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베벌리힐스가 있다면 도쿄엔 롯폰기힐스
멋쟁이들 사로잡는 도심 속 ‘또 하나의 도시’
인근 미드타운은 디자인의 메카
|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일본 도쿄는 아침에 비행기를 타면 하루를 꼬박 여행에 할애할 수 있다. 제주도 가듯 가깝다. 1박2일 또는 2박3일의 짧은 여행에서도 많은 탐험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도쿄의 어디로 갈까?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단연 롯폰기(六本木)다.
롯폰기에는 수년 전부터 도쿄 사람들에게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롯폰기힐스(Roppongi Hills)와 미드타운(Midtown)이 있다. 유명 아트디렉터가 체계적으로 기획한 이곳들은 개발된 지 불과 10여 년 된 신생 지역이다. 따라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롯폰기에는 최신 단지만 있는 게 아니다. 도쿄를 대표하던 환락가답게 고졸한 옛 유흥가들이 한쪽에 포진해 있다. 쇠락해가는 곳들과 첨단시설이 이루는 대비는 기묘하면서도 흥미롭다. 롯폰기는 지역이 넓지 않아 이틀 또는 사흘이면 구석구석 완파(?) 가능하다.
롯폰기힐스, 청춘들이 몰려드는 곳
롯폰기힐스는 도쿄의 서남쪽, 즉 신주쿠 아래에 위치해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미나토 구이다. 이 복합단지의 심장은 지상 54층, 지하 6층의 모리타워다. 부동산개발 업체인 모리빌딩은 낙후된 롯폰기 지역에 주목해 도심 재개발 사업을 17년간 추진한 끝에 모리타워 등 8개 건물을 완공했다.
주상복합단지인 롯폰기힐스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 해도 무방하다. 10만9000㎡ 면적에 사무빌딩, 레지던스, 방송국, 특급호텔, 뮤지엄, 영화관, 야외공연장, 쇼핑센터, 전망대가 어우러졌으니 말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해 국제유치원까지 들어서 있다. 물론 시설은 최첨단이다. 2003년 롯폰기힐스가 조성되면서 롯폰기 지역은 도쿄의 멋쟁이들이 몰려드는 스폿으로, 또 고급스런 신흥 부촌으로 발돋움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모리타워의 지상광장인 ‘66플라자’로 올라오면 10m 높이의 초대형 거미조각 ‘마망’이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 출신의 여성 작가 루이스 부르즈아의 대표작이다. 모리문화재단이 설치한 이 조형물은 젊은이들 사이에 미팅 포인트로 유명하다. “거미 앞, 7시!” 이러면 약속 잡기는 끝이다. 그래서일까?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이 여럿이다.
마망 옆에는 52층의 전망대와 뮤지엄행 티켓을 파는 유리빌딩이 있다. 이곳에서 표를 끊고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면 모리타워 꼭대기의 웅장한 전망대와 뮤지엄에 닿는다.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2층의 도쿄 시티뷰에서 바라본 시가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원숭이. 인도 작가 하르샤가 모리미술관에 설치한 작품이다.
53층에 자리 잡은 모리미술관은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으로 불린다. 몇년 전까지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었는데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63스카이아트’가 생기면서 최고(最高)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일본 최대 현대미술관으로서 주목할 만한 기획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
데이트족들은 도쿄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도쿄 스카이뷰를 선호한다. 이 전망대는 도쿄타워를 비롯해 도쿄 뷰(특히 야경)가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스카이뷰를 감상한 후 카페에서 차와 간편식을 즐길 수 있다.
모리타워 49층에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아카데미힐스’가 있다. 지상 200m 상공에서 도시를 발 아래 두고, 포럼에 참가하거나 강의를 듣는 멤버십 클럽이다.
흥미로운 것은 ‘회원제 라이브러리’이다. 혁신을 모색하거나 정보를 원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멤버십 도서관은 연회비가 100만원이 넘고 매월 10만원가량의 이용료도 내야 한다. 일본은 ‘도서관 천국’이라 할 정도로 도처에 도서관이 즐비한데 굳이 고액 회비를 따로 내면서 회원이 된 이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개인 응접실에 들어온 것처럼 안락하게 조성된 소파에서 도쿄 전망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회원 간 소모임이 가능한 자리도 조성돼 있다. 공공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쾌적함이 느껴진다.
모리타워 동쪽에는 에도 시대부터 전해져온 연못과 정원이 있었는데 이 연못은 지하에 보존돼 있다. 그 위에 17세기 방식으로 재현한 모리정원이 들어섰다. 물론 연못도 새로 꾸몄다. 이 연못에는 우주선에서 부화한 우주 송사리가 헤엄치고 있고, 희귀종인 흰뺨검둥오리도 자라고 있다. 꽃들도 빠질 수 없다. 봄이면 황매화와 때죽나무·호접화·제비붓꽃이 차례로 피고, 여름이면 수련과 수국이 핀다.
벚꽃길과 어우러진 롯폰기힐스의 모리타워. 롯폰기힐스 바로 옆에 위치한 도쿄미드타운.
정원 곳곳에는 장 미셸 오토니엘, 마리코 모리 등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아티스트들의 조각이 들어서 있다. 정갈하게 꾸며진 전통정원을 거닐며 독특한 조각을 감상하다 보면 ‘예술 힐링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롯폰기힐스의 메인 도로인 케야키자카에는 론 아라드 등 글로벌 스타작가들의 예술의자가 설치돼 있다. 재질도 다르고 형태도 제각각인 13점의 스트리트 퍼니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도쿄에서 가장 창의적인 산책로일 듯싶다. 바로 옆 사쿠라자카공원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400m에 이르는 황홀한 벚꽃길이 꽃마중 나온 인파들로 가득 찼다.
롯폰기는 에도 시대(1603~1867) 초후모리가(家) 사람들의 거주지였는데, 젊은 무사 7명이 거사를 단행한 후 할복자살한 곳으로 유명하다. 메이지 시대에는 법률가의 대저택이 있었고, 2차대전 후에는 닛카위스키의 공장이 있었다. 롯폰기힐스가 생기기 전까지는 도로가 좁아 소방차 진입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리타워에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기업이 입주해 있고 뮤지엄, 호텔,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았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이뤘다.
롯폰기힐스의 이미지 캐릭터를 세계 정상의 미술가 무라카미 타카시가 만들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롯폰기힐스에서 5분쯤 걸어나가면 옛 유흥업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이트클럽과 바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초고층의 첨단 단지와 낡은 환락가는 묘한 대비를 이루며 롯폰기의 밤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너른 공원 끼고 조성된 미드타운, 롯폰기힐스에 도전장을 내밀다
롯폰기 북동쪽에는 ‘도시의 고급스런 일상’을 슬로건으로 내건 또 다른 복합단지 ‘도쿄 미드타운’이 조성돼 있다. 원래 일본 방위청이 있던 곳으로, 미쓰이 등 생보사들이 컨소시엄을 이뤄 도심 재개발을 주도했다. 요즘은 기업, 금융기관, 특급호텔, 아파트, 쇼핑센터, 병원이 입주해 있다. 전체 면적은 10만2000㎡. 롯폰기힐스와 엇비슷하다. 중심 건물인 미드타운타워는 54층(248m)으로 도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미드타운은 여타 복합단지와는 달리 녹지대 비율을 최대한 높여 한결 쾌적하다. 롯폰기힐스를 누르고 더 사랑받는 것도 이 점 때문이다. 특히 미드타운 입구에서부터 조성된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도시 생활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미드타운으로 나가는 전철역 출구에는 일본 출신으로 이탈리아 카라라(대리석 산지)에서 활동 중인 야스다 칸의 우윳빛 대리석 조각이 여행객을 맞는다. 부드러운 돌 조각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미드타운에 잘 왔어”라고 윙크하는 듯하다. 야스다 칸의 조각은 미드타운 입구에 한 점 더 설치돼 있다. 검은 대리석 조각으로서 첫 작품과 짝을 이룬다. 마치 음과 양, 낮과 밤처럼.
녹지대와 연결된 도쿄미드타운에는 흥미로운 숍과 레스토랑, 편의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서 있다. 도쿄 멋쟁이들 사이에 미드타운 라이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미드타운은 화제의 거점이다.
미드타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것은 너른 잔디공원이다. 폭신한 초록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쾌적한데 숲으로 우거진 공원이 이어진다. 도시의 허파다. 마침 따뜻한 휴일이어서일까? 아기를 데리고 나온 부부는 잔디에 앉아 햇살을 즐기고, 노부부들은 사이 좋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젊은 남녀들은 잔디에 벌러덩 누워 꽃향기에 취해 있다.
주류 회사인 산토리가 설립한 산토리미술관과 패션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주도한 디자인 전시관 21-21디자인사이트는 미드타운을 더욱 근사하게 해주는 문화공간이다. 산토리미술관은 거창하진 않아도 내실 있게 좋은 기획전을 열고 있어 놓쳐선 안 될 곳이다. 21-21 디자인사이트는 푸른 공원 옆에 나지막하고 넓게 지어진 건물의 모양새처럼 은근하게 디자인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전시관은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와 철판 지붕의 건물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정원의 구릉과도 잘 어울린다.
겉에서 보면 전시관은 땅 위로 드러난 게 별로 없어 왜소할 듯싶지만, 실내로 들어가면 반전이 기다린다. 지하를 깊이 파서 천장이 높은 전시실을 두 곳이나 조성했다. 가라앉은 가든도 있다. 전시관을 땅속에 묻은 셈이다. 이곳에선 신선한 프로그램들이 줄을 잇는다.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적인 사고를 전시하다’라는 역설적인 미션을 내세운 것도 돋보인다.
같은 쓰임을 지닌 물건일지라도 더 깔끔하고 유려하게 만들려는 ‘일본 디자인의 힘’을 확인케 한 미드타운은 그렇게 도쿄의 새로운 예술 발신지로 부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