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현대미술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과거 극소수 작가들이 ‘맛보기’ 또는 ‘테스트’용으로 활용하던 AI가 최근 들어서는 수많은 현대미술가의 작업에 급속도로 녹아드는 중이다. 그 활용 또한 단순한 평면회화뿐 아니라 조각, 영상, 퍼포먼스, 설치미술까지 다각화되고 있다. 이에 “AI는 현대인 모두의 ‘평생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예술계에도 속속 실현되고 있다. AI가 예술에 있어서도 ‘많은 걸 함께하는 파트너’임을 작가 및 기획자, 시장전문가들이 공감하기 시작했다. AI를 테마로 한 코리아나미술관의 기획전 ‘합성열병’의 전시 모습.
AI아트 확산의 물꼬를 튼 곳은 세계 1위의 미술품경매사 크리스티다. 크리스티는 지난 2018년 10월 뉴욕 경매에서 프랑스의 3인조 작가그룹 오비어스가 AI를 활용해 그린 가상의 남성 초상화 ‘벨라미 가(家)의 에드몽’을 낙찰가 43만달러(약 5억원)에 판매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예상가의 40배가 넘는 엄청난 금액에 팔리며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최초의 이벤트 후, 각국에서 AI아트가 봇물 쏟아지듯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디지털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앞다퉈 뛰어들었고, AI 테크놀로지를 작업에 솜씨 좋게 녹여내는 슈퍼스타 작가도 탄생했다. 그 정점에 선 튀르키예 출신의 미국 작가 레픽 아나돌(40)은 전 세계를 돌며 대규모 미디어 아트 전시를 숨가쁘게 개최 중이다. AI가 그린 초상화 ‘벨라미 가(家)의 에드몽’. 2018년 10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5억원에 낙찰됐다. [사진=크리스티]
디지털 강국인 한국에서도 뒤처질 리 없다. 서울 가회동의 사립미술관인 푸투라서울은 작년 가을 레픽 아나돌의 ‘대지의 메아리: 살아 있는 아카이브’라는 AI아트 전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계가 자연을 꿈꿀 때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한 레픽 아나돌의 장대한 AI영상미술은 대단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관객을 매료시켰다. 미술관 측은 작품을 전시장 벽면이 아닌 천정에 투사해 관객들로 하여금 빈백에 누워 감상하도록 했다.
크리스티, 작가들 반발에도 AI아트 34점 경매
AI아트를 온-오프라인 경매에 포함시키며 시장을 리드하던 크리스티는 올 2월에는 처음으로 AI로 만든 작품만 모은 ‘증강지능’ 경매를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개최했다. 이 경매에는 내로라하는 AI아트 작가들의 작품 34점이 총집결했고, 프리뷰 현장에는 그림 그리는 로봇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6500명에 이르는 예술가들이 ‘경매 취소’를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작품 생성을 위해 사용된 AI 도구들이 예술가들의 허락 없이 작품을 학습했다”며 “저작권 침해인 만큼 인간 예술가 작품의 도용을 막아 달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경매를 강행했고, 34점 중 28점이 판매되는 성과를 거뒀다. 낙찰액도 총 10억원에 달했는데 레픽 아나돌의 ‘기계 환각’은 추정가를 뛰어넘으며 4억원에 팔렸고, 홀러 헐든과 매트 드라이허스트의 작품도 1억3700만원에 거래됐다. 응찰자 중 47%가 밀레니얼과 Z세대로 확인돼 젊은 세대들이 호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크리스티의 경쟁사인 소더비 또한 지난해 11월 AI로봇 아티스트 ‘아이다’의 작품 경매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아이다가 그린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영국)의 초상화 ‘인공지능 신(AI God)’은 소더비 온라인 경매에서 추정가의 7배에 달하는 15억원에 팔리며 기염을 토했다. 아이다는 단발머리를 한 여성 형상의 로봇 아티스트로, AI의 기술적 특성과 인간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제작한다. 여성 형상의 로봇 아티스트 아이다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사진=소더비]
문제의 초상화는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긴 앨런 튜링을 초현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수학자를 로봇 아티스트가 그려낸 그림이 엄청난 가격에 낙찰되자 ‘AI아트의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는 반응이 빗발쳤다. 또 AI와 예술의 교차점이 확대되고, 다변화되고 있음도 환기시켰다. 아이다의 창작자인 에이단 멜러는 “이번 초상화는 AI의 힘이 우리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며 “물론 기술 발전으로 인한 윤리적·사회적 문제점도 제기되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대화의 촉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때마침 예술에서 AI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고, 어떻게 쓰이며,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두 건의 특별전시가 국내에서 개막돼 주목된다. 서울 강남구 코리아나미술관과 종로구 선화랑에서 동시에 개막된 이들 전시는 예술에 AI 기술을 접목한 국제교류전(코리아나미술관)과 생성형 AI로 추상화를 만들어낸 회화전(선화랑)인데, AI 시대의 예술과 창작 개념의 현황을 진단해 보는 단초를 제공한다.
코리아나 ‘합성열병’전, AI의 생성은 ‘합성’을 부른다
코리아나미술관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 발전하며 우리 삶 속으로 깊숙이 진입한 생성형 AI의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본 국제 미술전시를 지난 3월 개막했다. 오는 6월 28일까지 개최될 이 전시는 국내외 작가 9명의 시선으로 인공지능을 둘러싼 인간들의 흥분과 두려움, 현재의 지형을 ‘합성열병’이란 타이틀로 살펴보고 있다.
‘합성(synthetic)’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AI의 생성 메커니즘을 가리키며, ‘열병(fever)’은 생성형 AI의 급격한 발전이 초래하는 혼란과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합성열병’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아카이브 열병(Archive Fever)’(1995)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데리다는 ‘아카이브’를 단순히 과거 보존의 공간이 아닌 기억과 망각, 권력과 욕망이 뒤얽힌 역동적인 장으로 판단했다. 전시는 이런 개념을 ‘AI 시대의 합성 미디어 환경’으로 확장해 탐구한다.
코리아나미술관의 유승희 관장은 “AI아트 하면 무조건 어렵다고 여기지만 오늘 이 AI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문화적 반향에 대한 쟁점을 살펴보고자 기획전을 마련했다. 최근 AI아트의 확산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라 놀라울 정도다. 생성형 AI의 가능성과 한계, 미래를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으로 조망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국내 미술계에서도 ‘인공지능’은 가장 뜨거운 이슈다. AI의 발전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고, 특히 생성형 AI는 강력한 게임 체인저이자 촉진제로 작용하며 엄청난 변화를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프롬프트 입력만으로 텍스트, 이미지, 비디오를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생성형 AI는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던 ‘창의성’의 경계를 허물고, 창작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마법처럼 순식간에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만, 그 이면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거나 외면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음을 전시는 짚어낸다.
올봄 막을 내린 파리 퐁피두 센터의 ‘AI’전에 초대받았던 싱가포르 작가 호 루이 안은 목가적 풍경의 초대형 사진 패널 앞에 두 대의 모니터를 설치했다. 왼쪽에는 작가의 논지를 설명하는 강연 자료가 상영되고 있고, 오른쪽에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생성형 AI가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송출된다. 관람객은 캠핑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인공지능이 기술적 도구를 뛰어넘어 사회적 기억과 권력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게 된다.
독일 출생의 말레이시아 작가인 로렌스 렉은 2065년 가상의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비디오 작품 ‘아이돌’을 출품했다. 40년 전 최고 아이돌이었다가 이제는 쇠락한 디바가 복귀 공연을 위해 AI작곡가를 몰래 영입해 히트곡을 제작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서사를 통해 작가는 인간과 AI 간 길고 복잡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부산 출신의 미디어 작가 양아치는 ‘고스트 1.0.0’이라는 2채널 비디오 작품을 내놓았다. 모니터에는 가상의 인물 샐리가 지능형 개인 비서들을 부르며 유령, 플랫폼, 인공지능에 대해 문답을 나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권력 구조와 네트워크에 긴밀히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 장치임을 드러낸다.
‘AI는 정말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가’라는 질문을 내세운 ‘합성열병’전은 AI 기술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30점을 통해 AI가 창작과 사회에 끼치는 복합적 영향과 숨겨진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이 AI의 환상 너머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고 있다.
서지은 학예팀장은 “생성형 AI라는 기술을 단지 찬양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AI가 정말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기술 이면에 도사린 이야기까지 작품을 통해 해부한 전시인 만큼 예술과 AI의 관계를 살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 선화랑 전시장에 걸린 AI 풍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오비어스 작가들.
선화랑, 신작 제작 위해 MRI에 수없이 들어간 작가들
서울 인사동의 선화랑은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지평: IMAGINE’이라는 타이틀로 프랑스의 3인조 AI 아트그룹 ‘오비어스’전을 개막했다. 이들은 파리 뇌과학연구소(ICM)와 함께 개발한 ‘마인드 투 이미지’ 기술을 작품에 활용했다. 이들의 작품은 한마디로 ‘AI가 인간의 뇌 안을 들여다보고 그린 그림’이다. 작가 3명은 각각 돌아가면서 자기공명영상(MRI) 장치에 들어가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를 상상했다. 이 생체 신호를 기반으로 AI가 뇌 안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린 그림들이 이번 전시에 출품됐다.
박부경 선화랑 팀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AI는 인간의 지시어, 명령어에 의해서 생산되는 결과물이 대부분인데, 오비어스는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이미지를 이미지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했다. 오비어스는 지난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AI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낙찰가 5억원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 작가들이다.
오비어스의 작품전에는 인간의 무의식과 AI를 결합해 만든 풍경화 및 초상화 28점이 나왔다. 뇌과학연구소와 협업한 신기술로 작업한 작가들은 “AI가 인간의 뇌 속을 들여다보고 그린 그림이다. 우리 셋이 각각 MRI 기계에 들어가 쓰나미 등 생각한 이미지를 상상하면, 생체 신호를 기반으로 AI가 이를 그림으로 그려냈다”고 했다.
각각 컴퓨터공학, 경영학, 경제학을 전공해 오비어스를 결성한 2017년 이전까지 예술과 무관했던 세 작가는 “100년 전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같은 작가들이 새로운 회화 기법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AI)로 인간 정신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구현하니 목표는 같다”고 설명했다.
1년 반에 이르는 작업 과정은 의료 실험을 방불케 했다. MRI 안에서 1000개 이상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기억하는 훈련을 했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었는데, 이를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면 AI가 뇌파를 분석해 추상화를 그려내는 식이다. 이들은 “AI가 그린 그림이 예술이냐고 묻는데, 작품은 결국 우리(인간)의 상상력을 표현한 것이고, 누가 어떻게 상상하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만큼 예술이다”라고 자신했다. AI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일 뿐, 자신들의 상상력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오비어스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 AI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예술이 되려면 창작자의 뚜렷한 예술 개념과 독창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세련된 AI 테크닉을 이용했다고 해도 고유성이 없는 건 예술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창의성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