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 ANDA 뉴스| 월간 ANDA| 유돈케어| 안다쇼핑| 뉴스핌통신 PLUS
회원가입로그인정기구독신청

산아제한 역사 속으로...14억 인구대국, 사람 부족 발 동동

2019년 03월호

산아제한 역사 속으로...14억 인구대국, 사람 부족 발 동동

2019년 03월호

건국 후 신생아 수 최저, 산아제한 무용론 확산
출산독려부터 산아제한까지, 70년 역사 회고

| 이미래 중국전문기자 leemr@newspim.com


2016년 중국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 40년 가까이 지켜온 한 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두 자녀까지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했지만 출산율은 크게 늘지 않고 있다. 2018년 신생아 수는 1523만명으로, 1960년과 1961년 두 해를 빼고 역대 최저로 줄었다. 이에 따라 출생률도 인구 1000명당 신생아 수 10.94명으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1949년 건국 초기 중국 당국은 ‘인구가 국력’이라며 출산을 장려했다. 이후 식량 문제와 도시인구 압력에 직면하자 강력한 지화성위(計劃生育, 한 자녀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최근 들어서는 인구 증가율이 급감하고 저출산·노령화, 노동인구 감소 문제가 심각해지자 한 자녀 정책 전면 폐지를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건국 이후 70년간 중국의 시대별 인구정책 변화를 살펴본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1단계: 1949~1953년 ‘多産 애국’ 피임약 수입 엄금, 낙태 금지

1949년 신중국 수립 직후 중국 당국은 ‘사람의 노력은 대자연도 이긴다’는 뜻의 ‘런딩성톈(人定勝天)’ 구호와 함께 출산을 독려했다. 정부는 “믿을 수 있는 건 사람뿐”, “기적은 사람이 이룬다” 등을 제창했다.

특히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은 “사람이 많아야 국력도 강해진다(人多力量大)”며 다산을 적극 권장했다. 이에 따라 중국 위생부(衛生部)는 피임약 수입 금지령을 내리고 낙태를 법으로 엄격하게 단속했다.

출산독려 정책에 따라 1953년 중국 인구는 6억200만명을 기록, 정부 예상치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경제 사회는 생산력이 낙후돼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를 포용하지 못했고 의식주, 의료, 교육, 취업 등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농촌이 부자가 되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 씨앗을 많이 심고 뿌려야 한다’는 내용의 출산독려 포스터. [사진=바이두]



2단계: 1954~1977년 ‘오락가락 흐지부지’ 인구 급증

급격한 인구 증가로 식량난 등 사회문제가 대두되자 인구 통제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서서히 제기됐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신인구론(新人口论)을 통해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주장한 전 베이징대학 총장 마인추(馬寅初)다. 마 총장은 식량 증산이 인구 증가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인구가 늘어나면 민생경제는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며 마오쩌둥의 다산 정책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주장이 나온 후인 1954년 12월 중국은 첫 인구 및 가족계획 좌담회를 열어 산아제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뜻을 모은다. 중국 공산당은 1956년 9월 8차 전국대표대회(全國代表大會)에서 산아제한 방침을 공식 제시했다.

1957년 2월 마오쩌둥도 “인류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계획적인 인구 증가’를 주장하며 무조건 다산이 중요하다는 종전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1958년 대약진(大躍進, 노동력 집중화 산업을 통한 경제성장) 운동이 전개되면서 산아제한 정책은 다시 흐지부지됐다. 대약진운동으로 철강 등 노동력 집약 산업이 강조됨에 따라 인구 증가를 제한해야 한다는 마인추 총장의 주장은 “당 정책에 반하는 이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3년 동안 수천만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면서 또다시 산아제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대약진 실패로 마오쩌둥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고 류샤오치(劉少奇) 주석이 집권했던 1962년 12월 국무원(國務院)은 ‘산아제한 관련 통지문’을 내놨다. 이어 1966년 1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산아제한 문제 관련 통지문’을 발표했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인민일보 1957년 7월 5일자에 실린 마인추의 신인구론. [사진=바이두]

상세기사 큰이미지
‘사람의 노력은 대자연도 이긴다’는 뜻의 ‘런딩성톈(人定勝天)’ 출산독려 포스터. [사진=바이두]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극화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 일선에 등장한 시기 인구 증가율은 다소 하락세를 보였다. 문화대혁명 말기인 1975년 기준 일반 도시의 인구 증가율은 1000명당 10명, 농촌은 1000명당 15명 수준으로 하락했다.

당시 중국 사회에 나돌았던 ‘하나도 적은 건 아니지만, 둘은 딱 좋고, 셋은 많다(壹個不少, 兩個正好, 三個多了)’는 구호는 인구문제 및 출산정책에 대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1973년 12월 중국 당국은 ‘전국계획생육활동대회’에서 ‘완시샤오(晚稀少)‘ 원칙을 강조하며 산아제한 정책을 설파했다. 완(晚)은 남자 25세 여자 23세가 넘어 결혼해야 한다는 뜻을, 시(稀)는 출산과 임신은 4년 정도 간격을 둬야 한다는 뜻을, 샤오(少)는 최대 2명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부분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긴 했지만 전체 인구는 계속 늘어났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한 1978년 중국 인구는 약 10억명으로 1954년 대비 3억5000만명 증가했다. 지방정부가 초과 출산 케이스를 일부 누락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만큼 실제로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학자들은 “당시 마오쩌둥이 마인추의 주장을 좀 더 새겨들었다면 인구가 10억명까지 늘어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3단계: 1978~2013년 초강력 ‘산아제한’, 초과출산 발각 시 마을 전체 중절 수술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후폭풍으로 의식주 및 경제발전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인민공사(人民公社, 농촌행정 및 경제조직 일체화) 실패 등으로 인해 당시 중국의 농업 생산율은 저하됐고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76년 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경제에 주력했지만 경제 개발에 필요한 외화가 너무 적어 이 또한 역부족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당국은 초강력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하고 나선다. 1978년 10월 중앙정부는 관련 보고서를 통해 “가임기 여성당 1명, 일부 소수민족의 경우 많아야 2명까지만 낳을 것”을 권고한다. 별다른 효과가 없자 1980년 2월 신화사(新華社)는 ‘중국 인구 100년 전망 보고서’를 인용, “이대로 가면 2050년 중국 인구는 40억명에 달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1980년 9월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부부당 한 자녀만 낳을 것을 제의한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첫째는 출산, 둘째부터는 중절수술과 벌금’ 내용을 담고 있는 벽화 포스터. [사진=바이두]

상세기사 큰이미지
한자녀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캠페인. [사진=바이두]

상세기사 큰이미지
‘한 사람이 초과출산하면 마을 전체가 중절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산아제한 포스터. [사진=바이두]


1982년 9월 ‘한 자녀 정책’은 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보고서에 채택, 그해 12월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이전까지 ‘권고’ 수준에 그쳤던 산아제한 정책이 법률로 제정돼 강제성을 띠게 된 것이다.

초강력 산아제한 정책은 중국 사회에 태풍 같은 변화를 몰고 왔다. 비인권적인 낙태와 자녀 유기는 물론 출생 신고를 못하고 비호적 유민을 양산하는 등 커다란 부작용이 초래됐다.

당국은 한 자녀만 낳은 가정에는 △직장 승진 기회 △급여 인상 △생필품 지원 등의 혜택을 줬다. 반면 규정을 따르지 않은 가정에는 사회적인 불이익과 징벌이 뒤따랐다.

벌금은 부부의 가처분소득에 따라 산정됐다. 2014년 유명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는 한 여성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 셋을 낳았다는 사실이 적발돼 748만7854위안(약 13억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벌금을 내기 어려운 가정을 중심으로 영유아 유기, 심지어는 인신매매도 이뤄졌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첫째는 출산, 둘째는 중절수술과 5000위안 벌금, 셋째는 2만위안 벌금. [사진=펑황왕]

상세기사 큰이미지
산아 제한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차오성유지두이(超生遊擊隊)’ 가정. [사진=바이두]


지방정부는 산아제한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주민의 낙태 및 불임 수술을 강제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산아제한 정책을 어긴 7개월 임신부를 공무원들이 끌고 가 강제로 낙태시킨 일이 알려져 전 세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임신한 여성이 강제 낙태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을 가는 ‘차오성유지두이(超生遊擊隊)’도 크게 유행했다. 공무원은 임신 적령기 여성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지 여부를 감시했으며, 이웃집이 허락 없이 임신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5호담당제도 시행됐다.

뿐만 아니라 벌금을 내기 어려운 농촌 지역에서는 아이를 낳고도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키우는 ‘헤이하이즈(黑孩子, 검은 아이)’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호적이 없는 이들은 정규 교육을 받을 수도,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다. 당시 호적에 못 올린 헤이하이즈가 1억명에 육박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후커우(戶口, 호적)를 원합니다’. [사진=상하이하이야오(海摇)로펌]

상세기사 큰이미지
돼지는 많이 키우고 자녀는 적게 낳자(위). 가난을 끝내는 중절, 부자가 되는 피임(아래). [사진=바이두]

산아제한 정책 도입 초기 주민의 반발이 커지고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개선책을 제시한다. 1984년 19개 성(省)을 대상으로 첫째가 딸이면 둘째를 낳을 수 있게 하는 ‘1.5자녀 정책’을 펼쳤다. 2002년 9월에는 인구 및 산아제한 법 규정을 개선, 부모가 모두 외동일 경우 2명까지 낳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는 동안 중국의 합계 출산율은 1973년 4.54명에서 1990년에는 2.3명, 2000년에는 1.22명까지 하락했다. 중국 국무원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신생아 수가 4억명은 줄었다”고 평가했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4단계: 2014년 이후 ‘인구절벽’

시대가 변하면서 저출산·고령화가 큰 사회문제가 됐다. 인구절벽 경고음에 당국이 단계적인 두 자녀 정책을 내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40년 가까이 실시해 온 산아제한 정책으로 신생아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당국은 부모 중 한 명이 외동일 경우 둘째 출산을 허용했다. 일부에서는 두 자녀 정책 전면 시행 주장이 나왔지만, 이럴 경우 1년에 4700만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다시 인구 폭발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 일단 두 자녀 전면 허용은 유보됐다. 그러나 2015년 예상과는 다르게 중국 신생아 수는 1687만명에 불과, 예상보다 32만명이 적었다.
상세기사 큰이미지

저출산·고령화로 노동가능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16년 한 자녀 정책을 폐지하고 전면적인 두 자녀 정책 시행에 나섰다. 시행 첫해인 2016년 신생아 수는 1786만명(2011년 이후 최고치)까지 늘어났으나, 2017년에는 1723만명을 기록하며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2018년 중국 본토의 신생아 수는 1523만명으로 전년보다 200만명 감소했다.

이는 1960년과 1961년을 제외하고 최저 수준이다. 전망치가 1400만~1500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최악은 면했지만 하락세에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총인구 수 감소에 우려를 보이고 있다. 2018년 중국의 총인구는 13억9538만명으로 전년 말 대비 530만명 증가했다. 2017년(737만명) 대비 인구증가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
상세기사 큰이미지
두 자녀 정책 설명 팜플렛. [사진=바이두]


앞서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은 중국 총인구가 2027년 14억4000만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를 보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속도면 2027년 이전에 감소세로 전환될 것”이라며 “런커우훙리(人口紅利, 인구보너스: 인구 증가로 인한 노동력 증대가 가져오는 이익)가 이제 끝났다”며 경제 하락을 예고했다. 유엔 보고서는 2029년에 가면 중국이 인도에 지구촌 1위 인구대국의 지위를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상호 : (주)뉴스핌 | 사업자등록 : 104-81-81003 | 발행인 : 민병복 | 편집인 : 민병복 | 주소 :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70, 미원빌딩 9층 (여의도동) 뉴스핌 | 편집국 : 02-761-4409 | Fax: 02-761-4406 | 잡지사업 등록번호 : 영등포, 라00478 | 등록일자 : 2016.04.19
COPYRIGHT © NEWSPIM CO., LTD. ALL RIGHTS RESERVED.
© NEWSPIM Corp.