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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沱㶞)보다 빛나는 ‘호이안(會安)의 추억’

2019년 07월호

다낭(沱㶞)보다 빛나는 ‘호이안(會安)의 추억’

2019년 07월호

| 조용준 작가 digibobos@newspim.com


저비용항공사(LCC)들이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것이 증명하는 것처럼 동남아 지역으로의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저비용항공사들이 고속 성장을 거듭하는 것은 일본과 동남아 등 중·단거리 노선에서 저렴한 가격의 항공권 구입을 원하는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 1분기 전체 항공시장에서 저비용항공사들의 분담률은 32.2%로 지난해 같은 기간 29.5%보다 2.7%포인트 상승했다.

동남아 국가 가운데서도 최근 가장 높은 관심이 쏠리는 곳은 비엣남(베트남)이다. 지난번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의 정상회담도 있었고, 최근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비엣남이 뜻밖의 수혜자가 돼 투자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비엣남에서도 가장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은 단연코 다낭(Da Nang, 沱㶞)이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택시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뛰어난 접근성에다, 호텔 문을 나서면 바로 펼치지는 해변이 끝없이 이어지는 등 관광지로서의 조건을 두루 충족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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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시내에서 5km 떨어져 남중국해와 닿아 있는 미케(My Khe) 해변은 비엣남에서 유명한 해변 중 하나다. 해변의 길이에 비해 개발이 덜 된 편이라 조용하고 한적하다. 20km에 이르는 백사장은 1970년대 비엣남 전쟁 당시 미군의 휴양소로 사용됐다.

현재 다낭에는 대형 리조트와 호텔 건물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 다낭이 소비도시로 진화하고 있는 데는 엄청난 수로 밀어닥치는 한국 관광객이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1달러” 혹은 “만원”을 외치는 호객꾼이나 상인들을 흔히 마주칠 수 있다.

다낭의 지명은 참어(占語, Cham language)의 ‘Da Nak’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큰 강의 입구’라는 뜻이다. 이 도시의 기원은 192년 말레이계인 참족(占族, ‘짬파’나 ‘호이’라고도 한다)이 세운 참파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다낭은 참족의 중요 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다.

1847년 두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 도미니크 레페브르(Dominique Lefèbvre) 주교와 뒤클로스가 당시 응우옌 왕조(1802~1945)가 지배하던 다낭에 은밀히 들어왔다가 수감됐다. 이들을 구출하고 비엣남에서 가톨릭 포교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프랑스 해군은 2대의 전함과 라피에르 대령을 다낭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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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남 마지막 응우옌 왕조의 도읍지였던 후에의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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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에르 대령은 레페브르 주교가 이미 자유의 몸이 돼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 1847년 4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프랑스 함대는 비엣남과 포격전 끝에 다낭 항에 정박 중이던 비엣남의 전함 여덟 척을 침몰시키고 도망쳐 나왔다.

1858년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비엣남 조정의 박해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비엣남 조정에 프랑스군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을 개시했다. 이로써 비엣남과 프랑스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1858년 9월 1일 프랑스 해군은 다낭을 점령하고, 투란(Tourane)이라고 불렀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됐다.

1963년 비엣남 전쟁이 발발하자, 다낭은 월남군과 미군의 주요 공군기지로 활용됐다. 그때부터 다낭의 인구가 100만명 넘게 증가했다. 1968년 응우옌 왕조의 도읍지였던 ‘후에(Hué, 順化) 전투’의 여파로 후에에서도 많은 사람이 다낭으로 피신했다. 1997년부터 다낭은 비엣남의 네 번째 직할시가 됐다.

그런데 다낭이 인기 좋은 휴양지가 되고 있는 데에는 호이안(Hoi An, 會安)이란 조그만 도시가 커다란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마을을 지닌 유서 깊은 도시가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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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 올드 타운에서는 비엣남 전통복장인 아오자이를 입은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호이안은 호아이퍼(Hoaipho), 파이포(Fayfo 혹은 Faifo)라 불렸다. 당시 호이안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대만, 일본, 오키나와 등과 매우 활발하게 해상무역을 전개하던 번성한 교역도시이자 항구였다.

따라서 당시의 건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고, 그런 건물들이 주는 정취가 매우 독특하다. 중국의 푸젠성이나 광둥성, 하이난 상인들의 조합건물(회관)이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배경이 예뻐서 사진이 잘 나오기에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경주 한복 투어나 교토 기모노 투어처럼 아오자이 투어가 유행이다.

일례로 광둥성 어부들과 상인들에 의해 1885년 세워진 조합 건물인 광둥회관은 호이안은 물론 비엣남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건축물의 하나다. 건물에 들어간 자재들은 모두 광둥성 현지에서 제작해 배로 실어온 다음 이곳에서 조립해 건물을 완성했다. 그러니 건물 하나도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고, 이곳이 그만큼 중요한 항구였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광둥회관이나 푸젠회관 모두 항해의 수호 여신인 마조(媽祖) 혹은 천상성모(天上聖母)를 모시고 있다. 화교의 진출과 함께 마조 신앙도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지로 퍼져나가 각지에 마조의 사당이 건립됐다. 대만에서 마조는 여러 신 가운데서도 옥황상제만큼이나 인기가 높다. 오키나와에도 마조의 사당이 있는데, 이는 섬이라는 지역적인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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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1593년에 건립돼 426년의 역사를 가진 내원교.


일본도 이곳에 일찍부터 진출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일본 상인들이 나가사키로부터 출발한 주인선(슈인센)을 타고 와 활발하게 교역을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후의 도쿠가와 막부는 무역을 허가하는 증서를 발부했는데 이를 주인장(슈인죠)이라 하며, 도착지가 명기된 공문서로 소지자가 승선한 배가 해적선이 아닌 상선임을 증명했다. 주인장을 가지고 무역을 했던 배이므로 ‘주인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일본 상인들은 도자기와 무기, 수정, 가구류, 금속 제품 등을 갖고 와 이를 실크와 목재, 옻가루, 계피, 제비집, 침향, 호박이나 석영 등과 교환해 갔다. 당시 일본 주인선은 동남아 19곳 항구에서 교역했는데, 그중 22.7%가 호이안을 담당했다.

특히 몬순 시즌에는 대다수 주인선이 호이안에 머물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이곳 주민과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개중에는 응우옌 왕조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딸을 왕의 측실로 들여보내고 호이안의 거부가 된 사람도 있었다. 17세기 초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과 가족이 1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교역의 흔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지금 내원교(來遠橋)라 불리는 일본 다리다. 말 그대로 멀리서 온 사람들을 위한 다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호이안에 정착한 일본 상인들이 1593년에 만든 길이 18m의 자그마한 이 다리는 돌로 이뤄졌고, 양쪽에 각기 두 마리의 원숭이와 개를 장식했다. 당시 이 다리 왼쪽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중국인 거주지가 있어서 이 둘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내원교는 다리를 만들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1719년 다리 중간에 아주 자그마한 사당을 만들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이 사당 역시 바다의 여신인 마조 신을 모신다. 지금의 외양은 중간에 개축하면서 중국과 베트남 양식이 추가된 것이라, 다리를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고 한다.

호이안에서는 올드 타운 구경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보아야 할 공연이 있다. 바로 ‘메모리즈 쇼(Memories show)’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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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즈 쇼’의 피날레 장면.


호이안을 끼고 있는 투본 강의 커다란 섬에는 ‘임프레션 테마파크(Impression Theme Park)’라고 하는 민속촌 비슷한 곳이 있다. 이곳에서 저녁에 공연하는 메모리즈 쇼는 그 웅장함이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여타 공연과 확연하게 다르다. 섬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야외무대(2만5000㎡)에서 벌어지는 공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야구장 관중석만큼이나 넓은 관람석은 무려 3300명 규모다. 공연에 참여하는 인원만도 500명이 넘는다. 한마디로 비엣남 최고, 최대의 공연이다.

메모리즈 쇼는 유명한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인상여강가무 쇼에 비견될 만큼 웅장한 서사성과 예술성을 보여준다. 특히 1km가 넘는 조명도로는 공연 내내 압도적인 광경을 선사하고, 적절한 첨단 조명 기술과 정교한 사운드 효과, 화려한 안무와 무대 디자인을 대규모로 적용해 많은 부분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공연은 400년 역사를 지닌 매력적인 무역 항구도시 호이안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한다. 옷감을 짜는 아름다운 비엣남 여성과 비엣남 전통 의상 ‘아오자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5막으로 구성된 공연은 제1막 ‘생명’, 제2막 ‘결혼식’, 제3막 ‘전등과 바다’, 제4막 ‘호이안 국제항구’, 제5막 ‘아오자이’로 이어진다. 다낭과 호이안을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다낭과 호이안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픈 상처도 있다. 호이안 인근은 비엣남을 남북으로 나누는 북위 17도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비엣남 전쟁 때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라서 민간인 학살지도 집중돼 있다.

호이안 일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기에 인근 마을인 빈호아, 퐁니·퐁넛, 하미마을 등에서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특히 빈호아는 청룡부대가 1966년 12월 3~6일 민간인 430명을 사살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에는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있고, ‘한국군 증오비’에는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런 민간인 학살 문제는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비엣남 방문 당시 유감 표명으로 외교적으로는 해결됐지만, 민간 차원의 참담한 기억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다낭과 호이안에서 여행의 들뜬 마음으로 방종하는 일은 되도록 자제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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