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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되돌아올 때 떠난 냉전종식자 '슐츠'

2021년 05월호

냉전이 되돌아올 때 떠난 냉전종식자 '슐츠'

2021년 05월호

경제학자이자 외교관
냉전을 종식시킨 협상가
원칙에 충실한 합리적 보수주의


| 이영기 기자 007@newspim.com


워싱턴, 베이징 그리고 모스크바의 외교가는 냉전이 되돌아오는 분위기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최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은 중국 외교부장 왕이와 만나 미국을 향해 “일방적인 괴롭힘과 타국 내정에 대한 간섭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2주 앞서 일본을 방문한 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한국에 왔다. 미국-일본-호주-인도로 연결되는 인도·태평양 동맹라인을 논의했느니 안 했느니 추측이 난무했다. 블링컨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동맹국을 강조하는 같은 시간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했다. 미국에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제 정세는 다시 냉전체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런 때에 냉전 종식을 끌어냈던 전 미국 국무장관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월 6일의 일이다. 외교가에서 그는 ‘은밀한 협상가(secret persuader)’로 통했다. 그는 101세 마지막 순간까지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의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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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이자 외교관

2차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그는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간호사관이었던 헬레나 마리아 오브라이언을 만나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5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아내가 1995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그는 샤로테 메일리아드 스위그와 재혼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사교계 최고 인물로 통했다.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새로운 결혼생활은 온통 사교 파티로 이어졌다. 1920년 뉴욕에서 독일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명문 사립 프린스턴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MIT와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바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비전과 헌신으로 미국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를 지나 냉전 종식의 길을 열 수 있었다”며 “전임 대통령들처럼 그의 조언을 구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4번이나 행정부 내각 각료를 지낸 드문 인물이다.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 백악관 예산국장, 재무장관을 지낸 후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8년간 국무장관으로 미국의 외교를 담당했다.

바이든도 새로운 냉전의 입구에 서서 그의 조언이 간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가까운 인연은 아닌 모양이다. 1986년 슐츠의 일화는 미 의회에서 아직도 회자된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공에 대한 제재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이 남아공 내에서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로 거부권을 행사하자 의회가 다시 의결해 이를 강행한 적이 있다.

이때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슐츠와 바이든이 격돌했다. 이제 막 40세에 접어든 젊은 바이든이 슐츠에게 “도덕적인 감수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면서 퍼부었다. 그때 63살이던 슐츠는 “당신이 공무원인 나를 이리저리 몰아세우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도 미국에 세금을 내는 미국 시민의 한 명이라는 사실이다”라고 노련하게 에둘러 반박했다. 상원청문회에서 국무장관의 이런 노련함이 상원의원들의 박장대소를 이끌어냈다.

냉전을 종식시킨 ‘은밀한 협상가’

슐츠와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1985년 11월 21일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국의 합의문에 서명하던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절정으로 치닫던 1982년 미 국무부 수장으로 취임한 그는 전임자인 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와 정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내걸고 미국과의 데탕트, 즉 긴장 완화를 추구하면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볼 때가 왔다.

1987년 그는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체결을 이끌어냈다. 이 조약은 중단거리 핵미사일의 생산과 배치를 전면 금지해 양국의 군비 경쟁을 끝낸 합의로 꼽힌다. 이를 위해 양국은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슐츠와 셰바르드나제는 30번이나 만났다.

지금은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2018년 10월에 러시아가 먼저 위반했다며 이 조약에서 탈퇴해 안타까울 뿐이다. 후버연구소장인 콘돌리자 라이스는 “그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든 사람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애도했다. 은근함과 끈기는 외교가에서 꼽는 그의 가장 큰 미덕이다.

원칙에 굽히지 않는 합리적 보수주의

이런 그의 끈기를 지탱한 것은 시류에 굽히지 않는 뚜렷한 가치관이었다. 사표를 내던진 사례. 닉슨 행정부 때의 일이다. 재무장관인 그에게 대통령과 측근들은 국세청을 이용해 정적들을 축출하라는 요구를 했다. 하지만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슐츠는 이 요구를 거절하면서 사표까지 내던졌다. 주변에서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또 1973년 닉슨 대통령이 물가 통제에 나서자 그는 결국 재무장관 자리를 버렸다. 시카고에서 경제학 교수를 지내 시카고학파로 분류되는 슐츠의 자유시장 원리에 대한 믿음이 그 배경이었다.

남아공 문제로 바이든에게 공격받은 것처럼 그가 인종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인종 간 평등에 대해 엄격한 편이었다. 후버연구소에 있으면서 콘돌리자 라이스 교수를 클린턴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밀어넣었고 이후 국무장관까지 끌어올렸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또 금융정책에서 유명한 ‘테일러 준칙’을 만든 존 테일러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를 국가경제위원회에 천거하기도 했다. 테일러 교수는 터키계 미국인이다. 지금도 인종차별이 가시지 않은 텍사스 주 북부의 한 도시 포트워스에 슐츠가 흑인 동료와 업무상 출장을 갔을 때다. 호텔에서 흑인에게 방을 줄 수 없어 빈방이 없다고 변명하는 지배인에게 “방이 없다면 내 방에서 같이 자게 할 수는 있겠죠”라고 설득한 일화도 있다.

소련과의 은밀한 협상에서도 끈기와 함께 이 같은 부드러움이 큰 힘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치적 요구도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는 가차 없이 사표를 내던졌다. 그가 100세를 넘기면서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신뢰는 근본적이고 상호적이며 확산하는 것이고, 최고의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며 “이런 연대를 바탕으로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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