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메가 갤러리인 하우저앤워스, 데이비드즈워너 등은 수년 전부터 미국 LA에 통 큰 투자를 했다. 런던, 뉴욕에 이어 LA에 대형 분점을 열고 미국 서부지역 마켓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 특히 스위스 기반의 다국적 화랑인 하우저앤워스는 LA에 초대형 화랑을 조성하고 미술관급 전시를 열고 있다. 데이비드즈워너 또한 과감한 투자로 현지 고객을 공략 중이다.
톱 갤러리들이 이처럼 진격 중인 것과는 달리, 지난 1년 반간 LA에서 10개 화랑이 문을 닫아 대비를 이루고 있다. LA의 중소 규모 화랑들은 “최근 1, 2년간 LA 미술시장 상황이 몰라보게 나빠졌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작년 초부터 올 상반기까지 크고작은 화랑 10개가 문을 닫았다. 나머지 화랑들도 비용이 많이 투입되는 전시회를 미루거나,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다. 문제는 내년에도 문 닫을 화랑이 많고, 개점휴업 상태에 빠질 곳도 많다는 점이다. LA 소재 카릴 파커 갤러리의 전시 장면. 몇 년간 성업했으나 올 5월 갑자기 문을 닫았다.
미국의 아티스트 아미르 팔라는 지난 10월 중순 자신의 SNS에 “내가 아는 몇 개의 LA 갤러리가 최근 문을 닫았다. 이 갤러리들은 지난 팬데믹 기간 중 전시회를 쏟아냈고, 수많은 작품을 판매했던 화랑이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았지만 너무 빨리 성장한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값을 매우 급하게 올렸다. 게다가 작가들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거래’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지적했다.
LA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미술시장이 2년째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뉴욕과 홍콩, 런던 등 여러 아트 허브에서 ‘침체기’가 시작됐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LA는 다른 도시에 비해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뉴욕, 런던, 베를린, 파리와는 달리 LA는 다소 폐쇄적인 미술시장이어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심각한 상황이 전해지고 있다고 미술전문지 아트넷은 보도했다. LA 저널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젊은 여성작가 릴리 킴멜. 출품작이 모두 팔렸다.
젊은 작가 작품 소개했던 화랑들이 주로 타격
아트넷은 LA에서 지난 18개월간 문을 닫은 10개 갤러리를 공개했다. 뉴욕 기반의 비토슈나벨(Vito Schnabel) 화랑은 2021년 말 LA 산타모니카의 유서 깊은 우체국 건물을 빌려 LA 지점을 만들었다. 그러곤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회고전’을 시작으로 모두 6건의 전시회를 의욕적으로 개최했다. 그러나 2년도 못 채우고 LA 지점을 폐쇄하고 말았다.
이 화랑 대표인 비토 슈나벨(38)은 미국 신표현주의 화가인 줄리앙 슈나벨(73)의 아들이다. 줄리앙 슈나벨은 깨진 접시들로 인물초상 등을 표현한 ‘플레이트 페인팅’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다. 현재는 영화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비토 슈나벨은 열여섯살 때 첫 미술전시회를 기획했고, 컬럼비아대학을 다니다가 27살 때 뉴욕에 첫 화랑을 만들었다. 2015년에는 스위스 생모리츠에 분점을 냈다. 그런 다음 LA 아트마켓을 공략하기 위해 산타모니카에 지점을 차렸다.그러나 2023년 6월 폐점했다. 슈나벨을 잘 아는 LA의 한 갤러리 대표는 “한동안 의욕적으로 실험적인 전시를 열었는데 건물의 임대기간이 채 만료되기도 전에 실험은 끝나버렸다”고 전했다. LA에서 공격적인 화랑 경영을 했던 비토 슈나벨. 그러나 2년도 못 버티고 LA 지점을 폐쇄했다.
유망한 신진 작가를 발굴해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로린(Lorin) 갤러리도 LA의 분점 두 곳을 지난해 폐쇄했다. 로린 갤러리의 오너인 디미트리 로린은 “LA 고객들이 미술품 구매를 갑자기 중단했기 때문에 공간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뉴욕 화랑인 니노마이어(Nino Mier) 갤러리는 작가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금을 미지급한 혐의로 LA에 있는 3개의 공간을 최근 폐쇄하고 말았다. 이 사태로 LA 미술시장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니노마이어갤러리 측은 대금 미지급과 관련해 내부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앞으로는 뉴욕과 브뤼셀에서의 화랑 운영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로렌 홀시를 그룹전에 초대해 ‘대박’을 터뜨렸던 신흥 미술상 칼리 패커(Carlye Packer)는 올여름 실버 레이크의 갤러리 공간을 포기하고, 팝업 전시회로 전환했다. 패커 대표는 “이미 판매처를 잃은 작품들을 더 이상 쓰레기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될성부른 유망작가를 발굴해 이름을 날렸던 화랑인 스마트오브젝트(Smart Objects)도 “2025년까지 운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 밖에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본사를 두고 10년 동안 LA에서 지점을 운영했던 가블락(Gavlak) 갤러리도 다운타운 LA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뉴욕에 본사를 둔 하프(Half) 갤러리 역시 LA에서의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또 뉴욕에 본사를 둔 하퍼스(Harper’s)는 올 9월 LA 지점을 조용히 닫았고, UTA파인아츠도 LA와 애틀랜타의 예술 공간을 폐쇄했다.
LA 화랑들의 탄식 “고객이 자취를 감췄어요”
지난 2년 동안 매출이 둔화되는 가운데 LA의 갤러리들은 추가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즉 LA의 구매자 풀은 뉴욕에 비해 여전히 매우 작은 데다 주거래선이었던 아시아에서의 수요도 크게 감소해 매출이 급락한 것.
“한동안 뜨거웠으나 이제 매진되는 전시는 사라졌다”며 패서디나에 있던 4개의 공간을 폐쇄한 스테판 심초비츠는 “올해 LA의 유명 갤러리는 수익이 25% 감소할 것이며, 평균적으로 35~40% 줄어들 것으로 본다. 영세 화랑 중에는 수익이 50~70% 감소하는 화랑도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LA 화랑을 폐점한 로린 갤러리의 로린 대표는 “작품가 1만~2만달러의 젊은 예술가들 작품을 선보여 90% 매진시키는 등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2년 전 상황이 급변했다. LA 모든 고객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구매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이어 “암호화폐와 NFT로 돈을 번 수집가들이 폭망하면서 몇 달간 매출이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딜러 출신의 마이클 네빈은 “화랑 비즈니스는 로케이션이 중요한데 LA는 ‘갤러리 홉핑’(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이 어려워 문제”라며 “올 들어서는 아무도 화랑을 방문하지 않아 정적만 감돌았다”고 탄식했다. 결국 자본이 넉넉한 대형 갤러리는 어려운 시기에도 버틸 여력이 있지만, 중소 규모 갤러리는 침체기를 극복하기 힘들어 폐업 사태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프리즈 런던은 활기찼으나 런던 화랑가는 썰렁
영국 런던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대형 화랑을 제외하곤 화랑 영업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까다로운 통관 절차와 세금 부과로 고객과 화랑 모두 런던에서의 거래를 꺼리기 시작했다.
유럽을 대표하는 아트페어인 프리즈 런던이 열리는 10월 초에는 잠깐 거래가 반짝하는 듯했으나 나머지 기간에는 파리만 날리는 형국이다. 런던에서도 영세 화랑 중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게다가 세계 정상의 아트페어인 아트바젤(Art Basel)이 파리 페어를 올해부터 파리의 아름답고 유서깊은 전시장인 그랑팔레에서 열면서 호응이 매우 뜨겁자 프리즈 런던 측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파리에는 루이비통 미술관과 피노 컬렉션 등 볼거리가 풍부하고, 패션과 푸드 등 즐길거리와 먹거리 또한 다양해 수집가들은 아트바젤 파리로 몰려들고 있다.
문제는 프리즈 런던과 아트바젤 파리가 10월 첫째 주와 둘째 주에 딱 맞물려 열린다는 점. 이에 미국과 유럽의 화랑 중에는 “두 개의 페어를 연달아 참가하는 것은 무리다. 내년부터는 런던은 접고, 파리 페어만 참가하겠다”고 밝히는 곳이 많다. 이에 따라 지난 21년간 잘나가던 프리즈 런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글로벌 미술시장을 매년 분석해온 UBS리포트에 따르면 작년까지 런던 미술시장은 전 세계 현대미술 매출 중 17%를 차지했고, 파리는 7%에 그쳤다. 하지만 이 비율은 조만간 역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편 전 세계적인 미술시장 침체에도 그나마 건재한 것은 뉴욕뿐이며, 이 같은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글로벌 아트마켓 전문가들은 예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