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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미술프런티어 김달진, 그는 어떻게 브랜드가 됐나

2021년 02월호

스페셜 인터뷰-미술프런티어 김달진, 그는 어떻게 브랜드가 됐나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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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 윤창빈 사진기자 pangbin@newspim.com


“기록이 잘 관리되면 가짜그림 발 못붙이죠”

여기 이름 석 자가 브랜드가 된 사람이 있다. 미술계에서 작가를 제외하고,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된 예는 흔치 않다. 그런데 그는 아카이브 분야를 50년간 파고들어 이제 큰 산이 됐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김달진(66) 관장이다.

‘미술에 관한 한 모든 길은 김달진으로 통한다’는 말처럼 ‘김달진’과 ‘달진닷컴’이라는 브랜드는 국내는 물론 해외 미술계에서도 알아주는 브랜드다. 가장 풍성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 프로바이더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의 대표적 미술관인 LA카운티미술관의 큐레이터는 서울에 올 때마다 자료 검증을 위해 김달진을 찾고 있고, 영국·일본 등지에서도 그를 찾아나서는 전문가들이 줄을 잇는다.

K아트의 진면목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우리 미술계를 건강하게 하는 데 있어 김달진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브랜드가 됐다. 그는 말한다. “각종 기록이 잘 관리되면 위작도 발 못 붙인다”고. ‘걸어다니는 미술사전’이자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그를 만나 미술의 중요한 영역을 개척한 스토리와 새해 미술계 과제를 들어봤다.

Q. 어린 시절부터 우표, 상표, 영화전단지를 가리지 않고 모았고, 여성 잡지에 실린 세계 명화에 매료됐던 고교생이 미술계 입문 50년이 됐다. ‘김달진 없는 미술계’는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숙명인가.

고향이 충북 옥천이고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막내인 나는 셋째 형님의 보살핌 아래 대전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모으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기념우표가 나오면 우체국 창구로 가장 먼저 달려갔다. 고등학교는 서울서 다녔는데 청계천의 헌 책방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지금이야 세계적인 명화를 직접 볼 기회가 많지만 그 시절에는 인쇄된 도판밖에 없었다. 그 인쇄물을 모아 스크랩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니 운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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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재직시절. 큰 가방을 들고다니며 미술자료를 샅샅이 수집했다.


Q. 아키비스트(기록관리자), 잡지편집인(기자), 박물관장, 연구자, 유튜버 중 어느 쪽이 실체인가.

다섯 가지 모두가 다 나 자신이다. 한 단계씩 고리처럼 진화했다고 할까. 미술자료 수집이 너무 재미있어 몰두하다가 1978년 월간 ‘전시계’에 입사해 3년을 다녔고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임시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비록 일당 4500원의 ‘일용잡급’이었지만 각종 미술 자료를 수집해 통계를 내고 분석한 뒤 리포트를 만들자 언론매체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미술관에 재직하던 1995년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란 책도 냈다. 2001년에는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차리며 독립했고, 이듬해 미술정보잡지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다.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해 매년 많은 전시를 기획했다. 한국미술에 관한 특정 주제를 세워 자료에 기반한 미술사적 전시를 꾸민 뒤, 이를 갈무리해 학술도서를 발간한다. 증거물을 제시하고 연표를 만들고 전문가를 통한 설문조사, 관련자료의 목록화로 이어가는 식이다. 2016년부터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예술-대중문화 아카이브’를 강의하고, 유튜버로 미술계 소식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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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새로운 직업의 롤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Q.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야를 파고들어 교과서에까지 소개됐다. ‘미술프런티어’라 부르고 싶다.

특별히 목표로 한 건 아닌데 필요에 의해 일의 범위가 자꾸 확장된 케이스다. 중고교 시절 스크랩에 빠져 있는 나를 보고 주위 어른들이 “매일 신문쪼가리만 오려대고 있으니 장차 어쩔꼬”라며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한 우물을 죽자고 판 결과 직업이 됐고 사명감도 생겼다. 2013년 중학교 도덕교과서(금성출판사 간)에 새로운 직업의 롤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취미를 직업으로 개척했으니 ‘미술프런티어’라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자료를 꼼꼼히 정리해 한국현대미술의 사료를 만드는 아키비스트가 종전의 내 직업이었다면, 요즘은 이를 활용한 기획전과 책자를 만들고 ‘라키비움’(라이브러리+아카이브+뮤지엄의 합성어)이라는 전문가를 길러내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이제 크리에이터 영역으로 접어든 셈이다. 제7회 ‘홍진기 창조인상’(2016년, 유민문화재단, 중앙일보)도 받았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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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지만 가득했던 청년 김달진을 이끌어준 이경성(왼쪽)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Q. 아버지처럼 모신 분이 계셨다는데.

고교 시절 책자와 잡지에 실린 서양 명화들을 선별해 10권짜리 대형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이름도 거창해 ‘서양미술전집’이었다. 그리곤 유명한 평론가, 미대 교수에게 무작정 편지를 쓰며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아무도 답장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한 분이 “연구실로 한번 와보라”고 하셨는데 석남 이경성 교수였다. 당시 홍익대박물관 관장이셨던 교수님을 뵙고 보자기로 싸간 서양미술전집 10권을 내밀었다. 이를 보시곤 깜짝 놀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되시면서 미술관 입사를 추천해 15년간 일했다. 또 교수님이 만드신 석남미술문화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대학, 대학원을 마쳤으니 은인이자 인생의 주춧돌이신 분이다. 일요일마다 가족들과 찾아뵈었는데 이제는 하늘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

Q. 백남준, 김환기, 천경자 등등 한국 대표작가 350여 명의 신문·잡지 기사와 자료를 빠짐없이 챙겨 D폴더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백남준은 벌써 9권, 김환기와 이중섭, 천경자는 7권이 됐다는데 작가별로, 단체별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아카이빙을 하는 이유는.

미술 자료를 여러 주제로 찾지만 한 작가를 총체적으로 찾는 일이 가장 많다. 한 작가의 단행본, 도록, 팸플릿, 리플릿, 논문, 신문·잡지 기사, 작품으로 분류해 매월 ‘서울아트가이드’에 한국미술대표작가 아카이브를 연재 중인데 어느덧 67회가 됐다. 누구나 예약만 하면 목록과 함께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우리 박물관의 모든 자료는 공익을 위해 공개하고 있다.

Q. 천경자 ‘미인도’ 위작 논란, 이우환 위작 논란 등 각종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검증과 자료 취합을 위해 박물관을 찾는 이가 많겠다.

누구나 작가의 화집, 팸플릿은 소장하고 있지만 한 작가의 잡지·신문 기사, 사적인 아카이브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아 관리하는 곳은 우리 박물관뿐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내방객이 많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의 버지니아 문 박사는 2012년부터 네 차례나 내방했다. 2022년에 한국 관련 큰 전시를 준비 중이어서 작년에도 다녀갔다. 영국 런던대학 SOAS의 샬롯 홀릭 교수,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의 구로카와 히로타케 교수, 홍콩대학 재학생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자료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찾아온다. 산 넘고 물 건너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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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의 각종 자료를 정리한 D폴더를 살펴보는 김달진 관장. 한국근현대미술 주요 작가 350명의 자료를 D폴더로 아카이브화했다.


Q. 미술시장에 가짜 그림이 유통되는 걸 막기 위해서도 자료 축적이 중요하다는데.

위작 검증 시 과학감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프로비넌스’(작품이력)이다. 결정적인 증거물인 아카이브 자료가 채택되는 순간, 진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력이 애매하면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Q.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지금의 종로구 홍지동으로 옮기며 평생 모은 자료 2만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섭섭하지 않았나.

지난 2010~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공간지원사업을 통해 건물의 전세보증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일몰제에 따라 전세금 8억여 원이 회수되는 바람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150평 공간을 사용하다가 86평 공간으로 좁혀서 이사하는 바람에 일부 자료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기증했다. 아쉬웠지만 자료가 잘 활용되고 있다니 보람을 느낀다.

Q. 미술 현장을 누구보다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분석하는 입장에서 한국미술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미술시장은 몇몇 메이저 화랑이 독점하던 구조였는데 최근에는 경매사들이 오프라인 마켓은 물론 온라인 경매까지 장악한 상태다. 메이저 옥션과 화랑들은 매출 확대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공존과 공익에 눈을 돌려야 한다. 지난 2006, 2007년 미술시장이 최고의 호황기였을 때 모 화랑 대표가 “000의 작품을 받아오면 바로 웃돈을 얹어줄 테니 고생 좀 그만하고 돈 좀 챙겨라”고 권유했다. 내 길이 아니라 귓등으로 흘렸지만 지금도 미술품 경매 최고가 뉴스가 매번 언론을 뒤덮는다. 그런데 이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닐까. 몇몇 블루칩 그림을 제외하곤 거래가 잘 안 된다. 이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시장을 넓게 확산해야 불황이 해소될 것이다.

Q. 매일 15종의 일간신문을 정독하고, 방송·통신·잡지 온라인뉴스를 체크하며 뉴스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휴가는 가는가.

우리는 아카이브 기관이기 때문에 아카이브 보존을 위해 15종의 일간지를 구독하고 미술잡지를 정독한다. 언론에 실린 기사 중 주요 기사는 유튜브 브리핑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휴일에도 사무실에 출근하고, 퇴근해도 컴퓨터 앞에 줄창 앉아 있으니 일중독인 셈이다.

Q. 박물관과 연구소를 운영하고 자료를 수집, 분석하려면 넓은 공간과 함께 인건비, 기획전시 및 컬렉션 비용 등 꽤 많은 예산이 필요하겠다. 예산은 어떻게 조달하나.

재정의 대부분을 월간지인 ‘서울아트가이드’의 광고수익으로 조달 중이다. 박물관후원회의 도움도 일부 받고, 사안에 따라 프로젝트도 간혹 수행하지만 이제 거의 한계에 봉착했다. 코로나 장기화로 잡지의 광고수익이 절반 이하로 줄었고, 자료의 디지털화 작업도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 막막하다. 정예화했지만 직원이 12명이라 인건비 부담도 벅찬 현실이다.

Q. 그동안 정부와 일부 후원자들이 박물관을 지원해 왔다. 그러나 박물관과 연구소가 문을 닫지 않고 계속되려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듯하다.

공공을 위해 운영되는 자료박물관과 연구소를 언제까지 개인이 버티며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한 문화선진국이라면 미술의 토대, 즉 펀더멘털에 해당되는 아카이브와 사료들이 공공의 영역에서 체계 있게 수집되고 관리돼야 할 것이다. 기초가 단단히 다져져야 미술시장도 클 것이고, 미술 한류도 뻗어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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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매일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김달진 관장. [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Q.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어떤 걸 다루나.

매달 ‘서울아트가이드’를 발행하고 daljinmuseum.com, artarchives.kr, 달진닷컴 등 3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SNS의 중요성을 실감해 왔다. 연구소 트위터는 4만1288명, 개인 페이스북은 5289명의 팔로워가 있다. 유튜브는 2018년 10월 시작했는데 현재 구독자 1060명에 830건의 콘텐츠가 올라가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고 전문 분야라 구독자가 적지만 꾸준히 정보를 축적하면 훗날 하나의 영상아카이브로 제 역할을 할 거라 믿는다. 미술계 소식이 궁금하면 유튜브 검색창에서 ‘김달진’을 눌러 달라. 어디서도 찾지 못한 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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