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스 - 톨레프슨 수정법’ 개정 전망...동맹국에서도 함정 건조 가능
미 해군, 함정 작년 295척에서 2054년 390척으로 늘릴 계획
미 MRO 시장 연간 약 20조원 규모...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수주전 참여
|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gomsi@newspim.com
‘세계 1위 조선소’ HD현대중공업의 울산조선소에서 골리앗 크레인을 이용해 선박을 건조 중인 모습. [사진=HD현대중공업]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 함정 수출 시장이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미 해군은 함정 규모를 작년 295척에서 2054년까지 390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노후 함은 퇴역시키고 연간 10척씩 신규 군함 364척(전투함 293척, 지원함 71척)을 투입한다. 이를 위해 총 1조750억달러(약 1560조원)를 지출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조선업계에서는 이 중 상당수가 동맹국에 발주되면 “전례 없는 수준의 새 시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들어 미국 의회에서 해군 함정 건조를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 맡기는 것을 허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돼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은 1920년 연안 항구를 오가는 민간 선박은 자국 내에서만 건조하도록 한 ‘존스법’을, 1965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군함을 자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하게 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을 각각 제정해 자국의 조선 산업을 보호해 왔다.
그런데 최근 자국 조선업 쇠퇴로 전투함 수가 중국에 역전당하는 등 해양 패권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자, 급한 대로 군함 건조부터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규제를 풀기로 한 것이다. 이 법안은 상·하원 다수 의석을 차지한 공화당에서 발의돼 의회 통과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한국 조선업계에 ‘SOS’
미국은 세계 1위 군사 대국이지만 상대적으로 미국 조선소의 건조 역량은 한국과 일본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현재 5개의 조선소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각 조선소의 연간 인도 척수는 평균 1.3척에 불과하다. 2024년 10월 미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현재 미 잠수함의 약 30%가 수리 대기 중이다.
지난해 11월 7일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계는 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한국의 세계적인 선박 건조 능력을 바탕으로 선박 수출, 보수, 수리, 정비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선박 보수·수리·정비, 즉 MRO(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 분야는 실제 양국 간 협력의 여지가 크다. 미국 입장에서 해군 함정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건 법적 제한 때문에 어렵지만, MRO 분야에선 지금이라도 한국의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산업 부문을 제쳐놓고 조선업을 특정한 건 미국의 위기 의식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중 간 대결의 무대인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해군력에 미국이 밀리는 지경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은 최근 10여 년간 빠르게 배를 만드는 역량을 강화하며 해군력을 키웠다. 특히 함정 수에서 2020년 350척으로 미국(293척)을 앞질렀다. 기술 수준까지 고려하면 전체 해군력은 미국이 더 앞서고 있지만, 물량 공세가 거센 상황이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2024년 6월 공개한 ‘초국가적 위협 프로젝트’ 보고서에서 중국이 운용하는 전함은 234척으로, 미 해군의 219척(군수·지원 함정은 제외한 숫자)보다 많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9월 2일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호가 정비를 받기 위해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입항했다. [사진=한화오션]
중국의 조선 능력은 미국의 233배
미 해군정보국(ONI)이 2023년 7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 능력은 미국의 233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연간 선박 건조 능력은 10만GT(총톤수) 안팎인 데 비해 중국은 2325만GT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더 큰 문제는 절대적인 함정 수도 중국이 많지만, 중국은 함정을 동아시아에 집중 배치해 놓고 있는 반면 미국은 함정들을 전 세계에 분산 배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동아시아 해역만을 놓고 볼 때, 미국과 중국 간의 ‘함정 갭’은 몇 배나 더 커진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중국 해군의 함정 보유가 급격히 늘자 미국은 다급해졌다. 미국으로서는 미국 내 조선업 재건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한국·일본같이 조선업이 강한 동맹국들로부터 함정을 급히 구매하거나 다른 형태의 도움을 받아야 할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선임연구원 잭 쿠퍼는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상대방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강점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더 강해졌다”며 “하지만 중국의 막대한 조선 능력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중국이 강해지는 반대의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3월 2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발간한 ‘미국 해양 조선업 시장 및 정책 동향을 통해 본 우리 기업 진출 기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때 414개 조선소가 운영될 정도로 조선 산업이 활발했지만 2000년대 들어 급속도로 쇠퇴했다”며 “미국 조선소들은 안정된 일감을 바탕으로 기술 개발과 투자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시설도 노후화하고 생산성도 떨어졌으나, 중국은 해양 산업을 육성해 2024년 국제 조선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고 했다.
한화오션, 미 군함 ‘월리 시라’호 수리
2024년 영국의 국제 군사정보 전문업체인 IHS 제인스에 따르면, 글로벌 함정 건조 시장 규모는 692억달러(약 93조원)로 나타났다. 시장조사업체 모도 인텔리전스(Modor Intelligence)에 따르면, MRO(함정 유지·보수·정비) 시장 규모는 올해 578억달러(약 78조원) 수준이다. 미국 MRO 시장만 하더라도 139억달러(약 18조원, 2024년 예산안)에 이른다. 우리와 미국의 또 다른 협력 방안으론 기술 이전 등이 꼽힌다. 쇠퇴한 미국 선박 건조 능력을 위해 그동안 기술 역량을 축적해 온 한국이 미국 내 조선소에 한국의 조선 기술을 이전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조선업 쇠퇴로 미국 해군은 MRO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한화오션이 국내 최초로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 MRO 사업을 수주했고, HD현대중공업도 MRO 사업 수주전에 뛰어든 상태다. 최근 조선업계에 따르면 한화오션은 지난 1월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올해 미 해군 함정 5, 6척 MRO 사업 수주 계획을 발표했다. 한화오션은 이미 지난해 미 해군 함정 2척의 MRO 사업을 수주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도 올해 2, 3척의 미국 함정 MRO 사업을 수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함정 MRO 분야에서 한국과 협업을 강조한 것은 좋은 신호이며, 방산 측면에서 양쪽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협력이 강화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미국 조선업계와 한국 조선업계의 협력이 중요한 이때, 한미 조선업계에서는 중요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지난 3월 13일 미 군함 4만t급 ‘월리 시라’호가 유지·보수 및 정비를 마치고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조선소에서 출항했다는 소식이다. 한국 조선소가 미군 함정을 처음으로 고쳐 출항시킨 것이다.
‘월리 시라’호는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작전에 참여해 오다 유지·보수 및 정비를 받으러 작년 9월 거제항에 입항했다. 한화오션에 따르면, 이 배를 검사했을 때 외관만으로도 부식된 부분만 약 260군데에 달했다. 주요 장비를 점검·교체하거나 운항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등 수백 곳을 손봤다.
한화오션 측은 추가 수리가 필요한 방향타와 엔진, 프로펠러 부분들을 발견해 미 해군 측에 알리고 추가 보수를 제안했다. 미군으로선 원래 3개월이던 MRO 기간이 2배인 6개월로 늘어나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흔쾌히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해군이 MRO를 한국에 맡긴 것은 이 배가 처음이었다. 극비 군사작전에 여러 차례 투입됐던 함정을 맡길 정도로 미국이 한미 동맹과 우리 조선소의 기술력을 신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지난해 2월 27일 정기선(앞줄 오른쪽) HD현대중공업 부회장이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에게 HD현대중공업 특수선 야드와 건조 중인 함정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HD현대중공업]
美 함정 건조능력 보유한 동맹국은 한국과 일본뿐
미국 함정 시장은 연간 358억달러(약 52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는 미 함정 MRO 시장(약 18조원)의 2배 이상 되는 규모다. 이미 미 해군력이 수적으로 중국에 열세에 놓이면서 한·미가 해양·조선 분야에서 협력할 명분은 마련된 셈이다. 특히 우리 조선업계에선 지난 2월 미 상원이 미 해군·해안경비대의 함정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에 주목한다. 법안에서 특정 국가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 중 미국의 입맞에 맞게 함정을 건조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다.
지난해 2월, 카를로스 델 토로(Carlos Del Toro) 미 해군장관은 한국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을 방문해 함정 건조 역량을 확인하며, 두 거대 조선업체가 미국 조선소에 투자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내 조선사들은 MRO 사업이 향후 미 해군 군함 건조 사업 수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군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건조 능력을 보유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원팀’으로 만나 미국 함정 수출의 물꼬를 트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