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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낡음, 예술 입히니 공간에 부가가치 높아져

2019년 04월호

새로운 낡음, 예술 입히니 공간에 부가가치 높아져

2019년 04월호

신축만이 능사 아냐, ‘자취와 역사성’이 중요
낡은 것에 아트·디자인 접목...도시를 리셋하다


| 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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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이 조성된 독일 에센의 옛 졸페라인 탄광산업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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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탄광산업단지를 복합문화단지로 바꾼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 스케이트장도 보인다.


낡은 곳, 버려진 곳이 각광받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 같으면 일거에 부숴버리고 효율적인 건물로 신축됐을 옛 공장과 창고들이 예술을 만나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근대기 또는 해방 전후 지어진 공장과 건축물은 아트디렉터들 사이에 가장 매력적인 공간으로 부상 중이다. 심지어 건축디자이너들 중에는 전국에 잔존하는 낡은 공간을 찾아다니며 활용을 검증하는 이도 생겨났다.

그동안 우리는 공간을 바라볼 때 효율성과 경제성 측면만을 중시했다. 그러나 이제 그 공간에 깃든 역사성과 흔적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과 역사를 배제한 채 획일적인 도시 개발을 진행했던 과거와는 달리 ‘사람과 공간의 기억’에 주목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지난해 9월 도시재생엑스포를 개최한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은 급격한 산업화와 전면철거를 통한 개발로 오래된 골목과 옛집들이 사라졌다. 옛 공간에 대한 기억도 잊혀졌다. 앞으로는 일방적인 대규모 개발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랜드마크를 재발견하고 주변과의 연계에 힘을 쏟겠다”고 했다.

사실 문화와 예술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일순간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축적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치열했던 인간 삶의 궤적을 품은 터전 중 그 건축과 건축을 둘러싼 장소가 특별하거나 유서 깊은 곳이라면 재조명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이에 새로운 매력을 불어넣을 수 있느냐다. 낡은 공간, 버려진 옛 공간이 품은 잠재력을 간파한 ‘눈 밝은 이들’로 인해 볼품없던 공장, 창고들이 부가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그림만으론 밥벌이가 되지 않아 건축디자이너로 변신한 홍동희(55) 대림창고갤러리 대표가 좋은 예다. 그는 2013년 수행했던 프로젝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에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를 발견했다. 무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소품을 벼룩시장처럼 팔곤 했던 곳이다. 모 패션업체는 젊은이들 대상의 패션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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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을 힙한 아트카페 거리로 바꾼 대림창고. 옛 정미소와 창고를 갤러리카페로 바꿨다.


낡았지만 탁 트인 창고를 본 순간 홍 대표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근대유럽건축에서 받았던 특별한 영감을 느꼈다. 초창기 곡식을 찧던 정미소였다가 물품창고로 쓰였던 50여 년의 흔적이 ‘훅’ 하고 다가왔던 것. 바로 그 자리에서 홍 대표는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이 공간을 사겠다’고 결심했고, 2015년 ‘대림창고 갤러리컬럼’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에서는 오래된 공장과 창고들이 재개발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 대림창고 또한 곧 사라질 것이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했다. 리모델링에서 홍 대표는 옛 대림창고의 담벼락이며 간판, 제반 시설을 최대한 살리고 지붕만 일부 뚫어 실내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카페 내부에 나무들을 심어 마치 자연 속에 있는 듯한 느낌도 줬다. 옛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과 가구를 직접 디자인해 곁들이기도 했다.

대림창고가 갤러리로 변신한 후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도심의 공장지대로, 오래된 구두공장과 자동차정비소가 명맥을 유지하던 성수동에 ‘한 멋’ 하는 멋쟁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샤넬, 나이키, BMW 등 유명 업체들이 잇따라 론칭쇼, 패션쇼, 팝업전시를 개최했다. 서울시향이 성동구민을 위한 클래식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대림창고가 사랑받자 성수역 일대에는 카페와 공방, 특색 있는 식당과 가게들이 빠르게 들어서며 서울의 ‘가장 힙한 거리’로 부상했다. 대림창고 바로 옆에는 바이산 갤러리카페가 들어섰고, 옛 혼다자동차 정비소 일대는 ‘S팩토리’라는 이름의 대형 복합문화공간이 조성됐다. 해외에서도 벤치마킹을 위해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불리는 성수동을 찾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이끄는 단순한 소비의 거리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화예술이 꿈틀대며 공존해야 ‘지속 가능한 사이트’가 된다는 점이다. 홍 대표가 역점을 두는 것 역시 문화예술이 곁들여진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새롭고 특별한 장소를 찾는 젊은 층을 계속 사로잡으려면 참신한 예술이 ‘필수’라고 믿기에 유망 아티스트들을 선발해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아티스트 양정욱에게는 초대형 목재 설치작품을 만들게 해 대림창고의 아이콘처럼 입구에 설치해 놓았다. 탁 트인 공간과 높은 층고의 옛 창고 곳곳에 혁신적인 조각과 회화, 공예품이 전시돼 ‘새로운 낡음’을 느끼게 한다.

성수동 외에도 구로동, 북촌, 부산, 제주 등 국내 곳곳에는 근대건축과 공장을 재활용해 뮤지엄과 복합문화시설, 아트카페가 잇따라 조성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한국의 문화 관계자들이 수시로 찾았던 곳은 이웃 나라 일본 세토(瀨戶) 내해의 나오시마 섬이다. 서울 여의도 크기만 한 이 섬은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섬’이었다가 ‘현대미술의 메카’로 변신해 영국 여행잡지 트래블러로부터 ‘꼭 가봐야 할 세계의 7대 명소’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국내의 수많은 정책입안자, 문화계 인사들이 잇따라 현장을 찾아 “우리 지역에도 예술섬 사례를 적용해 보자”며 의욕을 보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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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제련소의 높은 굴뚝과 시설 옆에 새롭게 미술관을 조성한 이누지마 섬.


‘일본의 지중해’라 불리는 아름다운 바다에 그림처럼 떠 있는 섬이었으나 쓰레기와 폐공장 때문에 몸살을 앓던 나오시마, 이누지마, 데시마를 세계인이 주목하는 예술관광지로 만든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스토리는 분명 연구해볼 만한 것이긴 하다. 출판기업 베네세그룹을 이끄는 후쿠다케 회장은 아무도 찾지 않던 섬 나오시마를 건축가 안도 다다오, 미술가 쿠사마 야요이와 손잡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섬’으로 만들었다. 그는 오타케 신로 등 아티스트들에게 섬 내의 버려진 낡은 집과 목욕탕을 예술작품으로 바꿔놓게 했다. ‘이에(家)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 시도는 오늘날 각국의 아트디렉터들을 사로잡고 있다.

후쿠다케 회장은 나오시마보다 낙후된 이누지마, 데시마 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도 열고 있다. 3년마다 열리는 이 국제미술제를 보기 위해 예술애호가들이 운집하고 있다. 한때 벼농사로 풍요를 누렸으나 일본의 한 기업이 1975년부터 16년간 60만t의 산업폐기물을 불법 투척해 ‘쓰레기 섬’이 됐던 데시마는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의 노력으로 ‘데시마 미술관’이 들어서며 활기를 되찾고 있다. 세계인의 심장 소리를 녹음해 들려주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심장 소리 아카이브’ 등 섬 곳곳에 독특한 작품이 설치돼 있다.

섬의 모양이 개를 닮았다는 이누지마(犬島)는 1909년부터 구리제련업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가격 폭락으로 제련소가 문을 닫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베네세그룹과 작가 야나기 유키노리는 이 섬을 ‘현대인이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만들자며 방치된 동제련소를 공기, 자연광이 스며드는 힐링 뮤지엄(세이렌쇼 미술관)으로 바꿔놓았다. 높은 굴뚝 인근의 폐가 5곳에는 ‘이에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낡은 건축물과 폐공장을 예술 사이트로 활용한 사례는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세계 각국서 부지기수로 만날 수 있다. 공해유발시설로 지목돼 수십년간 방치됐던 템즈강 변의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멋들어지게 개조해 매년 500만명이 찾는 곳으로 만든 테이트 모던은 최고의 성공 사례다. 테이트 모던은 화력발전소의 옛 기름저장고를 ‘더 탱크’라는 이름의 첨단 아트전시실로 재조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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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을 거쳐 변신한 이누지마 동제련소 내부. [사진=베네세아트 사이트]


중국에서는 상하이의 라오창팡이 유명하다. 1933년 영국 건축가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도축장으로 설계한 라오창팡은 구불구불한 구조가 무척 독특하다. 그러나 도심혐오시설로 지목돼 기피 대상이 됐다가 갤러리를 비롯해 아트카페, 레스토랑이 입점하며 복합예술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베이징 다산쯔 지역의 798예술지구도 옛 전선공장의 낡고 거친 시설을 최대한 활용해 성공한 예술 사이트로 부상했다. 그러나 초창기 가난한 미술가들이 몰려들고 갤러리와 미술관이 속속 들어섰으나, 부동산임대료 상승 등으로 요즘은 상업시설이 더 맹위를 떨쳐 아쉬움을 준다.

이렇듯 낡고 퇴색한 공장건물과 창고, 산업시설이 오늘도 예술공간으로 잇따라 변신하고 있다. 매끈한 첨단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묘한 아우라’ 때문에 낡은 시설은 인기가 수직상승 중이다. 바야흐로 낡은 것, 흔적이 있는 것이 귀한 공간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왔다. 단 명확한 좌표 설정과 함께 차별화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공급해야 이 트렌드가 오래오래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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