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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오르세’ 건립 필요” 이건희 컬렉션과 근대미술관 해법은?

2021년 07월호

“한국에도 ‘오르세’ 건립 필요” 이건희 컬렉션과 근대미술관 해법은?

2021년 07월호

샤갈, 모네, 고갱...파리에 근대미술관 ‘오르세’ 있듯
우리도 ‘근대미술관’ 만들어 끊어진 역사의 맥 이어야


| 이영란 기자 art29@newspim.com


‘이건희’ 이름값...지자체 미술관 유치전 과열

올 상반기 우리 미술계 최대 이슈는 ‘이건희 컬렉션’이었다. 작년 10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타계한 후 고인이 30여 년간 수집한 미술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미술에서부터 근현대미술이 망라된 수만여 점의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컬렉션으로, 평가액이 무려 2조5000억~3조원으로 추정됐다. 게다가 시중에서 거래될 경우 10조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이건희’라는 이름의 프리미엄 때문이다.

이 회장의 유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와 서화·도자기·전적류 등 고미술품 2만300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근현대미술품 1488점을 기증했다. 이처럼 유족이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미술관 신설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자 스물다섯 곳이 넘는 지방자치단체가 ‘이건희미술관을 세우겠다’며 발벗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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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중 근대미술에 해당되는 나혜석의 화녕전 작약. 1930년대 작품.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부산광역시는 가장 먼저 미술관 건립 의사를 내놨고, 대구광역시와 오산시는 2000억원이 넘는 건립비를 부담하겠다며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다. 구미시·진주시·창원시 등도 이병철-이건희 부자와의 각종 인연을 내세우며 유치를 희망했고, 충남 서산시는 릴레이 청원을 펼치고 있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국토 균형발전’과 ‘수도권에 편중된 문화시설의 분산’을 내세우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런가 하면 특정 작품을 콕 집어 “우리에게 달라”는 곳도 적지 않다. 불교계는 고려불화와 불상 등 불교문화재를 요구했고, 강서구 측은 겸재 정선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지명했다. 강서구 측은 “겸재가 영조 어간에 강서구청장에 해당되는 양천현령을 지냈고, 강서구에 ‘겸재정선미술관’이 있으니 인왕제색도는 강서구로 와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국내의 미술사학자, 미술관장 등 미술계 원로들은 “모두 이건희미술관을 어디에 설립하느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데 그 이전에 컬렉션 자체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지난 4월 미술계 인사 380명이 참여해 발족한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세미나를 갖고 ‘이건희 컬렉션’을 보여주는 ‘이건희미술관’이 아니라 기증작품을 포함한 근대미술품을 모은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을 검토해야 할 때라고 주창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정체성 형성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시기인 근대를 압축하고 상징하는 국립근대미술관의 존재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어 “때마침 근대의 위대한 유산 1000여 점이 포함된 이건희 컬렉션의 국가기증이 이뤄졌으니 이를 계기로 지금껏 공백으로 남아 있던 근대미술관 건립을 관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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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중 해외 근대미술에 해당되는 파블로 피카소의 도예작품.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미술계 “ ‘이건희미술관’ 대신 ‘근대미술관’ 설립”

내년 지자체장 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이건희미술관 유치 경쟁이 과열 양상을 빚는 가운데 미술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이뤄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6월 초 미술사학자·큐레이터·작가·평론가·갤러리스트 등 다양한 직군의 전문가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148명) 중 78.4%(116명)가 ‘이건희 컬렉션’의 활용 방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근대미술품과 합해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꼽았다. 다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관리’(22명)가 14.9%였으며, ‘장르와 시대를 모두 포함한 이건희전시관 설립’(17명)은 11.5%에 불과했다.

응답자들은 별도로 이건희전시관을 건립할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눠 기증한 기증자의 뜻에 반함’, ‘건립장소 선정의 어려움’, ‘유형별·시대별로 분류해야 하는 박물관학에 반함’ 등을 꼽았다.

지자체의 이건희미술관 유치 경쟁에 대해서는 ‘국립중앙박물관 분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및 지방 공립미술관들이 협업해 순회전시하면 된다’, ‘내년 지자체장 선거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보여주기식 주장’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아울러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에 대해서는 ‘매우 필요하다’(76.9%), ‘필요하다’(12.1%) 등 89.1%(131명)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즉 이번 삼성가의 미술품 기증을 계기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대미술품과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모아 국립근대미술관을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는 것에 약 90%의 전문가가 뜻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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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옛 정부종합청사를 리모델링해 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자는 방안도 제기됐다.


佛 오르세·英 테이트 등 근대미술관이 모델

실제로 선진국 중 근대미술관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프랑스의 경우 오르세 뮤지엄이 바로 근대미술관이고, 영국에는 테이트, 일본에는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독일과 미국도 마찬가지다. 파리를 찾는 여행객들이 고대에서부터 18세기 미술까지 방대한 시기의 작품을 전시하는 루브르에 비해 모네, 샤갈, 고갱 등 19~20세기 초 미술을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오르세에 더 매료되는 데 비해 우리는 아쉽게도 오르세 같은 근대미술관이 없다. 짧은 미술관 역사 때문에 근대를 건너뛰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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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근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전시하는 프랑스의 국립근대미술관 오르세 뮤지엄.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오르세와 테이트 등은 근대라는 특정 시기에 초점을 맞춰 수집, 보존, 연구, 교육, 전시, 교류 등의 미술관 기능을 수행한다. 외국 선진 미술관의 경우 ‘전근대-근대-현대’의 시대 구분과 역할 분담이 명확한데 우리는 이가 빠진 것처럼 근대미술관이 없어 맥이 끊어져 있다”고 밝혔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인 덕수궁관이 ‘근대’ 부문을 맡고 있지만 ‘현대’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에게 근대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도 말이다. 외세 침탈과 문명의 서세동점이 진행됐던 격동의 시간이었고 봉건과 민주, 전통과 서구, 식민과 자주가 대립하며 극심한 질곡을 겪었다. 근대미술관은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을 증언하는 물질과 정신의 전당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근대미술관이 없어 뼈아픈 수난을 겪은 근대미술품이 제대로 수습 보존되지 못했다. 식민과 전쟁,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미술품과 미술사적 팩트가 왜곡, 은폐, 폐기되는 운명도 겪었는데 이제라도 그 잃어버린 유산을 복원할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워야 한다. 여러 곳에 흩어진 근대기 미술품과 이건희 회장의 근대미술품을 총집성해 우리의 근대, 곧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시대를 마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1970년 이래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다뤄온 국립현대미술관은 근대미술 소장품이 1000여 점에 불과했고, 근대미술 거장인 이중섭·박수근의 대표작 유화 등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건희 기증품’으로 1000점 이상의 근대미술품을 추가로 확보하게 돼 별도의 근대미술관 건립의 기반을 얻게 됐다. 여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왕가미술관에서 넘겨받은 유물 등 대략 2000점의 근대미술품을 더한다면 번듯한 근대미술관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결단이다. 문화부는 TF팀을 만들고 이건희미술관과 국립근대미술관 건립문제 등을 총체적으로 검토 중이다. 정준모 전 실장은 “유족들이 유물 성격에 따라 나눠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을 한곳에 모으면 ‘만물상’ 같은 박물관도 미술관도 아닌 기관이 될 것”이라며 “뮤지올로지(박물관학) 측면으로 볼 때도 적절치 않아 해외토픽감으로 웃음거리가 될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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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근대미술관 건립시 후보지로 제기되고 있는 경복궁 앞 송현동 부지.


국립근대미술관의 후보지로는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는 송현동 부지(경복궁 앞)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가 거론되고 있다. 송현동 부지는 삼청로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바로 이웃해 있어 연결성이 좋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는 일부 층만 리모델링해 미술관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각각 장점이다. 이들 후보지 중 한 곳에 국립근대미술관이 들어설 경우 서울 북촌의 국립민속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경복궁-아트선재센터 그리고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 클러스터가 조성되게 된다. 전문가들은 서울에 근대미술관이 세워지면 지역의 미술관과 연계해 전시와 프로그램을 순회하고 소장품을 대여할 수 있어 지역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라며, 문제는 정부 당국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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