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의 대남 비난 문구를 살펴보면 기이한 대목이 있다. 기존에 남한을 호칭하는 대표적 표현인 ‘남조선’이 사라지고 대신 ‘대한민국’이 등장한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이나 한국 등의 단어를 입에 올리는 걸 금기시해 왔다. 탈북민들은 과거 대북 지원 식량 포대에 ‘대한민국’이란 글자가 크게 씌어 있었지만 그게 남쪽에서 보낸 쌀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만큼 대한민국이란 말은 생소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대한민국이란 말이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에 수시로 등장한다. 지난 11월 8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해 대남 비난을 퍼부으면서 “삐라 살포는 《대한민국》 종말의 기폭제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남측을 ‘괴뢰 지역’ 등으로 깎아내리는 표현도 동원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이란 말을 버젓이 쓴 대목이 가장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 군수공장을 방문해 소총을 사격해 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8월 6일 공개한 사진이다. [사진=조선중앙통신]
지난 7월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이 첫 사용
북한의 대한민국 호칭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남 비난의 수위를 한껏 올리면서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운 지난 7월 처음으로 나왔다. 첫 포문을 연 건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다. 그는 같은 달 10일 노동당 부부장 자격으로 낸 담화에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합동참모본부가 미 국방성이나 미 인디아태평양사령부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자처해 나서고 있다”며 비난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김여정은 대남 비난 언급을 늘어놓은 뒤 “《대한민국》 족속들의 체질적 특질인 듯하다”는 등의 비야냥까지 입에 올렸다. 저급한 그의 발언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한민국 언급 뒤에 ‘족속’ 운운하는 표현을 썼다는 건 북한의 의도나 대남 인식을 엿보게 한다.
이후 북한의 대한민국 표현은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지난 10월 17일에는 조선중앙통신이 한미연합 공중훈련을 위해 미 핵전략폭격기 B-52가 한반도에 전개된 것을 빌미로 논평을 내고 “미국과 《대한민국》 깡패들이 우리 공화국을 향해 핵전쟁 도발을 걸어온 이상 우리의 선택도 그에 상응할 것”이라며 핵 선제타격을 위협했다. ‘깡패’ 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북한 관영 매체가 대한민국을 언급한 건 주목되는 움직임이다.
통상 북한은 우리를 ‘남조선’이라 불러왔다. 자신들의 정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줄여 ‘조선’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그 남측 지역을 ‘남조선’ 혹은 ‘공화국 남반부’라고 칭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당한 지역’이란 의미가 숨겨져 있다. 북한이 노동당 규약 등을 통해 ‘전국적 범위에서의 혁명’을 강조해 왔고, 최근 들어 영토완정(完整)이란 언급을 자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북한의 농장에서 열린 올해 결산분배 행사. 한 해 동안의 곡물 생산을 확정하고 이를 노동당과 주민 몫으로 나누는 절차다. [사진=조선중앙통신]
금기시하던 ‘대한민국’ 표현 관영 매체가 사용
북한 매체뿐 아니라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9월 26~27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9차 회의 연설에서 대미 비난 발언을 하면서 “《대한민국》과의 공모 밑에 우리 국가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목적으로 한 ‘핵협의그루빠’를 가동시킨 데 기초하여 침략적 성격이 명백한 대규모 핵전쟁 합동 군사연습을 재개했다”고 주장했다. 또 “뿐만 아니라 일본, 《대한민국》과의 3각 군사동맹체계 수립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고지도자와 그 일족의 이런 발언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중계되고 노동신문을 통해서도 공개돼 주민들도 이를 접할 수 있다. 주민 입장에서는 금기시하던 대한민국이나 한국 표현 사용에 어리둥절해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를 대한민국으로 지칭하고 나선 북한의 숨은 의도는 다소 낯선 표기부호인 ‘《 》’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신문·잡지 등의 글이나 문헌에서 이를 적지 않게 사용하는데 주로 인정하기 싫거나 부인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단어를 입에 올리거나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 이용된다. 즉 대한민국의 경우도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거론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이를 씌워 등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한이 우리 체제를 인정하려는 의미’라는 해석을 제기한다. 또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상으로 남북관계를 가져가려는 것’이란 풀이도 있다. 하지만 이는 희망 섞인 일방적 기대에 불과한 데다 김정은 정권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우리 체제를 깎아내리고 남북 간 완전한 단절이나 절연(絶緣)을 통해 대남 대립각을 극단적으로 가져가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국가정보원 차장을 역임한 한기범 북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은 “북한이 남한 정부와는 같은 민족임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적대 관념의 표출로, 대남 핵 선제공격 위협과 공세적 전쟁준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괴뢰(傀儡)’는 본래 ‘꼭두각시놀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인형’이란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유래해 ‘남이 부추기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북한의 조선말사전(2006, 사회과학출판사)은 괴뢰에 대해 ‘①제국주의를 비롯한 외래 침략자들에게 예속되어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팔아먹는 민족반역자 또는 그런 자들의 정치적 집단 ②=꼭두각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뜻은 유사하지만 북한의 경우 본래 뜻보다 더 정치적인 의미와 함께 한국 정부에 대한 부정과 대남 비난의 함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북한의 간판급 아나운서인 리춘희. [사진=조선중앙TV 캡처]
남북대결 축구경기 TV중계도 ‘괴뢰’ 자막
괴뢰라는 표현은 ‘남조선’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조선중앙TV는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8강전 경기를 이틀 뒤인 9월 30일 녹화중계하면서 스코어 화면에 기존의 ‘남조선’ 대신 ‘괴뢰’라고 올렸다. 북한 쪽은 ‘조선’으로 표기했다.
중앙TV는 “경기는 우리나라(북한) 팀이 괴뢰 팀을 4 대 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타승한 가운데 끝났다”고 전했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 등 북한의 선전매체들도 경기 소식을 전하면서 ‘괴뢰’라는 표현을 써 앞으로도 이런 기류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시대착오적이다. 남북은 과거 냉전 시기 체제 대결을 벌이면서 상대를 ‘괴뢰’로 깎아내리며 비방선전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도 1980년대까지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나 아웅산·대한항공기 테러 등의 도발 때 국민의 격앙된 대북 감정이 반영된 ‘북괴(北傀)’라는 표현을 쓰며 김일성과 김정일 화형식 등을 벌인 적이 있다.
하지만 냉전은 종식됐고 남북한의 체제 대결도 한국의 압도적 경제발전과 국제적 위상 격상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에 이르렀다. 북한이 괴뢰라는 표현을 써도 그저 해프닝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국민들은 핵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남북 체제 대결에서도 심한 열패감을 보이고 있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이런 치기 어린 행동에 안쓰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철 지난 괴뢰 논란보다는 굶주리는 주민을 제대로 먹이고 인권을 보장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드는 게 김정은 정권이 택할 노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