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아트페어 佛 ‘피악’, 1위 ‘아트바젤’에 밀려 퇴출
고금리·고유가에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장’으로 급변
|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스위스 바젤에서 매년 6월 열리는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 아트바젤. 올해는 파리에도 진출했다.
고가의 미술품을 사고파는 미술시장은 비교적 우아한 시장이다. 명분이 중요하고, 체면과 품격이 중요시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아트마켓 또한 명분보다는 실리가 중요시되며 시장 판도가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수익 창출을 위해 체면이나 배려 따위는 헌신짝 내버리듯 하는 미술유통기업이 늘고 있다. 고금리, 고환율, 고유가 상황에선 강자만이 살아남으니 철저히 이익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계 2위의 아트페어로 꼽히던 프랑스 피악(FIAC)의 퇴출이다. 피악은 올 들어 이 분야 세계 최강자인 스위스의 아트바젤에 무릎을 꿇고 쓸쓸하게 퇴장했다. 47년 역사의 피악은 아트페어를 40여 년간 개최해 오던 ‘파리의 명물’인 그랑팔레(Grand Palais)를 아트바젤 측에 빼앗기는 바람에 페어를 포기했다.
지난 1월 아트바젤을 개최하는 스위스의 MCH그룹은 파리의 매머드 전시관인 그랑팔레의 ‘10월 사용권’을 놓고 피악을 주관하는 RX사와 입찰경쟁을 벌였다. MCH는 그랑팔레를 1주일간 빌리는 데 자그마치 1000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20억원)라는 거액과 ‘7년 계약’을 내세워 그랑팔레 측으로부터 낙점을 받았다. 피악 측은 ‘설마 그랑팔레가 프랑스 예술기업을 제치고 스위스 기업의 손을 들어주겠어?’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해마다 10월에 그랑팔레에서 열리던 피악의 개최 날짜도 아트바젤이 가져가자 피악은 급하게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거대한 유리돔을 얹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그랑팔레에 필적할 만한 전시관을 찾지 못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한마디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트바젤이 파리에서 ‘아트바젤 파리+’를 새로 개최한다는 소식에 (피악에 수십 년간 참가하던) 미국과 유럽의 메가 갤러리들은 일제히 피악을 버리고 바젤로 돌아섰다. 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같은 톱 갤러리들이 바젤로 옮겨타자 그 밑의 화랑들도 재빨리 바젤호에 승선했다. 심지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랑인 페로탕마저도 ‘아트바젤 파리+’를 택하자 피악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프랑스 미술계는 강한 자가 더 강한 자에 의해 맥없이 쓰러지자 큰 충격에 휩싸였다. ‘프랑스 갤러리와 아트마켓이 이토록 허약했느냐’는 탄식이 이어졌다.
피악은 단순한 미술장터가 아니라 파리의 10월을 예술과 디자인, 패션과 미식으로 물들이며 시 전체를 들뜨게 했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만약 호황기였다면 바젤은 바젤대로, 피악은 피악대로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럽 미술시장은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며 위축됐고, 이는 결국 피악의 숨통을 끊어놓고 말았다. 글로벌 톱 갤러리의 한 관계자는 “피악은 프랑스의 간판 아트페어로 도시 곳곳에 대형 야외조각이 설치되고, 젊고 유망한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는 등 매력이 많은 페어였다. 그러나 관객은 많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은 편이라 우리도 바젤로 갈아탔다. 신의를 지키고 싶었으나 유럽 미술시장이 워낙 안 좋아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장대한 유리돔으로 된 파리 그랑팔레. 이곳에서 매년 열리던 피악(FIAC)은 아트바젤에 밀려 퇴출됐다.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볼 때 1등 아트페어인 바젤을 이길 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영국의 프리즈가 2위로서 바젤의 독주를 견제할 뿐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1970년 시작된 아트바젤(매년 6월 개최)은 이미 미국 마이애미(12월)와 홍콩(3월)에 진출하면서 전 세계 모든 페어를 발 아래에 두고 있다. 그리곤 이번에 ‘아트바젤 파리+’(10월)를 출범시키며 전 세계 상위 1%의 슈퍼컬렉터를 4개 도시에서 공략하게 됐다.
아트바젤의 파리 진출은 마이애미 및 홍콩 진출과는 궤를 달리한다. 마이애미와 홍콩은 아트마켓으로서 글로벌 위상이 낮았던 도시로, 바젤의 진출로 그 위상이 급부상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프랑스의 고유 브랜드인 피악이 그 역할을 잘 수행 중이었다. 47년 역사의 피악은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바탕으로 바젤과는 또 다른 페어를 펼쳐 왔다. 아트페어가 열리는 그랑팔레의 웅장한 유리돔과 내부 공간은 피악을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아트페어로 인식케 했고, 인근 공원과 식물원, 방돔광장에서의 야외전시와 나이트 이벤트가 더해지며 예술적 무드를 고조시켰다. 바젤이 철저히 컬렉터를 겨냥하며 실속을 추구한다면, 피악은 애호가 전반을 끌어안으며 보다 대중적인 페어를 지향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에 피악 관람객은 매년 증가해 8만~9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부자 고객을 매우 노련하게 공략하는 바젤에 밀려 피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편 글로벌 경매사와 다국적 화랑들은 구조조정과 전략 수정을 통해 불황기에 대처하고 있다. 홍콩 정세가 불안하자 서울에 지점을 내고 공격적인 ‘아시아 마케팅’을 구사하려던 소더비 경매는 당분간은 정지작업만 하기로 했다. 3위 경매업체인 필립스도 작년에 수립한 글로벌 확장전략을 수정하고 내부 정비에 나섰다. 파리 그랑팔레에서 수십 년간 열렸던 프랑스의 대표 아트페어 피악(FIAC). 피악은 이 특별한 공간의 대여료로 거액을 써낸 아트바젤에 밀려 퇴출되고 말았다.
미국의 유서 깊은 화랑인 레비 고비는 올 들어 대변신을 시도했다. 가고시안, 페이스 같은 거함 화랑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전통보다는 경쟁력 제고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 화랑은 LGDR이라는 합동갤러리를 출범시켰다. LGDR은 저마다 한가락 해온 유명 딜러 4인의 성을 딴 신개념의 아트벤처다. 이들은 “기존의 화랑 경영방식으로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없다. 우리는 국제적 감각에 기반한, 전혀 다른 방식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LGDR은 9월 초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 미국의 인기 작가 조엘 메슬러의 작품으로 솔로쇼를 꾸며 첫날 출품작 13점을 솔드아웃시켰다. 한국 고객의 취향을 면밀히 사전분석한 것이 주효했다.
그런데 이 화랑은 이튿날 메슬러의 작품을 몽땅 떼어내고 다른 작품들을 내걸어 지적을 받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아트페어는 판매도 중요하나, 작가 소개도 중요하기 때문에 작품이 팔렸다고 전량 교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LGDR은 이를 개의치 않은 것. 그러자 “메슬러 작품을 보러 왔는데 완판됐다고 모두 내리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명분보다는 철저히 실리를 좇는 현상이 불황의 미술계에서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몸집 제대로 줄이고, 돈 잘 버는 게 최고인 시대가 드디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