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지배인과 여종업원 등이 최근 집단 탈북해 한국행에 성공한 사건은 김정은 체제에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지게 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물 먹은 담벼락처럼 무너지게 된다”며 청년세대의 사상교양을 강조했는데 바로 북한판 MZ세대(1980~2000년 출생한 청년층)인 해외식당 종업원들이 무더기로 탈북·망명길에 올랐다는 점에서다.
뉴스핌의 단독보도로 전해진 이번 망명은 타슈켄트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이 지난 8월 30일 현지 한국대사관에 진입해 서울행을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정부는 주재국과의 외교 협의를 거쳐 9월 3일 일행을 항공편으로 한국에 입국시켰다. 이들은 현재 국가정보원 등 관계기관의 합동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타슈켄트의 북한 식당 ‘내고향’의 외부 모습. [사진=유튜브 TV Uzbekistan]
이번에 탈북해 입국한 북한 종업원들은 타슈켄트에 북한이 2019년 9월 개설한 한식당 ‘내고향’에서 근무해 왔으며, 문을 연 직후인 이듬해 초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면서 한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는 등의 문제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파악됐다.
통상 북한 식당의 해외근무 기간이 3년인 점에 미뤄볼 때 평양 귀환 시점이 다가오자 한국행을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미 현지 한국 주재원이나 관광객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현실로 깨닫게 됐고, 북한에서 교육받은 게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심적 동요를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젊은 세대인 이들은 드라마, 가요 등 한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헤어스타일이나 화장법, 옷차림 등을 한국이나 서구식으로 따라 하게 되면서 집단 탈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당국 조사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들 외에 추가 탈북자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뉴스핌의 보도 이후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9월 4일(현지시간) “북한 식당 ‘내고향’의 종업원 5명의 탈북에 종업원 관리감독을 담당한 총책임자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8월 말 탈북한 3명 외에 지난 5월과 6월 각각 1명의 종업원이 연쇄적으로 탈북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지배인과 다른 종업원들도 이에 따른 문책이 두려워 추가 탈북을 결행했을 것이란 얘기다.
RFA는 현지 한국 교민의 말을 인용해 “북한 식당 ‘내고향’에는 홀서빙 인원 5명과 주방 인원 2~3명 등 모두 7~8명가량이 근무하고 있었고 총책임자는 홀에서 서빙을 담당했다”며 “홀서빙을 담당한 종업원들이 모두 탈북했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5월과 6월 탈북 이후 식당에 대한 보위부의 감시가 한동안 있었다면서 “탈북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종업원에 대한 소환이 이뤄지지 않은 건 코로나 상황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란 관측이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북한 식당은 간판이 걸려 있지만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며 북한이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 방송은 덧붙였다.
하지만 당국자는 “한국행에 성공한 이들 3명 외에 추가적인 탈북 종업원이나 북측 관계자가 있는지 여부는 신변 안전 등을 위해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 식당 여종업원의 집단 탈북과 한국행은 지난 2016년 4월 중국 닝보 여종업원 12명과 지배인 허모 씨 사건 이후 처음이다. 철저한 통제 속에 운영되는 해외 북한 식당에서 집단 탈북이 이뤄진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6년 전 닝보 사태 이후 북한은 해외 근무자의 탈북을 막기 위해 감시망을 더욱 철저하게 짰다고 한다. 하지만 타슈켄트의 경우 허술한 구멍이 있었다고 탈북 종업원과 정부 당국자들은 밝히고 있다.
북한은 1992년 우즈베키스탄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이듬해 타슈켄트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하지만 핵 실험과 대북 제재 등으로 우즈베키스탄 측이 북한 대사에게 아그레망을 내주지 않는 등 갈등을 빚다 2016년 8월 공관을 폐쇄하고 철수했다.
이 때문에 현지 식당에는 제대로 된 보위부의 감시망 등이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닝보 식당에서 지배인으로 일했던 허강일 씨는 “대사관이 없는 타슈켄트에서 북한 식당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건 지배인이나 해당 회사가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그만큼 북한이 해외에서의 외화벌이나 현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작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관계당국은 이번 집단 탈북 사태를 한 달 가까이 철저히 비공개에 부쳐 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대북 인프라 지원 등을 제안한 ‘담대한 구상’에 대해 북한이 극렬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닝보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2016년 4월 집단 탈출해 한국에 도착한 지배인 허모 씨와 여종업원 등 13명이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북한이탈주민보호시설로 들어서는 모습. [사진=통일부]
6년 만에 재연된 북한 식당 집단 탈북 사태가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후반부터 꼬일 대로 꼬여온 남북관계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풀릴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민감하게 여기는 해외 식당 탈북이란 돌출변수가 생겼다는 점에서다.
북한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상태다. 북한 입장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과 미사일을 앞세워 체제 수호 의지를 과시하고 리더십을 다지는 찰나에 집단 탈북 사태가 불거졌다는 점에서 당혹스러울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김 위원장 직접 연설 등을 통해 반(反)사회주의 현상 단속을 주문하고 MZ세대의 체제 이탈을 막는 데 주력해 왔다는 점에서 청년세대인 여종업원들의 탈북은 김정은 리더십의 스타일을 구기는 일로 여겨질 수 있다. 2020년 초 코로나 확산 사태 이후 북·중 접경을 통한 탈북이 사실상 어려워졌고, 양측 모두 사회 통제가 심해졌다는 점에서 해외 식당 탈북 사태는 북한 입장에서 허를 찔린 셈이 될 수 있다.
해외 식당에 파견되는 종업원의 경우 중산층 이상의 자녀 가운데 예술을 전공하거나 평양상업대학 등을 나온 검증된 인원이란 점에서 탈북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더욱이 함께 일하던 종업원들이 집단 탈북한다는 건 난감한 일이다. 닝보 북한 식당의 여종업원 12명의 탈북 사태 때 북한은 ‘납치’를 주장하며 송환을 요구했다. 북한에 있는 부모와 가족까지 TV에 내세워 호소하는 등 한국에 온 여종업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이번에도 북한이 타슈켄트에서 온 여종업원들의 북송을 요구하면서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도 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은 “그렇지 않아도 대적(對敵) 관계 운운하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켜 온 북한 입장에선 트집 잡을 소재가 필요했는데 이번 사건이 터졌다”며 “돌려보내라는 등의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점을 의식해 사건 발생 한 달이 가깝도록 탈북과 입국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닝보 북한 식당 탈북 때 공개 브리핑을 했다가 ‘기획탈북’이란 논란을 빚었던 전례도 참고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6년 전처럼 집단 탈북 문제를 이슈화하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자칫 본전도 찾지 못하고 북한 내 인권 상황이나 탈북 문제만 드러내 보이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와 맞물린 대북 인프라 지원 등을 담은 ‘담대한 구상’을 차분히 이행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남조선 괴뢰는 불변의 주적”(8월 10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운운하며 대남 비난과 대화 거부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진정성 있는 접촉을 꾸준히 시도한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닝보 북한 식당 집단 탈북 당시에도 북한은 이들의 송환과 이산상봉을 연계하는 등 무리수를 뒀지만 곧 철회하고 상봉행사에 응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일시적으로 탈북 사태에 불쾌감을 드러낼 수 있지만 지속하기에는 명분도 실리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란 얘기다.
한편 닝보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한국에 정착한 12명의 여종업원 가운데 일부가 연주가와 가수 등으로 공개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탈북 일행 가운데 북한 최고의 가수 최삼숙의 딸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던 리은경 씨는 기타리스트로 변신해 최근 공연무대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리 씨는 지난 8월 초 통일부가 한강 노들섬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가해 밴드 일행과 능숙한 연주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남한 출신 기타리스트와 함께 공연하면서 아리랑을 편곡해 선보이는 등 음악적 기량을 드러냈다.
탈북 당시 앳된 모습으로 관심을 끌었던 김혜성 씨는 공연무대에 보컬로 출연해 가창력을 과시하고 있다. 김 씨는 리은경 씨와 마찬가지로 한국 정착 초기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에 올라 있는 새 이름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지난 9월 28일 “12명의 탈북 여종업원 대부분이 이름뿐 아니라 성까지 다르게 바꿀 정도로 신변 노출에 민감해했다”고 귀띔했다
공개 활동에 나서기는 했다지만 리은경 씨를 비롯해 모두가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도 이런 입장을 고려해 신변보호 문제를 각별히 챙기고 있다고 한다. 얼굴이 지나치게 노출되거나 댓글 등으로 신상이 알려진 경우 유튜브 영상을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 외에 나머지 탈북 여종업원들도 입국 초기 관계당국의 조사를 마친 뒤 주택 등을 배정받고 정착지원금 등을 지급받았다. 이들은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을 졸업했는데 전공은 실용음악과 중국어, 서비스 관련 분야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절반 정도가 결혼한 상태로 서로 연락을 하며 모임도 갖는 것으로 한 탈북단체 관계자는 전했다.
탈북 여종업원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기획탈북’ 논란이 벌어지면서 상당히 불안해했고, 특히 북한 당국이 송환을 요구하면서 부모들을 관영 선전매체에 출연시키는 등 압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심적 고통을 겪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 관계자는 “이런저런 주장과 논란이 있었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함께 의기투합해 북한의 통제를 벗어나 한국행을 선택했다는 점”이라며 “일부 여종업원은 ‘우리가 좋아서 온 건데 기획으로 몰아 속상했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과 함께 온 식당 지배인 허모 씨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북한 관련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들의 잇단 탈북 사태는 북한 체제가 직면한 위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개혁·개방에 나설 것이란 주민들의 기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민생 우선’ 공약이 빈말이었음을 최근의 핵과 미사일 도발, 그리고 그에 따른 대북 제재와 경제난이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북한 체제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젊은 층이 동요하고 체제를 등지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자신들이 속아 왔다는 점을 절감한 이들은 해외근무 기회를 틈타 목숨을 건 탈북을 결행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거나 민생 챙기기에 나서지 않는 한 북한 체제에 미래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젊은 층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