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형 ETF를 중심으로 시장점유율 3위를 지키고 있는 KB자산운용의 부진이 심상치 않다. 반면 미국 주식 ETF에 집중하고 있는 4위 한국투자신탁운용의 기세는 엄청나다. 이 추세라면 2025년에는 3위와 4위의 순위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한투운용은 지금 상품 개발, 운용, 마케팅의 3박자가 딱딱 맞는 상황이다.
반면 KB자산운용의 ETF 수는 전년 대비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영향으로 2024년의 한국 ETF 시장은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KB운용은 2024년에 2조9000억원의 순자산이 증가했음에도 시장점유율은 8.0%에서 7.6%로 0.4%포인트(p) 감소했다.
물론 착시 효과도 있다. 순위가 높을수록 기존 자산 규모가 커서 웬만큼 순자산이 크게 늘지 않고서는 전체 점유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삼성과 미래에셋도 겪고 있는 문제다. 따라서 순자산 증가액이 상당함에도 1위인 삼성자산운용 점유율은 2.2%포인트 감소했고, 2위인 미래에셋자산운용도 0.4%포인트 줄어들었다.
하지만 현재 4위를 기록 중인 한국투신운용의 성과는 착시 효과를 감안해도 탁월한 실적이다. 한투운용의 점유율은 2023년 말의 4.9%에서 2024년에는 7.3%로 2.4%포인트 급증하며 3위인 KB운용을 바짝 뒤쫓고 있다. 전체 운용사 중 작년에 ETF 시장 점유율이 2%포인트 이상 증가한 곳은 한투운용이 유일하다.
순자산 증가액도 6조2000억원으로 KB운용의 2배가 넘는다. KB운용과 한투운용 간 순자산 격차는 이제 고작 5000억원 수준으로 좁혀졌다. 2024년 말 기준으로는 한투운용이 KB운용을 일시적으로 뛰어넘기도 했다. 본격적인 3위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KB ‘상장 ETF’ 수 제자리...한투 13개 증가와 대조적
KB운용이 2024년에 새롭게 상장한 ETF는 총 19개다. 이 중 ‘RISE CD금리액티브(합성)’는 대표적인 채권형 ETF로 현재 순자산 1조2000억원을 돌파했다. 또 ‘RISE 200위클리커버드콜’은 대표적인 주식형 ETF로 현재 순자산 2500억원을 넘어섰다. 작년에 KB운용이 신규 상장한 19개 ETF의 순자산총액은 2조2000억원이 넘는다.
KB운용의 2023년 말 ETF 상장 개수가 116개였던 만큼 현재는 19개가 더 늘어났어야 계산이 맞다. 그럼에도 2024년 말 KB운용의 ETF 상장 개수는 119개로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이유는 지난 6월에만 무려 14개의 ETF(200IT, 200중공업, 200산업재 등)를 한꺼번에 상장 폐지한 탓이다.
현재 자본시장법상 순자산총액이 50억원 미만인 소규모 ETF는 상장 폐지할 수 있다. KB자산운용은 “선택과 집중을 위해 상장 폐지를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상장 폐지된 ETF들은 금융소비자들의 선호도가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한투운용이 2024년에 새로 상장한 ETF는 총 21개다. 작년에 신상품 ETF 개발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ACE CD금리&초단기채권액티브’는 대표적인 채권형 ETF로 현재 순자산 2300억원을 돌파했다. ‘ACE 미국빅테크7+데일리타겟커버드콜(합성)’은 대표적인 주식형 ETF로 현재 순자산 1700억원을 넘어섰다.
작년에 한투운용이 신규 상장한 21개 ETF의 순자산총액은 1조5000억원 수준이다. 한투운용의 2024년 말 기준 상장 ETF 수는 총 91개다. 상장 폐지된 ETF를 제외하고도 전년 대비 13개가 늘어났다. 같은 기간 KB운용의 ETF 순증이 단 3개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격차다.
KB 신상품 채권·국내주식 비중 커...한투는 해외주식
일반적으로 채권형 ETF는 법인 비중이 높고, 주식형 ETF는 개인 비중이 높다. 2024년에 양사가 출시한 신상품 ETF의 순자산총액은 KB운용(2조2000억원)이 한투운용(1조5000억원)보다 7000억원 이상 더 많다. 하지만 KB운용은 2조2000억원 중 약 1조7000억원이 채권형 ETF다. 주식형 ETF는 약 5000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한투운용은 채권형 ETF 7000억원, 주식형 ETF 8000억원으로 주식형 비중이 더 높은 게 특징이다. 최근 한국 개인투자자들은 해외주식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만큼 리테일 시장을 공략하려면 주식형 ETF 비중이 높은 게 더 유리하다는 해석이다.
KB운용의 신상품 전략은 주로 커버드콜, 미국, AI에 집중돼 있다. 상위 7개 주식형 ETF 중 국내 관련 ETF가 2개나 포함된 것도 특이점이다. 반면 한투운용이 2024년에 신규 상장한 주식형 ETF 상위 7개는 모두 해외주식형이다. 이 중 미국 관련 ETF가 6개다.
순자산 1위는 ‘ACE 미국빅테크7+데일리타겟커버드콜 ETF’로 1700억원을 돌파했다. 2위인 ‘ACE 엔비디아밸류체인액티브 ETF’도 1300억원을 넘어섰다. 한투운용은 2024년에 미국, 빅테크, 커버드콜, 반도체를 중심으로 엔비디아, 구글, MS 등 특정 개별주식에 집중하는 신상품까지 다양하게 쏟아냈다.
미국 증시 오를수록 한투운용이 유리
2024년에 자산 증가 폭이 가장 컸던 ETF 전체 현황을 살펴봐도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KB운용은 상대적으로 국내 채권 비중이 높고, 한투운용은 미국 주식과 미국 채권 비중이 높다. KB운용의 ETF 중 작년 순자산 증가 1위 종목은 ‘RISE 종합채권(A-이상)액티브 ETF’다. 작년에만 약 1조원이 증가했다.
또 순자산 증가 3위를 기록한 ‘RISE 머니마켓액티브 ETF’도 2024년에 약 6000억원이 증가했다. 순자산 증가 상위 10개 ETF 종목 중 4개가 국내 채권 ETF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 외 RISE 미국나스닥100 ETF가 약 6000억원, RISE 미국S&P500 ETF가 약 5000억원 증가해 미국 증시 상승의 수혜를 봤다.
반면 한투운용은 국내 채권형 ETF보다는 미국 주식형과 채권형 ETF 자산이 크게 증가했다. 한투운용 ETF 중 작년 순자산 증가 1위 종목은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다. 무려 1조2000억원이 증가했다.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감에 투자자들이 대거 몰려든 덕이다.
순자산 증가 2위 종목은 ‘ACE 미국S&P500 ETF’, 3위 종목은 ‘ACE 미국나스닥100 ETF’다. 작년에만 각각 9000억원과 7000억원이 증가했다. 미국, 빅테크, 배당에 포커스를 맞춰 순자산 증가 상위 10개 ETF 중 8개가 미국 관련 ETF다. 한투운용의 미국 집중 전략은 미국 증시 활황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순자산 증가 4위 종목인 ‘ACE 테슬라밸류체인액티브 ETF’는 테슬라 주식 외에도 테슬라 2배 레버리지와 채권에 적절히 분산해 테슬라 집중 투자를 원하는 투자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켰다. 작년에만 5000억원 증가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테슬라 외에도 엔비디아, 구글, MS 등을 비슷한 스타일의 ETF로 만들어 2024년에 출시해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미국 증시가 워낙 활황이었던 만큼 ETF 수익률도 대체로 우수하다. 대표적으로는 ‘ACE 미국빅테크TOP7 Plus레버리지(합성) ETF’의 1년 수익률이 187%로 1위를 기록했다.
한투운용은 마케팅 차별화에도 성공했다. 2024년에 반도체와 빅테크 관련 세미나를 3차례 진행하며 트렌드 선도에 앞장섰다. 결국 상품 개발, 운용, 마케팅의 3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지면서 전 운용사 중 유일하게 시장점유율이 전년 대비 2.4%포인트 급등하는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냈다.
KB자산운용의 고육지책...수수료 파괴 전략
3위를 지켜내야 하는 KB자산운용은 2024년에 기존 ETF 브랜드인 ‘KBSTAR’를 ‘RISE’로 리브랜딩했다. 또 내실을 갖추기 위해 거래가 잘 되지 않는 ETF들을 대거 상장 폐지해 상품 수를 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리브랜딩의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다.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전략은 바로 수수료 파괴다. 일례로 미국의 대표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KB자산운용의 ‘RISE 미국S&P500 ETF’나 ‘RISE 미국나스닥100 ETF’의 총 보수를 2024년에 연간 0.0010%로 낮췄다. 동일 유형의 한국투신운용 ETF 총 보수의 7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의 개인투자자들은 수수료보다 거래량을 더 중요하게 여겨 실제 효과는 제한적이다. 그래도 미국 시장 점유율 2위인 뱅가드가 1위 블랙록을 강력히 추격하는 비결 역시 파격적인 수수료 인하 정책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이든 미국이든 낮은 수수료 전략은 점유율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ETF의 아버지’로 불리는 배재규 사장 취임 이후 3년 만에 ETF 빅3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치열한 ETF 전쟁에서 지난 3년간 한국투신운용의 진격은 인상적이다. 이 기세가 이어진다면 2025년에는 한투운용이 3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미국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한투운용의 ETF 포트폴리오로 볼 때 가만히만 있어도 미국 증시가 추가 상승하면 자연스럽게 ETF 순자산총액도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갔다는 것이 강점이다. 반면 한투운용에 비해 미국 비중이 낮은 KB운용은 대응하기가 몹시 까다로운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실적이 워낙 탁월했던 만큼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배 사장의 연임을 기정사실로 여긴다. 2025년에도 질주하는 한국투자신탁운용을 막아내고 3위를 지켜내야 할 KB자산운용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