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약세 심각...14년 만에 엔화 가치 반토막
한국과 일본 나란히 무역적자...장기적 원화 약세?
일본인, 저금리와 엔화 약세로 20년 전부터 해외투자
| 한태봉 전문기자 longinus@newspim.com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 약세가 심화되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올해 초 141엔으로 시작했지만 5월 한때 160엔까지 치솟았다. 34년래 최고치다. 최근 일본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으로 다시 155엔까지 내려왔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14년간 엔화는 도대체 얼마나 폭락한 걸까.
엔화 가치 절하율 14년 만에 90%
먼저 한국의 원·달러 평균환율은 2011년 1108원에서 14년이 지난 현재 1347원이다. 14년간 21.6% 상승한 셈이다. 하지만 원·엔 평균환율은 오히려 원화가 더 강세다. 같은 기간 100엔당 원화 평균환율은 1392원에서 892원으로 35.9% 하락했다. 그만큼 일본 엔화 가치가 한국 원화보다 훨씬 약하다는 뜻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 14년간 크게 상승했다. 2011년의 평균환율은 79.7엔이었는데 2024년에는 151.5엔이다. 기록적인 약세다. 엔화 가치 절하율이 무려 90%다. 최근 고점인 160엔을 대입해 보면 엔화 가치는 달러 대비 정확히 반 토막 난 셈이다. 같은 기간 한국 원화의 달러 대비 절하율 21.6%와 비교해 봐도 무려 4배가 넘는 수치다. 이 심각한 엔화 가치 절하율의 의미는 명확하다. 일본에만 자산을 100% 보유한 일본인은 14년 전보다 달러 기준 순자산이 반 토막 났다는 뜻이다. 문제는 일본과 한국은 노령화와 저출산 문제에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저출산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현 상황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무역수지 개선되지 않으면 통화 약세 지속 불가피
환율은 한두 가지 요인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따라서 미래의 환율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전문가들의 전망도 빗나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환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손꼽히는 건 무역수지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수지 상황은 어떨까.
한국과 일본의 무역수지는 과거보다 빠르게 악화된 상태다.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2017년에 952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후 중국으로의 수출 부진과 유가 폭등으로 수입이 급증하면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특히 유가 강세가 극심했던 2022년에는 478억달러라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의 무역수지 역시 최악이다. 트렌드이코노미(trendeconomy)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무역수지는 2017년에 262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최근 7년 중 최고치다. 하지만 2018년부터 적자로 전환돼 계속 내리막길이다. 한국처럼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게 일본의 약점이다. 고유가 영향으로 일본은 2022년에 1519억달러라는 기록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보였다. 2023년에도 연이어 339억달러 적자의 부진한 무역수지 결과를 보였다.
유가 외에 또 다른 변수는 주력 수출품이다. 한국의 경우 반도체, 자동차, 2차전지 등이 주력 수출품이다. 이 품목들이 계속 경쟁력을 유지해야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다. 일본 역시 자동차와 전자제품 수출 비중이 높다. 일본의 경우 한국보다는 내수 비중이 높은 게 특징이다.
일본과 한국의 인구 노령화와 저출산은 미래의 또 다른 경쟁력 저하 요인이다. 또 지금은 자유무역보다 자국우선주의가 심화되며 무역장벽마저 높아지고 있다. 이는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과 일본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고유가가 진정될 때쯤 한국과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가 개선될 가능성도 크다. 중요한 건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지 않는 한 일본과 한국 통화의 약세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한국의 경우 2024년부터 무역수지가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끝나면서 관광수지 적자가 급증해 경상수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위험요인이다. 일본도 무역수지가 미미하게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관광수지가 큰 폭 흑자를 보이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조롱받았던 와타나베 부인이 사실은 투자 고수?
일본에서 ‘와타나베’는 한국의 김 씨나 이 씨처럼 흔한 성(姓)이다. ‘와타나베 부인’이란 용어가 처음 나왔던 때는 ‘낮은 금리의 엔화를 빌려 해외의 고금리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 일본의 중상층 가정주부 투자자들’을 의미했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돼 일본 개인 외환투자자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들은 일본의 경제 거품이 붕괴된 후 장기 불황과 제로금리가 시작된 2000년 무렵부터 등장했다. 낮은 저축이자에 실망한 일본 주부들이 일본을 벗어나 해외 투자를 시작했다. 이들이 엄청난 규모의 국제 금융거래를 일으키며 글로벌 외환시장의 큰손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엔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를 통해 이자율이 낮은 일본에서 빌린 엔화를 이자율이나 수익률이 높은 국가에 예금(투자)해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 패턴을 보였다. 일종의 통화분산이다. 이를 통해 엔화 가치 약세 때는 환차익을 덤으로 얻게 된다. 예기치 못한 엔화 강세에도 해외 자산의 고금리로 손실의 일부 상쇄가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레버리지를 활용한 ‘FX(Foreign Exchange) 마진거래’다. 와타나베 부인 중 상당수가 활용했던 투자방식이다. ‘FX 마진거래’란 소액의 증거금으로 달러를 사고 엔화를 파는 방식의 외환선물거래를 뜻한다. 레버리지 투자라서 위험성이 상당하다. 특히 예기치 못한 엔화 가치 고평가 시기에는 상당한 손해를 볼 수 있다. 실제로 2008년에 호주달러를 이런 방식으로 매매했던 와타나베 부인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한국인이 주목할 건 이런 공격적인 방식이 아니다. 레버리지 없이 단순하게 엔화를 달러 자산으로 바꾼 온건한 성향의 와타나베 부인들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와타나베 부인이 14년 전에 본인 자산의 절반을 미국 달러 기반의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했다면 환차익만 100%가 발생했다. 주식 차익이나 채권 이자는 훨씬 더 크다.
일본의 경우 현재 해외 포트폴리오 투자 자산 중 미국 비중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 비중이 전 세계 1위다. 2위는 중국이다. 한국인 역시 일부 자산을 이렇게 달러 매수, 원화 매도로 배분할 경우 미래에 예상치 못한 원화 약세가 진행되더라도 자산가치 방어가 상당 부분 가능하다.
자국 부동산 투자가 진리? 비중 조절해야
자국 통화 약세는 수입물가 폭등과 글로벌 구매력 저하를 불러온다. 만약 일본인이 엔화 자산을 100% 가지고 있거나 한국인이 원화 자산을 100% 가지고 있다면 자국 통화 약세 시 앉은 자리에서 구매력이 확 깎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나마 인플레이션을 이겨내고 자산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부동산 투자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지난 13년간 한국의 주택가격 누적 상승률은 41.5%에 불과하다. 적게 오른 건 아니지만 체감적인 느낌보다는 작다. 주택은 아파트 외에도 빌라, 다세대 등 다양한 종류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또 서울이 아닌 지방 아파트의 경우 서울보다 상승폭이 작다. 의외로 일본 부동산의 13년 누적수익률이 34%로 높은 편이라 눈길을 끈다.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버블이 심각했지만 순식간에 붕괴됐다. 이후 2010년까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는 다시 조금씩 회복해 현재에 이르렀다. 따라서 2010년부터 비교하면 한국과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도쿄 핵심지역 맨션이나 서울 핵심지역 아파트가 아니면 부동산 수익이 달러 대비 환차손을 커버하기에는 부족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 국민 평균 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70%가 넘는다. 앞으로는 노령화와 저출산으로 부동산 상승률이 과거보다 더 낮아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부동산 투자는 세금도 잘 따져봐야 한다. 과거처럼 2주택이나 다주택 전략을 썼다가는 양도세와 보유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종합부동산세를 피하기 위한 빌딩 투자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최근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임대수익률이 대출이자보다 낮은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따라서 부자들 사이에서도 점점 한국의 유동성 낮은 부동산 자산보다 달러 기반의 해외주식이나 해외채권 비중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퇴직연금 활용한 달러자산 투자가 노후 생명줄?
부자가 아닌 일반 중산층은 대부분의 자산이 주거용 부동산에 묶여 있다. 따라서 달러 자산에 투자할 돈이 없다고 한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해외자산에 투자할 돈은 있다. 바로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다.
퇴직연금은 한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강제로 가입돼 있다. 어차피 중도인출이 힘든 돈이니 잘 운용하는 게 중요하다. 또 개인연금은 연말정산 때 소득공제를 목적으로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연금도 중도인출 시 손해라 장기적 관점에서 해외자산에 투자해 운용하는 게 더 유리하다. 2023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382조원이다. 매년 14%씩 증가하며 폭풍 성장 중이다. 개인연금 적립금 규모 또한 386조원(2022년 말 기준)이다. 합치면 800조원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융감독원의 퇴직연금 운용 현황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소중한 퇴직연금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무려 87.2%가 몰려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은 고작 12.8%에 불과하다.
DB형은 회사가 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95.3%로 높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DC형은 개인이 직접 운용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81.9%가 몰려 있다. 이런 부분이 개선돼야 은퇴 후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건 누군가는 지금 한국에 상장된 달러 기반의 ‘미국 S&P500 ETF’나 ‘미국 나스닥100 ETF’를 퇴직연금 계좌에 편입해 20년 뒤의 구조적인 달러 강세와 원화 약세에 대비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에 대비해 한국 주식보다 미국 주식을 선호하는 현상도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조만간 유가가 안정을 찾고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하한다면 단기적으로는 달러 강세가 진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장기적으로는 원화 강세 요인보다 달러 강세 요인이 더 많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급격한 엔화 붕괴 상황에서도 와타나베 부인이 본인의 자산가치를 지켜내는 전략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