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내년 1월 20일 이후 우리는 새로운 한반도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대북 정책을 담당해온 정부 관련 부처의 고위 당국자는 트럼프 재집권으로 벌어질 우리의 안보환경 변화와 한미 동맹, 북미 관계 등을 전망하며 이같이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때와는 확연하게 온도차를 드러내고 있는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이 한국엔 기회이자 자칫하면 큰 시련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트럼프와 김정은의 재회 여부다. 두 사람은 지난 2018년 6월 싱가포르, 이듬해 2월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역사적인’이란 수식어가 필요한 만남이었다.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다. 북한군 전략미사일 기지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김정식 노동당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과 함께 미사일을 살펴보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0월 23일 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구체적인 김정은의 기지 방문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 [사진=조선중앙통신]
트럼프-김정은 재회동 여부에 관심 쏠려
트럼프의 재집권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하노이 정상회담 테이블로 회귀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포기 카드로 미국에 대북 제재 해제와 북미 관계 개선 등을 요구했지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트럼프의 허들을 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장에서 대북정보 당국과 백악관 참모진으로부터 보고받은 미공개 북핵 시설을 감추는 김정은의 술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트럼프는 단호했다. 회담판을 깨버림으로써 자신이 더 세계의 이목을 받고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태도를 돌변했고 김정은에게 모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겼다.
북미 정상회담 파국이란 참담한 결말 속에 김정은 위원장은 절치부심하면서도 트럼프와의 개인적 친분을 부인하지 않아 왔다. 트럼프도 김정은과의 개인적 관계를 부각하면서 자신의 외교적 리더십을 과시해 왔는데, 이는 지난 7월 그가 공화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많은 핵무기를 가진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김정은과의 브로맨스를 지칭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가장 관심이 쏠리는 대목 중 하나는 트럼프가 북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발사체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히 6차 핵실험으로 사실상 핵보유국 반열에 들었고, 80~10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김정은의 집요한 핵 보유 시도에 미국 대통령과 행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한국의 안보와 남북 관계,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변수가 된다.
우리로서는 트럼프가 김정은의 요구를 일부라도 수용해 핵 군축협상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30년 넘게 대북 정책의 기둥으로 여겨져 온 북한 비핵화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북한 군인들이 군복과 군화 등을 지급받는 장면이라고 우크라이나 군 전략소통정보보안센터(SPRAVDI) 측이 10월 18일(현지시간) 공개한 영상. [사진=SPRAVDI 페이스북]
“김정은, 서울 거치지 않고 워싱턴 갈 수도”
트럼프 행정부가 미 본토에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북핵과 ICBM을 용인 내지 동결시킬 경우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내세운 대남 압박과 위협 노선을 노골화할 수 있다. 더 이상 서울이란 징검다리를 거쳐야 워싱턴에 갈 수 있는 굴레에 갇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김정은과 여동생 김여정이 지난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우리 군이 벙커버스터 현무-5를 공개한 데 대해 “핵 보유국에 재래식 무기를 갖고 덤비는 것은 어리석다”는 취지로 반발한 건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김정은이 트럼프 재집권에 대응해 어떤 시간표로 대미 접근을 시도할지도 관심거리다. 트럼프가 첫 집권한 2017년 북한은 핵과 미사일 위협으로 워싱턴을 압박했고, 그해 11월 말 화성 미사일을 쏘는 것을 정점으로 김정은과 트럼프는 서로 핵 버튼 크기를 다투는 언급을 내놓을 정도로 극한 대치를 보였다.
당시는 트럼프의 임기가 최장 8년(재선 성공을 포함)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연방헌법에 따라 이미 한 차례 단임 임기를 마친 트럼프는 4년 임기만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김정은이 집권 초반부터 북미 협상이나 대화의 고삐를 죄면서 재집권한 트럼프를 상대로 핵 군축협상이나 북미 관계의 진전을 위한 행보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트럼프 1기보다 남북 관계나 한반도 상황은 물론 중동 정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만만치 않은 정국이 복합함수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를 불법 침공한 러시아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북한군을 용병 형태로 파견한 김정은의 행태는 한국과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에 직면해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군의 우크라전 개입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이미 피력한 상황이다. 트럼프가 푸틴과의 친분을 매개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곧 끝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왔지만 실제 2년 넘게 이어져온 전쟁을 쾌도난마처럼 끊어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하노이에서 좌절 맛본 김정은 신중모드 가능성
북한으로서는 워싱턴으로 마냥 직진하기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앞서 트럼프와의 대좌에서 큰 낭패를 보고 안팎으로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행보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9월 13일 고농축우라늄(HEU) 방식의 핵물질 제조 시설을 첫 공개한 데 이어 지난 10월 31일에는 ICBM 화성-19형 시험발사를 현장에서 참관하는 등 행보를 이어오고 있지만, 트럼프 집권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함구해 왔다. 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미국 대선을 의식한 핵과 미사일 동정을 보이면서 그는 “핵 무력 강화 노선을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10월 31일 화성-19 시험발사 참관)이란 입장을 밝히는 등 비핵화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을 상대로 핵과 미사일을 양손에 거머쥔 자신의 지위를 부각하면서도 과거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전의를 불사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로서는 남북 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게 됐다.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국을 ‘제1의 주적’으로 주장하면서 남북 관계를 적대적으로 내몰아온 김정은이 대남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지난 10월 7~8일 평양에서 개최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대한민국을 ‘적대국’으로 표기하는 헌법 개정까지 강행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같은 달 17일 보도에서 남북 간 연결 도로·철도를 하루 전 폭파 방식으로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 것과 관련해 “이는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제한 공화국 헌법의 요구와 적대세력들의 엄중한 정치·군사적 도발 책동으로 말미암아 예측 불능의 전쟁 접경에로 치닫고 있는 심각한 안보환경으로부터 출발한 필연적이며 합법적인 조치”라고 주장했다. 최고인민회의 결과를 전하면서도 한국을 적대국으로 표기한 개헌이 이뤄진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던 북한이 철도·도로 차단 사실을 밝히면서 이를 우회적으로 알린 것이다.
북한은 이 보도에서 남북 도로 차단 조치와 관련해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명령 제00122호에 따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 행사 영역과 대한민국의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단계별 실행의 일환으로 남부 국경의 동·서부 지역에서 한국과 연결된 우리 측 구간의 도로와 철길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끊어버리는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또 “공화국 국방성 대변인은 15일 낮 강원도 고성군 감호리 일대의 도로와 철길 60m 구간과 개성시 판문구역 동내리 일대의 도로와 철길 60m 구간을 폭파의 방법으로 완전 페쇄했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최근 최정예 부대를 파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11일 북한군 특수작전부대를 방문해 훈련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철도·도로 차단하고 “서울과의 악연 잘라버렸다”
이 보도가 나오던 시점에 김정은은 이 지역을 관할하는 북한군 2군단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철도·도로를 폭파 방식으로 단절한 자신의 도발적 행태를 “서울과의 악연을 잘라버리고 부질없는 동족의식과 통일이라는 비현실적인 인식을 깨끗이 털어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군대는 대한민국이 타국이며 명백한 적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똑바로 새겨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앞으로 철저한 적국인 한국으로부터 우리의 주권이 침해당할 때에는 우리 물리력이 더 이상의 조건 여하에 구애됨이 없이, 거침없이 사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마지막 선고나 같은 의미”라고 위협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러 밀착을 통해 체제의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북한군 파병을 결행했다. 북한과 러시아 관계를 ‘혈맹’으로 묶을 수 있는 데다 적지 않은 달러 수입을 챙길 수 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ICBM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과 핵 잠수함 건조를 위한 노하우, 그리고 최신 전투기 제공 등을 푸틴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1만명 이상의 병사들을 해외에 내보내는 데 따른 부담도 만만치 않다. 특히 10대를 포함해 젊은 청년층인 이들 군인은 이미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에 빠져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큰 세대다. 자칫 대규모 탈북이나 한국행이 이뤄진다면 낭패다.
그동안 대북전단 등을 통해 북한 사회에 외부 정보와 김정은 비판 메시지를 전해온 탈북민 단체와 관련 지도자급 인사들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전쟁에 투입된 북한군을 탈북·투항시키기 위한 대북 심리전 전개를 선언하며 현장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전하고 있다. 군 출신 탈북민으로 구성된 탈북시니어 아미사령부를 긴급 구성했으며, 탈북기독군인회 등이 활동에 동참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의 귀환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지만 김정은이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은 녹록지 않다. 노련한 협상가이자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온 트럼프가 김정은을 상대로 호락호락하게 ‘핵 보유국’이란 선물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정부 대북부처 당국자와 전문가 그룹에서 “트럼프 집권 시즌2는 이전과 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