수출 업체들도 고수익률을 제공하는 달러화 자산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최근 수개월 사이 신흥국의 수출 업체들이 수익금을 달러화로 예치, 자국 통화로 환전하기를 꺼리고 있다는 얘기다. 리스크를 감안할 때 달러화 롱 포지션이 멕시코 페소화나 브라질 헤알화 등 신흥국 통화에 대해 더 나은 수익률을 창출하는 실정이라고 하비는 전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수출한다
달러화는 전 세계 모든 외환 거래 가운데 약 90%를 차지한다. 때문에 달러화가 상승하면서 한국 원화를 포함한 주요국 통화가 하락하면 미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 수입되는 상품의 가격이 뛰게 된다. 달러화로 거래되는 유가는 물론이고 곡물과 공산품까지 대다수 품목이 가격 상승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슈퍼달러의 파장은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달러/엔이 한때 160엔을 돌파, 엔화가 34년래 최저치로 떨어졌고, 원화 역시 달러화에 대해 2022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한·미·일 3국이 워싱턴에서 회동을 갖고 외환시장 안정 방안을 논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통화 약세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 전반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재무부에서 이코노미스트로 활약했던 브래드 세처 외교협회 연구원은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엔화와 위안화 약세는 일본과 중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슈퍼달러 기류는 주요국의 통화정책에도 교란을 일으켰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4월 24일 ‘깜짝’ 금리 인상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루피아화가 연초 이후 5%가량 하락하자 통화 방어를 위해 정책자들이 기준금리를 6.2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앞서 튀르키예도 지난 3월 예상 밖의 금리 인상을 단행해 월가의 시선을 끌었고, 스웨덴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를 연기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BC) 총재는 유로/달러 환율의 특정 레벨을 목표하지 않는다며 6월 금리 인하 가능성을 거듭 내비쳤지만 내부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번지는 모양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가브리엘 마흘루프 아일랜드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며 ECB의 금리 인하를 경계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