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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기업 회장의 문화 투자..."대전을 예술도시로"

2024년 04월호

에너지 기업 회장의 문화 투자..."대전을 예술도시로"

2024년 04월호

|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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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디움은 개관전으로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전시를 개최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인구 144만 명의 대전광역시는 시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문화예술에 대한 수요도 높다. 그러나 수준 높은 전시회를 개최하는 미술관과 화랑은 태부족한 상황이다. 시립미술관이 있기는 하나 임팩트 있는 기획전 대신 소장품을 바꿔 거는 정도다. 클래식 음악회 또한 세계적 수준의 공연은 대부분 서울-대구-부산으로 이어질 뿐 대전은 비켜가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의 도시가스 공급 업체인 CN씨티 에너지(회장 황인규)가 대전시 중구 인동에 ‘헤레디움’이라는 품격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설립해 화제다. 지난해 9월 헤레디움은 독일 출신의 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79)의 작품전으로 공식 개관해 대전은 물론 전국의 미술 팬을 장장 5개월간 들썩이게 했다.

안젤름 키퍼의 전시회는 서울의 톱 갤러리인 국제갤러리가 지난 2008년 한 차례 개최한 적이 있지만 국내 미술관에서 키퍼의 대형 작품을 모아 본격적으로 전시를 꾸민 것은 헤레디움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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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규 회장은 ‘안젤름 키퍼가 한국에서의 전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개관전을 제안해 오케이를 받았다. 개관전의 제목은 ‘가을: Herbst’이었다. 키퍼는 가을 풍경과 낙엽을 주제로 특유의 부조 작품 18점을 내놓았다. 그런데 18점 모두가 대작인 데다 공간을 위해 특별 제작한 신작이어서 헤레디움 측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외에 가야 볼 수 있는 거장의 압도적인 작품이 대전에 왔다는 소식에 ‘고수’들은 헤레디움을 앞다퉈 찾았다. 개관을 알리는 오프닝 데이에는 내로라하는 미술전문가는 물론 정·재계 등 각계 유명 인사들이 대거 몰려 성황을 이뤘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키퍼는 캔버스에 모래, 짚, 나무, 재, 진흙, 납과 같은 재료들을 콜라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낙엽을 납으로 만들어 붙인, 입체적인 작품이 대거 나왔다.

일제 수탈의 상징,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

대전 헤레디움을 찾는 이들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대전에 이토록 아름답고 품격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탄생했다는 점에 우선 놀란다. 두 번째는 헤레디움이 100년 전 일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복원했다는 점에 놀란다. 마지막으로 헤레디움이 선보이는 미술과 음악 콘텐츠의 수준에 놀란다고 한다. 글로벌 수준의 미술 작품이 내걸린 공간에서 명망 있는 음악가들이 공연을 펼치니 감탄사가 이어진다는 것.

헤레디움은 국내에 별반 남지 않은 근대건축을 복원해 미술관으로 만든 사례다. 그것도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의 건물이란 점에서 이채롭다. 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전국 주요 도시와 곡창지대에 9개의 동척을 설립했다. 그중 부산, 대전, 목포의 동척만이 남아 있다. 쌀 시장이 유명했던 대전은 일본이 만주 진출을 위해 철도를 놓으면서 요지가 됐다. 해방 후 대전 동척은 대전체신청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4년 민간에 매각돼 철강자재회사가 소유해 왔다. 2004년 근대건축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일제 수탈의 상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대부분 꺼리기 십상인 이 근대건축물에 황인규 회장은 빨려들었다. 아픈 과거사를 기억하되 이를 뛰어넘어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결국 대전시민과 미래 세대를 위한 ‘영감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목표로 귀결됐다.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24년간 일한 황 회장은 2014년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왔다. 대한도시가스 창업주 고 황순필 회장의 장남인 그는 CEO로 변신한 후 대전에 기반을 둔 기업으로서 대전의 정체성에 주목하게 됐다. 미술관을 지어 대전시민과 소통하겠다는 목표 아래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대전 구도심의 ‘동척’ 건물과 조우한 것. 철강재와 타일 등을 취급하는 건물주를 어렵사리 설득해 건물을 사들인 뒤 2년간 복원작업을 했다.

근대건축 전문가인 목원대 김정동 명예교수의 자문을 얻어 최대한 100년 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 했으나 난관의 연속이었다. 설계도가 남아 있지 않아 외관사진 등에 의존해 보수를 진행했다. 오랜 역사를 품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쓰겠다는 의지로 외벽 벽돌과 창문 등을 가급적 살렸다. 특히 100년 된 콘크리트 천장은 원형이 잘 남아 있어 고풍스럽다. 그리곤 마침내 지난해 9월 안젤름 키퍼 전시회로 헤레디움은 공식 개관했다. 신화와 전쟁, 생명과 폐허를 테마로 작업하는 키퍼의 드라마틱한 작품은 헤레디움의 공간적 특성과 잘 어우러져 시너지를 냈다. 헤레디움의 함선재 관장은 “폐허를 끝이 아닌 창조의 시작점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예술적 시선이 우리 건축과 공감대를 형성해 더욱 의미가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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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디움은 개관전으로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전시를 개최해 큰 화제를 모았다.


과거를 품은 공간 일깨운 황 회장의 현대미술컬렉션

헤레디움은 두 번째 기획전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지금, 여기, 현대미술전’을 개막했다. 이 전시는 황인규 회장이 다년간 수집한 미술품 중 현대미술의 각 사조를 대표하는 작품 위주로 꾸며졌다. 독일 작가인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 토마스 쉬테의 평면 작품과 영국 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 로즈 와일리,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회화 및 조각이 출품됐다. 그중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의 9개 패널로 이뤄진 ‘무제’ 연작은 미술관 너른 벽을 꽉 채울 정도로 방대하다.

또 프랑스의 개념미술가 소피 칼의 텍스트와 사진으로 이뤄진 작품, ‘21세기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 작가 조지 콘도의 뉴 큐비즘 페인팅도 선보였다. 조지 콘도의 회화는 글로벌 아트마켓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최고의 블루칩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관람객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은 일본 출신의 스타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페인팅이다.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작품이어서 헤레디움 측은 미술관 입구에 이 작품으로 홍보 배너를 제작했다.

황 회장은 에너지 기업 CEO로 취임하기 전부터 미술과 음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단순한 취미 이상이다. 특히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는 전문가 뺨치는 식견을 지녔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미술 또한 마찬가지로 깊게 파고드는 진지한 애호가다. 미술 작품의 사조라든가 예술적·미학적 특징은 물론이고 작품에 얽힌 역사적·문화적 배경까지 곱씹는다는 것. 안젤름 키퍼 전시를 계기로 황 회장과 더 가까워진 오스트리아 화랑 타테우스 로팍의 로팍 대표는 “황 회장은 대단히 지적인 컬렉터이자 미술애호가다.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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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디움에서는 클래식 공연이 자주 열려 대전 음악팬들에게 문화 허브로 부상 중이다.


미술 전시 때마다 특색 있는 클래식 공연 곁들여

헤레디움은 라틴어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이다. 100년이 넘은 근대건축물의 역사성을 담기 위해 명명된 이름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원형을 살려 복원한 이 공간은 전시가 중심이긴 하나 공연장으로서도 손색없도록 리노베이션을 진행했다. 공식 개관에 앞서 2022년 말 ‘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를 프리뷰 전시로 진행했고, 음악회도 열었다. 이어 작년 9월 정식 개관 때는 실내악연주 등 클래식 콘서트와 각종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최근에는 예술원 회장인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한동일 등 전설적 음악가들이 연주자로 나서 큰 화제를 모았다..

‘대전시민이 있기에 CN씨티가 있다’고 강조하는 황 회장은 헤레디움을 통해 대전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얻길 소망하고 있다. 그는 “미술관 운영, 정말 쉽지 않다. 그래도 대전시민들과 미술과 음악을 통해 소통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오리지널리티에 주목하고, 과거를 현재적·미래적 의미로 재해석하려는 황인규 회장의 예술적 의지와 문화 투자가 낙후돼 있던 대전 문화예술계에 계속 활력을 불어넣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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