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 속 뚝심있는 글로벌 리더
경영승계ㆍ사업재편ㆍ문화혁신으로 새 삼성 담금질
“가시적 성과에 집착...장기적 비전 안 보인다” 지적도
| 김신정 기자 aza@newspim.com
| 이형석 사진기자 leehs@newspim.com
“삼성전자가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말 주요 경영진을 모아놓고 던진 질문이다. 이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권오현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경영진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고, 회의장에는 정적만 흘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올 3월, 서울 강남의 삼성 서초타워에 있던 삼성전자 직원 700여 명이 수원 본사로 옮기며 삼성전자의 수원디지털시티 시대가 막을 올렸다. 삼성물산과 삼성중공업, 삼성SDS, 삼성전기 등도 새 둥지를 찾아 서초사옥을 떠났다. 그렇게 삼성그룹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도 지녔다. 이는 해외유학 시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부회장이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당시,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박사학위를 따고 경영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실무에 목말라 있던 이 부회장은 고집을 부려 박사과정을 수료만 한 채 귀국, 삼성전자 경영기획팀에 입사하게 된다. 삼성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아버지의 권유라도 자신의 뜻이 확고하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격도 지녔다”고 전했다.
이런 이 부회장은 요즘 안팎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안으로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통합 삼성물산’ 출범 등 경영권 승계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밖으로는 미국의 애플, 중국의 화웨이, 샤오미 등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삼성의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세뱃돈 모아 친구 등록금 내준 금수저...외유내강 학창시절
1968년생인 이 부회장은 국내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다니고, 석·박사 과정은 해외에서 마쳤다. 서울 경기초(1981년)와 청운중(1984년), 경복고(1987년)를 거쳐 서울대(동양사학과ㆍ87학번)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 교복 자율화가 되면서 사복을 입게 됐는데, 청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는 등 옷차림은 다른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 고급 승용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긴 했지만 정문에서 멀찌감치 내려 걸어갈 정도로 티를 내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운동을 좋아해 핸드볼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평행봉도 제법 잘했다고 한다. 또 학급 반장과 총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도 강했다.
이 부회장의 경복고 시절 2학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이 부회장에 대해 동문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이었죠. 반에서 등록금을 오랫동안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둬야 할 친구가 있었어요. 담임인 내가 행정실에 대신 내주러 갔는데, ‘선생님네 반 얼굴 하얀 반장 학생이 몇 시간 전에 내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우리 반 반장(이 부회장)은 자기가 대신 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세뱃돈 모아 놓은 통장에서 꺼낸 돈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반장이 동년배 친구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 부회장은 대학에서도 동기들 사이에 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범하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4년 내내 할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삼성 초기에 사용하던 낡은 갈색 가방을 들고 다닌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부회장과 대학 동창인 한 재계 인사는 “일반 학생, 친구들과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소탈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서울대 학부 졸업논문으로 ‘암창사절단의 구성 과정과 그 정치적 의의’를 제출했다. 암창사절단은 일본에서 1800년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후 미국, 유럽 등으로 나가 경제, 교육, 문화, 군사 등 다양한 정보를 습득해 근대화에 기여한 사절단이다. 미국 유럽 등으로 나가 공부한 유학생들은 나중에 일본을 이끄는 주요 지도자로 부상한다. 대학 시절 이 부회장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부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한 직후인 1991년 삼성전자(총무그룹)에 잠시 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근무를 오래 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1995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에서 1년간 공부하고 2001년 하버드 경영대학원(비즈니스스쿨)으로 옮겨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 부회장이 일본으로 먼저 건너간 데는 할아버지와 부친의 영향이 컸다. 고(故)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모두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다녔다. 당시 일본은 북아시아의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일본 유학은 흔한 일이었다. 1972년 이병철 선대회장이 가족들과 장충동 자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병철 선대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삼성그룹>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한 교수는 “과거 역사적으로 아픔이 있는 나라지만 상대방인 일본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특히 삼성 오너 일가의 경우 일본의 문화와 사회 특성은 물론 소니, 파나소닉 등 당시 최대 전자기업의 문화를 배우려는 의도가 컸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친절한 서비스와 철두철미하고 경직된 삼성 조직문화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유학 시절에도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삼성가(家) 자녀인지 모를 정도로 평범하고 조용하게 생활한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학교 구내식당에서 여느 학생들과 함께 끼니를 때우는 이 부회장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한 동문은 이 부회장에 대해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티 안 나게 생활해 뒤늦게 삼성가 사람인 것을 알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976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결혼식장에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과 어린 모습의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앉아 있다. <사진=삼성그룹>
광범위한 국내외 인맥
#2014년 4월 어느 주말. 현대차그룹이 소유한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 이 부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함께 나타났다. 동반 라운딩을 하기 위해 각자의 지인을 동반하고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당시는 삼성과 현대차가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 입찰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때. 하지만 재계 자녀 모임에서 오래 우정을 쌓은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의 골프 실력은 용호상박. 스마트한 외모의 이 부회장이 숏게임에 특히 능하다면,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정 부회장은 소문난 장타로 알려져 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이재용 부회장의 인맥은 광범위하다. 학교 인맥부터 재계 인맥, 해외 인사들까지 두터운 인맥을 자랑한다. 이 중 사촌지간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는 경기초교부터 서울대까지 같이 다닐 정도로 돈독한 사이다. 매제인 김재열 제일기획(스포츠사업총괄) 사장과는 초·중·고를 함께 다녔다.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은 ‘보이지 않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정 부회장은 활달한 성격으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인 반면, 이 부회장은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종종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늘 붙어다니던 두 사람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떨어지게 된다. 정 부회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들어갔지만 1년 정도만 다니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반면, 이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이 부회장의 또 다른 ‘절친’(절친한 친구)으로는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이 있다. 당시 정·재계 인사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녔던 경복고에서 두 사람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이런 이유로 방과 후 이 부회장은 이해욱 부회장의 집에 자주 찾아가곤 했는데, ‘저녁식사는 항상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대림산업의 가족문화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바쁜 경영활동으로 자주 집을 비웠던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달리 온 식구가 매일 저녁을 함께 하는 대림가(家)의 문화가 새로우면서도 부러웠다고 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들의 오랜 우정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귀띔했다.
이 부회장의 또 다른 경복고 동문으로는 8년 선배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4년 후배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 등이 있다. 조현준 효성 사장과는 경기초 동창이다. 재계에서는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과 친분이 깊다. 사석에서 ‘형, 동생’ 하는 사이로 정 부회장이 두 살 아래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동문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이현승 코람코자산운용 대표이사 등이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동문으론 민선식 YBM 사장과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등이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면 상당한 인적 네트워크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부분 오너 자제들이 과거 국내서 학사를 마치거나 일단 입학은 하되 중퇴하고 해외로 나가 석·박사를 취득하면서 여러 네트워크를 쌓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 부회장은 지난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재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나서게 된다.
이건희 회장과 ‘같은 듯 다른’ 이재용식 경영 스타일
이 부회장은 지난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승진한 후 2007년 글로벌고객총괄책임자(CCO) 전무, 2010년 1월 최고운영책임자(COO) 부사장을 거쳐 같은 해 12월 삼성전자 COO 사장이 된다. 2001년 상무보에서 사장이 되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그 뒤 2년여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 부회장의 더딘 승진은 리더에게는 확실한 기초가 필요하다는 이건희 회장의 의중이 담겼다. 이 회장은 이 부회장에게 유년 시절부터 인간미, 도덕성, 에티켓 등 3가지를 중점적으로 교육시켰다. “과장·부장이라도 무시하지 마라, 모두 인격이 있다. 항상 아랫사람과 소통하려고 노력해라.” 이렇게 ‘부드러운 리더십’을 심어준 것도 다름 아닌 이 회장이었다. 이 부회장은 아버지로부터 ‘아랫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이건희-재용 부자의 믿고 맡기는 경영 스타일은 매우 닮았다. 이 회장은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실무진을 믿고 업무를 전적으로 위임하는 편인데, 이 때문에 과거에는 삼성에 장수 CEO가 많았다. 이런 경영 스타일은 이 부회장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실무진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긴다. 신뢰를 보인 만큼 책임을 물을 때도 확실하다.
다만, 경영구상 방법에 있어선 확연히 다르다. 이 회장은 발상의 전환이 빠르고 시야가 넓은 반면, 이 부회장은 한번 생각하고 마음먹은 것은 바꾸지 않는 확신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물고기 잡는 법으로 따지면 저인망식인 반면, 이 부회장의 스타일은 낚시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 회장은 큰 그림을 보며 공공정책 연구 등 공공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인 반면, 이 부회장은 가시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사진=삼성그룹>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설 당시 그의 능력과 자질을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재입사 직전인 지난 2000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뒤, 이 부회장은 삼성 구조조정본부 지원에 힘입어 자본금 100억원 규모의 ‘e삼성’이라는 벤처투자회사를 세운다.
이 부회장이 벤처기업을 세운 데는 니콜러스 네그로폰테 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미디어연구소장의 영향이 컸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어느 날 비행기 안에서 이 부회장이 네그로폰테 교수를 만났고, 이때 인터넷 벤처사업에 처음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처 버블’이 꺼지면서 8개월 만에 200억원 적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문을 닫게 된다. 결국 손실은 여러 계열사가 분담했고, 그 후 배임 혐의 등으로 특별검사 수사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e삼성’ 벤처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회사는 삼성 계열 투자정보회사인 FN가이드뿐이다. 갓 유학을 마친 뒤 야심차게 세운 벤처기업이다 보니 경험보다는 의욕이 너무 앞섰다는 평가다. 지금까지 젊은 경영인들 사이에선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젊은 경영인일수록 열정과 도전정신이 충만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패기가 있지만 동시에 과감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칫 공격적인 투자로 기존의 가진 것도 잃게 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곧 명예 회복에 성공한다. 2004년 삼성과 소니의 합작사인 에스엘시디(S-LCD)의 등기이사를 맡아 삼성이 LCD 부문에서 세계 정상급의 기술과 생산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2006년 사상 처음으로 소니를 꺾고 세계 1위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삼성의 이 부회장 체제는 지난 2009년 부사장 승진 이후부터 사실상 시작됐다. 2008년 당시 이 회장은 삼성 특검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삼성 특검 이후 이 부회장은 해외 순환근무를 통해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신흥시장과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을 다니며 주요 거래선을 만나 경영 폭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 부회장의 이런 해외활동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들과 우호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4년 10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를 접견한 뒤, 같은 해 9월엔 사티아 나델라 MS CEO를 만났다. 2013년에는 에릭 슈미트 구글 CEO와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등과도 만나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조 케처 지멘스 회장, 랜들 스티븐슨 AT&T 회장과 회동했고, 9월에는 코닝의 경영진과 BMS의 지오바니 카프리오 CEO와도 미팅을 가졌다.
이 부회장의 글로벌 행보는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 왕양(汪洋) 부총리와 리커창(李克强) 총리,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등이 그가 최근 만난 글로벌 인사들이다.
‘이재용 체제’ 2년...“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
‘이재용 체제’ 2주년을 맞은 삼성은 전방위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2014년 11월 삼성종합화학·삼성토탈·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 등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2조원에 팔았다. 지난해 10월에는 삼성SDI 케미칼 부문,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등 나머지 화학 계열사들을 3조원에 롯데그룹에 넘겼다. 지난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서 행해진 자율적인 기업 간 거래로는 최대 규모다.
이 부회장은 삼성을 이끌며 과거 문어발식 확장 대신 ‘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하자’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마디로 ‘선택하고 집중하자’는 거다. 여기에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1등을 못하는 사업은 정리한다’는 이 부회장의 경영철학은 GE의 잭 웰치 전 CEO와 매우 닮았다.
삼성 전직 임원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이 부회장은 GE로부터 초대받아 미국 GE크로톤빌 연수원에서 한 달가량 최고경영자 양성과정 교육을 받게 되는데, 그때 GE로부터 많은 교감을 얻었다”고 한다. 또 이 부회장은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반대에 맞서며 삼성의 지주 역할을 해온 제일모직(옛 에버랜드)과 삼성물산의 합병도 성사시켰다.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경영권 승계작업도 속도를 내고 있다. 수십 차례가 넘는 계열사 재편작업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부회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삼성의 사업재편 구도는 크게 전자·바이오·금융 3대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유례 없는 기업 간 ‘빅딜’을 성사시킨 것도 이런 맥락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비주력 계열사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지금도 삼성그룹 비주력 계열사들의 매각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은 내부적으로 직원들과 스킨십 강화를 위한 현장경영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5월 평택 반도체공장 기공식 참석을 시작으로 같은 해 11월에는 업황 장기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제도 삼성중공업 조선소를 직접 찾아 박대영 사장 등 경영진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지난 12월에는 송도 바이오로직스 3공장 기공식에도 참석했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사업장 방문도 잦아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미국 비즈니스카운실 회의에 참석한 뒤 실리콘밸리에 있는 삼성전략혁신센터(SSIC)와 삼성리서치아메리카(SRA) 둘러보기도 했다. 지난해 2월 미국 실리콘밸리 방문에 이어 같은 해 4월과 5월에는 미국과 유럽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
이 부회장의 책임경영 행보도 달라진 변화다. 이 부회장은 책임경영 일환으로 올 초 사재를 털어 지난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삼성엔지니어링의 ‘구원투수’로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6월 23일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대국민 사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국민 여러분께 사죄한다”며 두 차례나 고개를 숙였다.
“큰 그림이 없다”...미래에 대한 삼성 여전히 ‘안갯속’
“이 부회장은 그야말로 럭키(Lucky)한 오너 3세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고 능력이다.” 재계 한 관계자의 말이다. 한마디로 삼성은 그동안 환율과 스마트폰 인기 상승이라는 우호적인 대외적 환경에 의해 큰 수혜를 입었다는 얘기다.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글로벌고객총괄책임자로 경영에 직접 참여한 지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삼성전자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이 기간 연결 매출은 99조원에서 229조원으로 2.3배나 껑충 뛰었고, 연결 순이익도 8조원에서 30조원으로 3.8배나 증가했다.
이런 성과는 환율 상승과 스마트폰 인기의 효과가 컸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연평균 환율은 2007년 달러당 929.22원에서 2013년 1094.58원까지 올랐다. 6년 가까이 달러/원 환율은 평균 1100원대를 유지했다. 증권가에 따르면 달러/원 환율 상승 시기엔 삼성전자의 실적이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한 경우가 많은 반면, 환율 하락 시기엔 ‘어닝 쇼크’를 기록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탓에 재계 내부에선 이 부회장의 삼성 체제에 운이 따라줬을 뿐 아직 이렇다 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종종 나온다. 아버지 이 회장은 미래를 내다보며 삼성이 잘하는 일이든 못하는 일이든 우선 큰 판을 짜고 미래를 계획한 반면, 이 부회장은 단기간의 성과에 치중해 멀리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의 연구개발(R&D)과 기술력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삼성종합기술원(종기원)의 입지 축소가 대표적이다. 지난 1987년 말 개원한 삼성 종기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최근 기업 안팎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매출의 약 7%를 R&D비용으로 쓰고 있는데, 해마다 그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2014년 삼성전자의 총 R&D비용은 15조3255억원이었지만 지난해엔 14조8487억원으로 줄었다. 올 1분기엔 3조8117억원만을 R&D비용으로 지출했다.
특히 과거 이 회장 시절엔 각 계열사 CEO 대부분이 공대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데 비해 지금은 관리직 출신이 대거 차지하고 있는 점도 삼성 종기원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시각에 힘을 실어준다. 이 부회장이 삼성의 장기적인 미래 먹거리 찾기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이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밀고 있는 바이오 사업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며 “바이오 사업 특성상 성과가 빨리 나오지 않을뿐더러 당장 스마트폰을 대체할 사업이 없다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고 말했다.
그동안 ‘럭키’했던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당장 오는 2018년 금융위기설에 어떻게 대응할지, 또 상속 승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더 나아가 미래의 삼성을 어떻게 이끌지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거세게 위협해 오고 있는 지금, 글로벌 파워리더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